소설리스트

도비검무-156화 (156/184)

156화 무림비사武林祕史 한 구절을 문득 기억해 냈다.

청운이 기소웅이 건네는 서찰을 받아 쥐고는 즉시 개봉했다.

내용은 이달 그믐에 무림맹에서 구대세가와 오대세가의 명숙들을 모시고 현 강호의 정세에 대해 토론하고 대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청운도 꼭 참석해 달라는 맹주 무극검 사마휘의 부탁이었다.

서신의 말미에는 일필휘지의 맹주 서명이 있었다.

대단한 명필이었다.

청운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서신을 태워버리고는 기 분타주에게 말했다.

“기 분타주님. 수고하셨습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 분타주는 청운에게 예를 갖추고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청운도 다시 객점으로 돌아왔다.

청운은 삶은 고기와 소채 한 그릇을 먹고는 근처의 저잣거리로 향했다.

노숙에 필요한 물품과 건량을 사기 위함이었다.

청운은 사흘 치의 건량과 소홍주 세 병을 구입하고는 곧장 천문산으로 향했다.

열흘이면 섬서에 있는 무림맹까지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청운은 우회하지 않고 천문산을 바로 넘을 생각이었다.

우회하면 길은 훨씬 편하지만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청운은 조금 일찍 맹에 도착해 맹주와 현 강호의 문제들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눠볼 생각이었다.

천문산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숲이 깊고 광활하기로 소문난 산이었다.

그래서 녹림도의 산채도 많고 해서 일반인과 상단들은 시간이 서너 배가 더 걸리더라도 산을 넘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구룡령을 넘는 길이 특히 험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구불구불한 산길이 시작되었다.

길은 암벽 뒤로 숨었다가 다시 비탈을 만들면서 나타났고 그 길 끝의 벼랑 끝에 달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수많은 암벽과 암봉을 타고 넘었는데도 여전히 험한 길이 청운의 앞길을 수시로 가로막았다.

청운은 밤도 깊었고 더 이상 산길을 타는 것은 능률도 없다는 생각에 쉬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룻밤 쉴 곳을 찾기 위해 청운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칠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집채만 한 바위가 어슷하게 포개져 생긴 바위틈이 눈에 들어왔다.

그 틈 앞에 절묘하게도 아름드리 노송 몇 그루가 계곡에서 불어오는 찬바람도 적당히 막아 주는 것 같았다.

청운이 그곳을 향해 막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오-호-호-홋 하는 요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비단 같은 천이 주변의 허공을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폭이 두 척 가까이 되는 널따란 천이 마치 두루마리가 풀리듯 허공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얀 비단 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이한 사기邪氣와 요사한 요기妖氣가 청운의 전신을 짓눌러왔다.

무엇보다도 흰 비단 천이 휘리릭 펼쳐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요사한 웃음소리가 내기를 진탕시켰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탄식 같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설마! 무림삼비武林三秘 중 한 곳인 <환화루幻花樓>의 소혼마소召魂魔笑!”

청운은 옛날 하오문 비고에서 언뜻 보았던 <무림편람武林便覽>이라는 책자에 있던 외전편外典編의 무림비사武林祕史 한 구절을 문득 기억해 냈다.

무림삼비란 기녀妓女들의 비밀 점조직인 환화루幻花樓 그리고 평소에는 농민이나 어부 등으로 생활하다 아주 특별한 청부만을 받는 은비천銀秘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광마혼狂魔魂이다.

광마혼은 평소 무공을 숨긴 채 도살장의 백정과 대장장이 그리고 저잣거리의 광대 같은 일을 하다가 누군가의 특별한 지령이 있으면 순식간에 무서운 세력으로 화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평상시에는 힘만 기른 채 어떤 강호의 활동도 하지 않다가 그들과 관계된 누군가의 비밀 지령이 떨어지는 순간 순식간에 가공할 살귀들로 변해 목표가 반드시 제거될 때까지 멈추지 절대로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림삼비는 마족과 깊은 관련성이 있었다.

그들은 까마득한 과거 마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무림편람>에 씌어 있었다.

마족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존재 또한 강호에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무림삼비 중 하나인 환화루가 갑자기 이곳 천문산에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나머지 이비二秘도 이곳에 있다는 것인가? 청운은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머지는 어차피 조금 있으면 그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운은 잠시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최대한 운기했다.

하지만 하얀 비단천이 펼쳐지는 소리만 요란할 뿐 어떤 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운은 잠시 당황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은 사사천의 둘째 사혼환마와 여섯째 요사와의 대결을 상기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사혼환마의 사혼환등과 요사의 마마귀혼무도 그 진을 펼치는 주체는 극황지감술로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극황지감술이 감지할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서 진을 조종하고 있었다.

청운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청운은 황금면객과 대결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비우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결국 없는 것, 즉 공空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환술과 환영으로 사람의 의식과 감각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모조리 비워버린 몸에 들인 자연의 흐름은 속이지 못한다.

청운은 자신의 의식과 오감을 버리고 자연이 자신에게 전하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어른거리는 달빛 속에서 몸에 꽉 붙는 붉은 경장이 마치 요사한 환영처럼 사람의 오감을 자극했다.

