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43화 (143/184)

143화 희미한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점멸하고 있었다.

“내 아들 모용후가 비록 너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으나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목숨만은 살려다오. 마지막 부탁이다. 너와 모용세가와의 악연은 나의 죽음으로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그럼 내 약속을 들어줄 것이라 믿고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마. 환척은 상제의 비고에 있다.”

청운이 급하게 되물었다.

“상제는 누구요.”

그 순간 황금면객은 빙그르르 몸이 돌아가더니 얼굴부터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빠진 자리에서 석양보다 더 붉은색의 물빛이 노을빛을 삼키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애도하듯 그의 황금면갑에 드리운 희미한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점멸하고 있었다.

수면에 내려선 청운은 갑자기 연못이 자신을 덮치며 집어삼키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청운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 소중했어야 할 추억의 장소를 더럽힌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수면에 쓰러지고 말았다.

* * *

하늘에 무슨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무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니, 빛처럼 찬란한 죽음의 칼날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무지 피할 곳이 없었다.

자신이 도망가는 곳마다 그 죽음의 빛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따라왔다.

피할 수 없었기에 막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성운과 성좌는 멀어도 너무 멀리 있었다.

자신이 성운과 성좌에 닿기도 전에 빛이 자신의 전신을 관통할 것 같았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빛이라면, 그 빛이 그냥 자신을 통과할 수 있게 자신을 모두 비워야겠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도망만 다니던 자신의 신형을 돌려 빛 앞에 멈춰 세웠다.

수천 수백 가닥의 빛이 자신의 텅 빈 몸을 통과하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은 무수한 빛이 터져 나오는 줄기를 보았다.

곧바로 청운은 무영검으로 그 빛의 근원인 빛의 줄기를 베어 버렸다.

자신을 몰아대던 모든 빛이 사라지자 멀찍이 떨어진 채 빈 하늘을 돌던 성좌와 성운이 청운의 근처로 되돌아왔다.

청운은 곧바로 성운에 올라타고는 빛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몸을 눕혔다.

눕자마자 청운은 깊디깊은 노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꿀맛 같은 고단한 잠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잤을까… 성운 옆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청운은 눈을 번쩍 떴다.

그때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협, 이제야 깨어나시는구려.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소이까.”

아는 얼굴 같기도 했고 모르는 얼굴 같기도 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무당 장문인 현진자였다.

청운은 일어나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꾸짖어도 몸이 제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몸속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때 다시 현진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협, 그대로 누워 계시구려.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요. 일어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시지요. 소협”

“아직은 일어나실 때가 아닙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그냥 마음 놓고 푹 쉬시지요.”

“…….”

“…….”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청운이 누운 채 눈을 돌려 바라보니 자신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천리신개도 있었고, 혼원벽력도도 있었고, 검후와 진소소도 있었고, 적송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모르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때 현진자가 다시 말했다.

“소협께서 아무래도 좀더 정양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궁금한 일이 있더라도 그때 물어보기로 하고, 소협이 편히 쉬도록 우리는 이만 물러납시다. 여기 머리맡에 죽을 놔두었으니 정신이 들면 좀 들게. 그래야 속을 다스리지.”

현진자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나 더 잤을까… 청운은 뭔가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깼다.

밤이었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의 모든 사물이 시커먼 밤과 폭우에 뒤섞여 한 덩어리의 깜깜한 어둠이 되어 있었다.

청운은 가만히 일어나 앉으며, 운기를 해보았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일순간 너무 많은 힘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바람에 탈진해서 쓰러진 것 같았다.

황금면객, 아니 모용성의 빛의 검이 워낙 강렬해서 그 빛에 대항하느라 치우의 힘과 전륜의 힘을 동시에 모두 쏟아부었다.

자신이 탈진한 것은 치우의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전륜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올리는 바람에 한순간 발생한 불균형 때문인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도 반드시 남겨두어야 할 힘이 있다.

그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잠력이다.

하지만 청운은 그 순간은 워낙 다급해 어쩔 수 없이 체내에 있던 모든 잠력을 바닥까지 끌어쓰고 말았다.

문제는 불완전한 전륜공 때문인 것 같았다.

하단전의 정精과 중단전의 기氣가 너무 급한 나머지 아직 확실하게 열지 못한 상단전의 신神을 무리하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극심한 탈진이 생긴 것 같았다.

