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악귀도 그런 악귀가 없습니다.
왕씨 일족은 태항산太行山 초입에 있다고 담 가주가 말했다.
담우린이 따라나서는 걸 청운은 극구 사양하고 혼자서 왔다.
청운이 혼자 가겠다고 고집하자 담 가주는 튼튼한 말 한 필과 피풍의 그리고 왕씨 일가의 촌장 앞으로 서찰 하나를 써주었다.
바람에 날리는 황토 먼지를 막기 위에 둘러쓴 피풍의 위에 또 붉은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았다.
청운은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어 세우고는 피풍의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냈다.
벌써 대여섯 번은 족히 먼지를 털어냈던 것 같다.
먼지를 털어내고 채 십여 리도 가지 않아서 먼지는 다시 수북이 쌓이곤 했다.
그래도 자신은 다행히 피풍의라도 걸치고 있어서 괜찮았으나 아무 죄 없는 말이 자신까지 태우고 가느라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청운은 마음이 아렸다.
서너 번 더 피풍의의 먼지를 더 털어냈을까… 멀리 태항산 줄기가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다급한 마음에 말이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박차를 가했다.
채 십여 리를 가지 않아 청운은 태항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 부근은 다른 곳과 다르게 제법 수목도 자라고 있었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었다.
백여 장 떨어진 계곡에서 물을 깃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청운은 말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갔다.
여인은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마의를 입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청운은 그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청운을 본 여인이 물통을 내팽개치고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청운이 신법을 전개해 그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여인이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리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말했다.
“대인, 저에게는 늙으신 부모님과 아이가 셋이나 있습니다. 제가 대인을 따라가면 제 부모님과 아이들은 굶어 죽습니다.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청운은 너무나 어이없고 황당해서 할 말을 잊었다.
잠시 후, 청운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부인. 어서 일어나세요. 이게 대체 무슨 경웁니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단지 길을 묻고자 할 뿐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조심스레 든 여인이 청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여인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이곳은 외지인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인데 누구를 찾는지요.”
청운이 왕씨 일족이 있는 마을을 찾는다고 하자 그 여인이 한 손으로 절벽이 있는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절벽이 보이지요. 저 절벽을 끼고돌면 바로 왕씨 마을이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운이 잠시 그 여인을 막아섰다.
그러자 여인이 더 벌벌 떨면서 안절부절했다.
뭔가 이상해도 많이 이상했다.
이 여인의 표정에는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칙칙하고 무력한 분노와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오랫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것에 주눅이 든 사람 같았다.
그 여인은 한순간이라도 빨리 지금의 두려움을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한 것 같았다.
청운이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인, 왜 저를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여인은 한동안 청운을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물을 길은 물통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부리나케 도망가듯이 가버렸다.
청운은 여인을 다시 막아서서 무슨 일인지 다시 물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자신이 다시 물어본다고 그 여인이 솔직히 대답해 줄 것 같지 않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말머리를 돌려 그 여인이 가르쳐준 마을로 향했다.
그 여인의 말대로 절벽을 끼고돌자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약 오십여 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집들이 황토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더러는 황토절벽의 동혈洞穴 속에서도 사는 것 같았다.
청운은 마을 입구 노송에 말을 매어 놓고 마을로 올라갔다.
마을 입구에서 마주친 아이에게 촌장 집을 물었다.
아이가 손으로 동혈 한 곳을 가리켰다.
청운은 곧장 촌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촌장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육십 대 중반 정도로 몸집이 자그마하고 말랐다.
눈빛은 날카로웠다.
청운이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노인이 당장 나가라고 했다.
면전박대였다.
촌장이 청운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공자, 이 마을에는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잘못 찾아오셨소. 먼 길을 오신 것 같은데 저기 물로 목이나 축이고 되돌아가시구려.”
축객령이었다.
청운은 가슴이 답답했다.
한 가닥 희망으로 불원천리 먼 길을 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리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말을 매어 놓은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던 청운이 다시 몸을 돌리고는 노인을 불렀다.
청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 가주가 써준 서찰을 품속에서 꺼내 촌장에게 건넸다.
촌장이 서찰을 읽고 나더니 청운에게 동혈로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공자, 담 가주를 어떻게 아시오.”
청운은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았다는 생각에 조금 거짓말을 했다.
“가까운 친척이 됩니다.”
