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이제 내 신분을 밝혔으니 국주를 불러오시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과 적막이 칠흑 같은 밤에 어둠의 깊이를 덧보태고 있었다.
전각들 사이사이 띄엄띄엄 켜진 유등의 불꽃만이 어둠과 사투를 벌이느라 붉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오문 감숙 분타에서 곧장 난주의 사해표국으로 달려온 청운은 표국이 한눈에 들어오는 맞은편 둔덕에 서 있었다.
처음에 청운은 사해표국에 몰래 침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오늘은 사해표국에서 무슨 정보를 빼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징계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를 받아낸다는 측면에서 고려할 때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편이 그들 무리에게 더 큰 충격과 파급력을 줄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결심을 마친 청운은 한 마리 야조처럼 표국의 정문 앞에 날아 내렸다.
청운은 곧장 대문을 향해 사성의 전륜장을 내질렀다.
콰-콰-꽈-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사해표국의 대문이 산산조각 박살이 나서 사방에 흩뿌려졌다.
“웬 놈이냐!”
“누구냐!”
“무슨 일이냐!”
“……!!”
갑자기 표국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지고 무기를 든 사내들이 우르르 대문 쪽으로 몰려나왔다.
청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무기를 빼든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사나운 기세로 청운을 막아섰다. 그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검 끝으로 청운을 겨누며 말했다.
“네 놈은 누구냐! 이 야밤에 다짜고짜 이런 난장판을 벌이느냐! 이유를 대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흑의를 입은 그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키가 상당히 크고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청운이 그자의 눈을 노려보며 높낮이가 없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다. 당장 국주를 불러라.”
청운의 무시하는 말투에 분노한 그가 소리를 꽥 지르며 말했다.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얘들아!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당장 저놈을 잡아 족쳐라. 일단 반쯤 죽여 놓고 다시 시작하자.”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십여 명의 사내들이 칼을 휘두르며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청운은 초장부터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을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사내들의 검을 묘묘보허의 보법을 밟으며 가볍게 피한 후 신형을 빙그르르 회전하면서 권법拳法과 각법脚法으로 그들의 가슴과 턱주가리를 있는 힘껏 치고 차 버렸다.
퍼-퍼-퍼-벅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으-윽-악-악-악 하는 비명이 동시에 장내에 울려 퍼지는 순간 청운에게 함부로 달려들던 사내들이 철퇴에 얻어맞은 것처럼 이삼 장 이상이나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청운의 놀라운 무위에 잔뜩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내들이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일제히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린 우두머리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갑자기 달라진 말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 대협은 누구신지요. 무슨 이유로 저희 표국에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십니까.”
그가 존댓말을 하자 청운도 말투를 바꾸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은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오. 괜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소. 빨리 우 국주에게 알리시오. 나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바쁜 사람이오.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소.”
청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전 쪽에서 웅후하고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세 명의 인물이 장내로 다가왔다.
“우리 표국의 수석호위가 자격이 없다면 나는 어떻소. 나는 총사 도일후외다. 대협, 무슨 일로 그러는지 나에게 말씀을 하시오. 내가 모든 걸 책임지리다.”
그자가 장내에 나타나자 청운을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물러나면서 그자에게 예를 갖췄다.
총사 도일후는 청운의 삼 장 정도 떨어진 지점에 멈추어 서서는 청운의 아래위를 한 차례 훑어봤다.
도 총관은 오십 대 초반 정도로 하관이 약간 뾰족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청운이 그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뗐다.
“과연 당신이 책임질 수 있을까? 내 볼 일은 당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오. 당신이 책임지겠다니 내 말하리다. 나는 강청운이오. 자, 이제 내 신분을 밝혔으니 국주를 불러오시오.”
청운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장내의 이곳저곳에서 신음 비슷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설마, 무위검!”
“무위검이 왜 우리 표국에!”
“……!!”
총사와 수석호위의 낯빛이 순식간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총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몇 차례 내뱉더니 청운에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인가 했더니 요즘 그 위명이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무위검 대협이셨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나누며 이야기하시지요. 우리 표국에는 좋은 차가 아주 많습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하는 도 총사의 말이 채 끝나기고 전에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청운이 말했다.
“도 총사. 나는 사해표국에 차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닙니다. 국주에게 빚을 받으러 왔소. 그러니 지금 당장 우 국주를 불러내시오. 아니면 나를 국주에게 바로 안내하시오.”
