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현실은 없고 꿈만 있는 별화 같았다.
꼬박 칠 일간 촌장의 치료를 받고 청운은 왕씨 마을을 떠났다.
치료는 하루에 두 번 행해졌다.
음기가 가장 강한 자시子時에는 주로 뜸을 뜨고, 양기가 자장 강한 미시未時에는 침을 맞았다.
인체의 모든 혈맥과 경락에 뜸과 침을 번갈아 놓았다.
청운은 촌장이 전신 요혈에 침을 놓을 때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서 고르게 숨을 쉬었다.
육 일째까지는 아무 느낌이 없다가 칠 일째 마지막 침을 맞고 나자 몸이 예전처럼 가벼워진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청운은 촌장에게 너무 큰 은혜를 입었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촌장은 은혜라면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입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몸이 다시 이상하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청운이 왕씨 마을을 떠나던 날 아침 촌장은 마을 입구까지 따라 나와서 보따리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 속에는 약간의 건량과 약초로 담근 술 세 병이 들어 있었다.
청운이 촌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막 말에 올라탔을 때 촌장이 말했다.
자신이 뜸과 침으로 폐맥을 뚫을 수 있도록 작은 길을 내놨으니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상단전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 *
가을이 깊어질수록 하늘이 점점 더 땅에서 멀어져 높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하얀 솜뭉치 같은 권운卷雲을 배경으로 기러기 무리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창공을 헤엄치는 것 같은 부드러운 기러기들의 날갯짓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시원의 꿈같았다.
이따금 까마득한 창공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기러기 떼의 낭랑한 울음이 작은 이권 때문에 아귀다툼을 벌이는 인간 세상을 때리는 죽비 같았다.
청운은 잠시 말머리를 멈추어 세우고는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천산을 떠나 남으로 가는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이 내뱉은 ‘천산’이라는 말에 스스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삼 년이 훌쩍 지났다.
그녀와 헤어질 때 어떤 일이 있어도 삼 년마다 설산의 유라궁에서 백일을 머물겠다고 철석같이 그녀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면서 청운은 갑자기 기억해 냈다.
청운은 말 머리의 방향을 그녀와 그녀의 딸이 기다리고 있는 설산 쪽으로 틀었다.
보고 싶었다.
그녀도 보고 싶었고, 자신의 딸이 누구를 닮았고 얼마나 컸는지도 보고 싶었다.
이참에 그녀와 딸을 질리도록 실컷 봐두어야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말에 박차를 가할 때마다 청운의 눈앞에 설산의 눈꽃이 풀풀 날리는 것 같았다.
하얀 눈을 생각하자 청운은 천 리도 더 먼 곳에 있는 설산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촌각이라도 더 빨리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청운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엿새 만에 천산 근처에 도착한 청운은 중원으로 돌아갈 때 다시 타고 갈 요량으로 마방에 말을 맡기고는 저잣거리에서 술과 건량을 준비해 곧바로 천산을 넘었다.
천산을 넘는 데만 꼬박 사흘이 더 걸렸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쉬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드디어 하냔 설산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설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똑같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설산은 마치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낮밤 없이 하얀 꿈만 꾸는 세상 같았다.
설산은 사시사철 늘 겨울이어서 여러 다른 계절 속에 존재하는 그런 겨울은 없었다.
이곳에서는 겨울이 유일한 계절이었다.
봄도 겨울이고, 여름도 겨울이고, 가을도 겨울이고, 겨울도 또 겨울이었다.
일 년 내내, 아니 천년만년 흰색뿐인 설산의 풍경은 현실은 없고 꿈만 있는 별 같았다.
그 하얀 꿈속의 꿈같은 유라궁은 하얀 꿈을 꾸는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다른 세상의 성城 같았다.
청운은 하얀빛을 받아 더 하얗게 반짝이는 유라궁을 바라보며 삼 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 기억들이 하얀빛 속에서 눈부신 눈꽃처럼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은 그 꿈같은 기억을 더 오래 더 오롯이 음미하고 즐기기 위해 유라궁을 향해 최대한 느릿느릿 걸어갔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유라궁이 너무 빨리 가까워졌다.
어느새 유라궁과 이어진 출렁다리가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다리 아래 까마득한 계곡으로 눈덩이가 투-둑-투-툭 떨어져 내렸다.