촌장이 한동안 청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 차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공자, 저희 마을이 왕숙화王菽和의 맥脈이 맞기는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의학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괜한 헛걸음하셨습니다.”
청운이 너무도 의아해 그 연유를 물었다.
촌장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저희 왕씨 가문의 칠 대조이신 왕하연 선조先祖 때의 일 때문이지요. 한 이백 년 전 사건 때문입니다. 그때 이 나라에 커다란 반란 사건이 있었지요. 당시 우리 왕씨 일가는 산서에 살고 있었습니다.”
“…….”
“반란의 수괴는 마천려라는 선비족이었는데, 그의 군대가 낙양으로 향하다 어느 날 우리가 살던 마을 근처에 주둔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마천려가 심한 토사광란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촌장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군인들 몇이 마을로 들이닥쳐 다짜고짜 왕하연 선조님을 군막으로 끌고 갔습니다. 선조님의 치료를 받고 불과 이틀 만에 몸을 추스른 마천려가 다시 낙양으로 진군했습니다. 난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관에서 왕하연 선조님을 끌고 갔습니다. 난의 수괴를 도왔다는 역적 혐의였습니다.”
촌장이 이번에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날 밤, 왕하연 선조의 목이 산서성 성문에 걸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하연 선조님께서 의술로 베푸신 은덕이 많아 삼족을 멸하는 중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왕씨가 이렇게 대를 이어가고 있지요.”
“…….”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산서 땅에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엄중한 관의 감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우리 왕씨 일가를 역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더 무서웠지요.”
“그래서 어느 날, 우리 혈족은 산서를 떠나 이곳으로 왔습니다.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 터를 잡았지요. 그리고 혹시라도 신분이 노출될까 싶어 의술과 관련된 일을 완전히 끊고 이곳의 황토로 항아리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청운은 왕씨 혈족의 비극적 비사秘事에 가슴이 아렸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청운은 자신의 치료에 관한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청운은 마을에 오기 전 만난 여인에 대해 촌장에게 말했다.
“제가 이 마을에 들어올 때 그런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습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 같이 시체처럼 무표정하고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요. 촌장님, 솔직히 말씀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왜 마을에는 여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지요.”
한동안 청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촌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공자, 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니 내가 방을 하나 내어주겠소. 거기서 푹 쉬고 내일 아침 떠나시오. 그게 공자의 신상에 좋을 것이오.”
그래도 청운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묻자 촌장은 몇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촌장은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며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청운의 다짐을 몇 차례나 받고서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한 오륙 년 되었지요. 이 마을에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어느 날 장원이 하나 들어섰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그 장원에 사는 악귀들이 이 주변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금품을 빼앗아 가는 것은 물론 부녀자들까지 납치해 갔습니다.”
촌장은 청운의 분위기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곳 주변의 부녀자들은 절대로 낮에는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집집마다 파 놓은 비밀 공간에 꼭꼭 숨어서 생활합니다. 밖에 돌아다니다가는 언제 그 악귀 같은 놈들에게 붙잡혀 끌려갈지 모르니까요. 지옥이 따로 없지요.”
청운이 치솟아 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캐물었다.
“관에서는 도대체 뭐 하고 있습니까. 그런 자들을 토벌하지 않고.”
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관에서는 이곳 황토고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땅이 척박해 곡식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세수가 변변찮습니다. 그래서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나라도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있는 곳이나 관심을 두지, 이곳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악귀들의 이목을 피해 관에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 삼여 년 전인가 다른 마을 촌장 한 분이 그 악귀들의 만행을 견디지 못해 몰래 산길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 청해성 관아에 고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귀들을 토벌할 관원은 오지 않았습니다.”
“…….”
“대신 그 악귀들과 수하들이 그 마을에 들이닥쳐 아예 마을 사람 모두를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지요.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관에 고발할 엄두를 못 냅니다. 무슨 일인지 고발을 해도 오라는 관원은 오지 않고 그 악귀들의 무서운 보복만이 뒤따르니까요.”
청운은 분노가 너무 치밀어 이빨까지 떨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시 캐물었다.
“그 악귀들은 누굽니까? 그 장원에 모두 몇 놈이나 있습니까? 그 장원의 위치는 정확히 어딥니까?”
촌장이 연신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계속 청운이 캐묻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여기서 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죽은 척 하룻밤 자고 왔던 곳으로 조용히 되돌아가시오. 그리고 돌아가서도 이곳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그래도 청운이 고집을 접지 않고 버티자 노인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