청운은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모용성과의 대결을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깨달음이 그의 깨달음을 간발의 차이로 앞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빛의 진정한 힘을 조금만 더 많이 깨달았다면 아마 연못에 먼저 빠진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 되었을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모든 것이 안타깝고 안타까웠다.

그의 처참한 죽음 뿐 아니라 그의 터무니없이 무지한 야망과 탐욕과 욕망도 안타까웠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헛된 욕망으로 자신의 꿈을 속여 왔던 그릇된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죽음보다 청운은 그것이 더 가슴 아팠다.

가진 것을 버릴수록 세상을 더 많이 품을 수 있는 무위의 삶을 그는 죽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와 나의 차이는 딱 그거였다.

군림천하라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중독되어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다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모용성의 삶도 안타까웠지만 청운은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가슴 떨리던 그 소중한 추억이 깃든 장소가 피로 얼룩진 것이 가슴이 아렸다.

그 소중한 기억이 잘못된 피로 오염된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죽은 이를 더 이상 어떻게 못마땅해 하겠는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수면으로 추락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용성의 핼쑥한 눈빛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죄의식과 후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비록 그의 그릇된 탐욕과 야망이 그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갔지만 한 인간의 삶이 그런 식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연민과 동정 같은 것이었다.

퍼붓는 밤비가 그런 우울한 상념에 처량함까지 덧보태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은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꼭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순수한 본능, 즉 일종의 조건 반사 같은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모용성이 수면에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환척’에 대한 말도 떠올렸다.

나라를 처음 열던 당시에는 ‘환척’이 물자의 가치를 재고 상업을 일으키는 잣대가 되는 보물일지는 몰라도 이미 시대가 변하고 물산의 종류와 가치가 바뀌어버린 지금 이 시대에 ‘환척’은 거의 의미가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 전설이 가진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 힘을 매개로 사해표국과 대륙표국 그리고 중원표국이 결탁해 이 나라의 모든 상권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만 봐도 그 상징성은 아직 힘이 있다.

그래서 고래로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정벌하면 정복자들은 정복한 나라의 상징성부터 파괴하기 일쑤였다.

정복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상징물 자체가 정복당한 나라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구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가 깃든 상징물은 그 지역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한다.

역사를 보면 정복당한 나라의 사람들이 결집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것을 제어하기 위해서 정복자들은 철저히 그렇게 해왔다.

마치 무슨 성스러운 제의처럼…….

그것은 종교와 사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이 한 지역의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종교나 사상은 그 지역에서 한때 번성했던 기존의 종교나 사상이 만든 상징물과 동상을 터무니없는 미신이 만든 우상으로 몰아 철저히 파괴한다.

그래서 청운은 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쓸데없는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환척’을 회수해 부수어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청운은 무당산에 퍼붓는 밤비를 보면서 이런 일을 앞으로도 수없이 겪어야만 모든 일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청운은 지금 자신의 생각이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몽상일 뿐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의 생각을 접고 우선 탈진한 몸부터 회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부터 청운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밤새도록 운기를 했다.

대주천과 소주천을 거듭하는 사이 점차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자 부드럽게 달빛을 반사하는 밤의 구름 아래서 산의 호위 같은 나무들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희미한 박명이 향로봉을 비추자 청운은 세상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청운은 그 희미한 새벽이 마치 자신의 행운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밤새도록 대주천과 소주천을 운기해 고갈된 내력을 어느 정도 보충하고, 속을 달래기 위해 머리맡에 있는 죽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 청운은 방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무당 장문인 현진자의 목소리였다.

청운이 방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천리신개도 있었다.

청운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두 분 장문인님, 어서 오시지요.”

현진자와 천리신개가 먼저 방에 들어가고 청운이 뒤따라 들어갔다.

청운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현진자가 말했다.

“그래, 몸은 좀 어떠신가. 이렇게 거동하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만…….”

청운이 공손하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장문인님의 배려 덕분에 이제 몸을 움직이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장문인님 덕분입니다. 보살핌에 감사를 드립니다.”

현진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뭘 한 게 있어야지. 나야 소협에게 무당에서 남아도는 방 한 칸 내어준 것 말고는 한 것이 없네. 어쨌든 이렇게 빨리 회복한 건 참으로 다행이네.”

현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리심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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