청운이 막 출렁다리를 건너기 위해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얼음처럼 냉랭하고도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청운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 싸늘한 목소리는 마치 얼어붙은 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냉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당장 멈춰라! 그 다리에 발을 걸치는 순간 당신은 죽은 목숨이다. 즉시 뒤돌아서 이곳을 나가라. 이곳은 금남의 구역이다. 당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그 자체가 죽을죄다. 당장 꺼져라!”
청운이 눈이 수북이 쌓인 죽립을 벗어 털면서 말했다.
“나는 외인이 아니오. 소궁주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 주시오.”
“어머! 부마님이시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안에다 대고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대리석 대문을 활짝 열렸다.
그 문을 통해 나온 사람은 바로 빙아였다.
삼 년 전에는 앳된 소녀 같았는데 이제 어엿한 아가씨였다.
청운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빙아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부마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그새 더 당당하고 늠름해지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안에다 소식을 전했으니 곧 소궁주님이 나오실 겁니다. 자, 어서 들어가시지요.”
빙아의 안내를 받으며 청운이 궁으로 몇 발짝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라유리와 아이였다.
둘 다 설표의 모피로 만든 것 같은 하얀 털옷을 입고 있었다.
청운은 날마다 꿈에서 본 광경을 현실에서 보는 것 같았다.
청운이 “리매”라고 부르자 그녀가 달려왔다.
“가가”라고 소리치며 곧바로 청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울었다.
잠시 후 청운의 품을 벗어난 그녀가 이번에는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조금 전 눈물을 글썽이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듯 생글거렸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사람처럼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이상하고 무서웠는지, 엄마의 치맛자락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붙잡은 채 엄마 뒤에 꼭꼭 숨어서 이따금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사라유리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연연아!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아빠다. 아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야지.”
연연이가 인사 대신 엄마 품을 파고들며 울먹이자 사라유리가 아이를 청운의 품에 덥석 안겨주며 말했다.
“아이가 태어나 줄곧 궁 안에서만 살았으니 외부인을 본 적이 없지요. 그래서 낯을 좀 가리는 것 같네요. 하지만 붙임성이 좋으니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가가!”
청운이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눈, 코, 입은 물론 머리 색깔까지 전부 엄마였다.
눈을 씻고 봐도 아이 얼굴 어디에도 자신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청운은 한편으로는 조금 섭섭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섭섭한 이유는 물론 자신을 하나도 닮지 않아서이고 다행인 이유는 엄마를 쏙 빼닮아 너무나 예쁘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아이가 자신을 닮아 예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아이를 보자마자 청운은 안심했다.
청운이 아이를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녀는 지난날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지 눈은 그를 바라보면서도 생각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눈빛이 아득하게 멀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때의 옛일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무안함을 느꼈다.
얼핏 보니 그녀의 눈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청운은 자신도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궁 안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다.
“이 사람아! 먼 길을 왔으면 어서 안으로 들어올 일이지 예서 뭐 하는가. 회포는 안에서 풀어도 되는 것을…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궁주였다.
청원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별래 무양하셨는지요. 옛날보다 훨씬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궁주 사라진하가 흰 눈송이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청운의 말을 받았다.
“이게 다 자네 때문 아니겠는가. 아프지 않으니 정말 사는 맛이 나네.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 참인가? 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뭘 하고 있는가?”
청운이 궁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궁주 뒤에 서 있던 궁도들이 일제히 청운에게 인사를 했다.
청운도 일일이 답례를 했다.
청운과 사라유리는 궁주를 따라 곧장 궁주의 내실로 갔다.
궁주가 청운에게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그때도 자네의 기도가 대단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른 것 같네.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인 것 같네. 그새 자네에게 또 어떤 기연이 있었는가?”
청운이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하자 궁주와 사라유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용성과의 대결과 삼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둘의 표정은 마치 아닌 밤중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청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궁주는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쯤에 사라유리의 아버지인 귀수하백도 다녀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청운의 이야기를 하면서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궁주는 청운에게 힘든 일이 닥치면 귀수하백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도와주겠다는 말을 청운에게 꼭 전해달라는 말도 했다.
청운은 자리를 옮겨 궁도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만찬을 즐기고는 곧바로 아이를 안고서 사라유리의 방으로 왔다.
아이는 그새 청운에게 익숙해졌는지 청운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장거리는 딸의 재롱을 보고 있자니 모든 순간이 다 감전된 듯 짜릿짜릿하고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까웠다.
‘아-바, 아-바’하는 모자라는 발음으로 자신을 부르며 품에 안기는 아이는 천사 중의 천사 같았다.
아이의 그 어눌하고 어색한 발음이 오히려 청운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더 철철 흘러넘치게 하는 말 이상의 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