특히 깊이 파인 앞섶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 둘 곳을 없게 만들면서도 자꾸 시선을 끌어당겼다.

자신을 모두 비우자 자연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환화루의 요녀들은 비단 펼치는 소리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사람의 내기를 진탕시키는 소혼마소召魂魔笑를 펼치며 호시탐탐 청운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청운은 모든 것을 공으로 비워버린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청운의 무영검이 마치 한 자로 은빛 가위처럼 하얀 비단 천을 모조리 세로로 갈랐다.

그러자 허-억-억 하는 다급한 헛바람 새는 소리와 동시에 열두 명의 홍의를 입은 요녀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들은 모두 몸매가 그대로 내비치는 착 달라붙는 붉은 나삼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에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영혼을 홀리는 것 같은 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혼마소로 펼치는 진이었다.

그 미소는 어지간한 고수는 보는 것만으로 기혈이 뒤엉켜 심장이 터져버리는 가공할 섭혼술을 이용한 진이었다.

저들 마녀의 미소에 담긴 섭혼술에 걸리면 영혼까지 탈탈 털려 죽거나 아니면 평생 요녀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무림편람>에 적혀 있었다.

청운이 파사破邪의 힘이 있는 치우전륜공을 더 끌어올려 운기하자 마녀들의 마소에 심신이 제압당하지는 않았으나 움직임에는 약간의 제약이 생기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마소에 청운이 치우전륜공으로 저항하자 마녀들 역시 섭혼술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것 같았다.

열두 명의 짓는 마소의 교태로운 웃음소리에서 요사한 요기가 금가루처럼 장내에 흩날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금빛 실로 엮어 짠 덫처럼 하나의 거대한 기막氣幕이 되어 회오리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최대로 끌어올리자 마녀들도 자신들의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리는지 그들 이 대치한 공간에 있던 대기가 짜-자-작 하는 소리를 내며 극심하게 휘어지고 뒤틀렸다.

찰나의 틈이 생겼다.

청운은 그 틈 사이로 입에 모은 치우전륜공을 확 불어내며 일갈했다.

“이제, 그만 웃어라. 역겹다.”

청운의 사자후에 섭혼술로 펼치던 진이 깨어진 마녀들이 일제히 입가에 한 가닥 핏줄기를 내비치며 비틀거렸다.

곧바로 청운이 무영검을 빼 들었다.

무영검을 본 마녀들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녀들은 달아나면서 한마디 했다.

“여겹다니. 오-호-호-호! 과연 그럴까요.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네요. 무위검 강청운! 당신도 우리의 웃음을 즐길 만큼 즐겼잖아. 오늘은 이 정도로 맛만 봐라. 다음에는 꼭 더 맛있는 웃음을 보여 주도록 하지.”

마녀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다시 어둠과 정적과 달빛이 가득 찼다.

청운은 마녀들을 뒤쫓아 모조리 쳐 죽이고 싶었으나 마녀들의 마소에 순간적으로 내기가 진탕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운기조식으로 진탕된 내기를 다스려야 할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아까 쉬려고 점찍었던 장소는 이미 적에게 노출되어 다른 곳을 물색하는 수밖에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그 마녀들이 달아난 반대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일각 정도 갔을까, 계곡 근처에 적당한 곳이 보였다.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같았다.

지상에서 약 십여 장 높이였다.

동굴 앞에는 몇 그루 매화가 하얀 꽃을 소담스레 피우고 있었다.

잠시 예쁘다는 생각을 하던 청운이 막 그 동굴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다가 홱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신지 모습을 보이시오.”

괴이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곧바로 웃음이 멎더니 듣는 사람의 심장을 오싹하게 만드는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놈은 이 천문산 어디에서도 쉴 수 없다. 죽기 전까지는…….”

청운은 목소리가 들리는 바위와 고목을 향해 연속으로 전륜장을 발출했다.

코-콰-콰-콰-콰-앙.

전륜장에 맞은 바위들이 돌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주변 대기가 순식간에 부옇게 돌변했다.

그 희뿌연 허공에서 부斧(도끼)와 대감도를 든 수십여 명의 장한들이 나타나 청운을 에워쌌다.

“광마혼狂魔魂의 광견狂犬들!”

청운은 나직한 신음성을 뱉어냈다.

하늘엔 새 그물, 땅에는 고기 그물이라는 천라자망天羅地網이 이곳 천문산에 펼져진 것 같았다.

청운은 속으로 말했다.

“저들이 나를 이곳 천문산에 파묻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무엇이든지 와라. 걸리는 대로 모조리 부셔 주마.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 보자.”

청운이 자신의 결심을 다잡는 사이 그들이 부와 대감도를 사납게 휘두르며 청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와 대감도가 일으키는 세찬 강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청운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부와 대감도의 맹렬한 강기가 자신의 전신요혈을 압박하는 찰나 청운은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면서 무영검으로 쾌-타-절-변-회의 초식을 연동해 맞받아쳤다.

까-까-까-깡.

그자들의 부와 대감도에서 일어난 시퍼런 강기와 무영검에서 발출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서로 뒤얽히고 부닥치며 설킬 때마다 칠흑처럼 깜깜한 산속의 밤 속에 마치 대장간의 용광로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것 같은 때아닌 불꽃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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