얼굴에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 총사가 다시 청운에게 물었다.
“대협.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그 연유를 알아야 해결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이러시는 이유를 말씀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빚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청운이 한동안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좋소. 굳이 듣고 싶다면 내 말하리다. 대신 이 말이 총사와 나누는 마지막 말이 되기를 바라오. 나는 최근의 석가장 사건을 비롯해 당신네 사해표국이 강호에 저지른 악행에 대한 빚을 받으러 왔소. 자, 내 말은 다 끝났으니 어서 국주를 불러오시오.”
청운의 단호한 말에 장내에 있던 사해표국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갑자기 장내가 심하게 요동치듯 술렁거렸다.
게 중에 소심한 몇몇은 땅이 꺼질 것 같은 깊고 무거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총사가 오른손을 들어 장내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손을 내리면서 그가 말했다.
“대협, 듣고 보니 그 일은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군요. 하지만 이를 어찌합니까. 그 일은 국주님 아니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지금 국주님은 우리 표국의 주력들과 함께 먼 표행을 떠나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다.”
“…….”
“국주님께서 표행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제가 대협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협,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다음에 국주님이 계실 때 한 번 더 방문하시지요.”
청운이 서릿발 같은 한 줄기 냉소를 입가에 베어 물며 말했다.
“그거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어디로 표행을 갔습니까? 그리고 언제 돌아옵니까?”
도 총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황궁이 있는 개봉으로 갔습니다. 기약 없이 떠나서 언제 돌아오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청운이 도 총사을 향해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총사. 똑바로 말하시오. 개봉으로 간 것이오. 아니면 황궁으로 간 것이오.”
청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잠시 의아해하던 총사가 말했다.
“황궁입니다.”
총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운이 무영검을 빼 들었다.
청운이 내력을 주입하자 무영검이 청아한 검명을 토했다.
무영검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삼 장 가까이 일렁거렸다.
청운의 무위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장내의 장한들이 우-우 하는 경탄의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이 무영검으로 서쪽 하늘을 천천히 한 번 그어 내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무영검의 검 끝을 쳐다보던 장내의 장한들이 곧바로 입을 딱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서 지금의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에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내에서 이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있던 그 둘레만 자그마치 이십여 장이 넘을 것 같은 전각 하나가 정확히 세로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청운이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는 사람들을 한 차례 쓱 둘러보고는 총사를 향해 말했다.
“우 국주가 돌아오면 내 말을 똑똑히 전하시오. 내가 조만간에 반드시 빛을 청산하기 위해 사해표국에 다시 오겠다고.”
청운은 그 말을 끝으로 무영검을 검집에 납검하고는 곧바로 사해표국을 나왔다.
대문을 나서는 청운의 등 뒤에서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누군가의 깊은 탄식과 안도의 한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 * *
남으로 내려갈수록 봄기운이 완연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겨우내 숨죽이며 움츠렸던 땅을 녹이고 나무마다 연한 초록의 새로운 희망을 움트게 하고 있었다.
아직은 찬바람이 관도에 늘어선 미루나무며 버드나무들 사이에서 맴돌다 지나가는 과객過客의 옷섶을 여미게 했지만 이미 한겨울의 모진 차가움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청운은 사해표국을 떠나 섬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사시巳時가 조금 지난 것 같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사해표국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곧장 이곳까지 오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런지 살짝 허기가 졌다.
아직 점심때는 조금 멀었으나 청운은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객점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관도와 대로가 맞닿는 곳에 나무로 지은 허름한 객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만미루>라는 이름이 큼직하게 써진 깃발이 찬바람에 접혔다 펼쳐질 때마다 그곳이 객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청운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 객점을 향해 걸어갔다.
객점이라고는 그곳이 근처에서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객점의 문을 막 밀고 들어가려던 청운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번뜩였다.
청운은 자신을 찾는 하오문의 표기를 문 바로 옆의 판자에서 발견했다.
표기는 북쪽으로 오 리 정도 떨어진 야산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운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경신술을 전개해 한 줄기 봄바람처럼 그곳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감숙 분타주 기소웅이었다.
청운이 도착하자 기소웅은 크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청운도 가볍게 예를 갖추며 응대하자 기소웅이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네 청운에게 건네며 말을 했다.
“부문주님. 무림맹에서 드디어 전 강호에 무림첩을 띄웠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