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42화 (142/184)

142화 빛의 꽃에서 언뜻 빛의 줄기를 본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한 건 그럴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강호에서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오직 힘뿐이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이다. 힘 있는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지고 모두를 지배하는 것이 강호의 오래된 법칙이다.”

“…….”

“오직 힘만이 진실이고 정의다. 그리고 내 아들이 너를 죽이려고 한 것은 네놈이 사사건건 우리의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모용후 그 못난 놈이 그날 너를 어설프게 처리하는 바람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구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속에서 천불이 난다.”

청운이 그의 말을 곧장 맞받아쳤다.

“악인일수록 지옥으로 가는 길을 그럴듯한 명분과 선의로 포장하기 마련이지요. 당신은 뭔가를 잘못 알아도 한참을 잘못 알고 있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도 진정한 힘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임을 왜 모르시오.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진짜 힘이오.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소.”

청운은 모용가주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그 실존적 불안이 만든 결핍이 삶의 공허이고, 그 공허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지요. 그 공허를 잘 승화시킨 사람은 현인과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 그 공허를 잘못된 욕망으로 채우려 한다면 악귀와 악령이 배태되는 걸 왜 모르시오.”

“…….”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남 위에 군림하지 못해 그렇게 안달하시오. 진정한 군림천하君臨天下는 힘으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타인의 존중과 숭배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 단순한 사실을 왜 모릅니까. 참으로 안타깝구료. 모용가주.”

눈빛에 더욱 짙은 살기를 띠며 황금면객이 말했다.

“네놈이 요즘 강호에서 명성을 좀 얻었다고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놈의 눈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네 눈 아래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감히 나를 가르치려 하다니. 과연 너에게 그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누구에게나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이 자기 속에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지. 어느 순간 나는 내 욕망을 정확히 깨달았을 뿐이다. 너는 아직 어려서 네 욕망을 정확히 모를 뿐이지.”

청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그의 말을 되받았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진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악인이지요. 결국 그런 생각이 타인의 삶에 피해를 주기도 하니까요. 그게 바로 무식이기도 하지요. 혼자서 모르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그 지나친 무지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지경에 이르면 그것 또한 악이지요.”

“감히, 나를 무지하고 욕보이는가……!!”

“열망을 품는 건 자유지만 그 열망이 타인의 삶을 다치게 하거나 해하면 절대 안 되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기 마련이지요.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볼 때는 일방적, 독단적인 경우가 많기 마련이지요.”

“…….”

“세상에는 얻으려고 애쓸수록 더 멀어지는 것이 있고 버리려고 할수록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있지요. 전자가 권력과 황금이라면 후자는 세상의 인정과 신망이겠지요. 세상에서 얻으면서 동시에 잃을 수 있는 것은 없지요. 둘 다를 동시에 가지려면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청운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모용가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어떤 명분과 정당성으로 금칠을 하더라도 군림천하는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 없는 타인의 피를 요구하니까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손에서 가장 멀리 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애지중지 지키려 할수록 속절없이 부서지는 것들이 있고 무심하게 방치해도 저절로 강한 생명력으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도 있지요.”

청운은 주먹을 말아 쥐기 시작하며 말했다.

“전자가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억압과 강제라면 후자는 약자가 강자에게 행하는 저항과 투쟁이지요. 어둠 속에서 나쁜 짓을 하는 자들보다 명분과 당위성으로 분칠을 하고 저지르는 음흉한 일들이 세상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법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 반드시 당신을 이 세상에서 지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때로는 작은 피가 큰 피가 흐르지 못하게 막아 주기도 하니까요.”

“너와 나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다르구나. 네놈의 생각이 그런데 너와 나 둘 사이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강호의 법칙인 힘으로 누구의 삶이 더 옳은지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구나. 자, 시작하자 꾸나. 아이야, 나는 다른 일도 무척 바쁘단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검을 뽑았다.

그의 검에서는 빛의 꽃이 만개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던 노을 지는 허공에 수백 수천 줄기 빛이 화사하게 나타났다.

그의 검은 빛의 광채이자 빛의 광휘였다.

그의 검이 뽑히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한순간 정지된 채 빛을 잃는 것 같았다.

청운도 무영검을 빼 들었다.

무영검이 우―웅 하며 주인의 의도를 짐작한 듯 청아한 검명을 토했다.

청운이 내력을 주입하자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삼 장 가까이나 뻗어 나왔다.

청운은 그가 자신보다 강호의 경험이 더 많으니 더 많은 한계를 극복했을 것이고, 또한 많은 생사결이 있었으니 더 많은 사선을 넘었을 것이고,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도 더 많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달음의 문제는 다르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세상에는 눈에 빤히 보이고 손에 확실히 만져지기에 오히려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깨달음이 바로 그런 것이다.

깨달음은 횟수와 경륜의 문제가 아니라 크기와 깊이의 문제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한순간 그의 검에서 쏟아진 무수한 빛의 살기가 시공간을 잘게 잘게 썰며 청운의 전신요혈을 저밀 듯 무섭게 압박 해왔다.

그 순간 청운과 황금면객 사이를 메우고 있던 시공간이 무수한 빛줄기에 의해 종잇장처럼 잘게 썰어지며 산란하는 것 같았다.

그의 검에서 발출된 빛의 미세한 가속과 지연이 종잡을 수 없는 검로를 만들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어짐과 멈춤이 공간 자체를 규칙 없이 뒤틀어버렸다.

그 순간 청운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시공간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버린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시공간 속에서 청운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와 힘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무력감을 맛보았다.

그의 검에서 자라난 빛이 마치 원래의 시공간을 없앤 자리에 새로운 시공간을 다시 만드는 것 같았다.

그 찬란한 빛은 나뉘었다 다시 합쳐졌다 다시 나눠지며 예측 불허의 검로를 형성하며 청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의 검로는 한순간 번개 같은 직선이었다가 순식간에 가파른 곡선을 그리기도 했고 직선과 곡선이 두서없이 합쳐지기도 했다.

방향과 궤적을 종잡을 수 없는 빛의 산란이었다.

최초 한 가닥으로 시작한 그의 검기가 어느 순간 거미줄처럼 확대되며 청운이 서 있던 시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차단해 버렸다.

그의 검로에는 일반적인 검이 가지는 비정하고 사나운 격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만 모든 것을 눈멀게 하는 죽음의 광휘가 가득했다.

아! 그것은 환각처럼 황홀했다.

그의 검에서 뻗어 나온 빛의 광휘는 뱀의 눈빛이 개구리를 그렇게 하듯 상대를 홀린 채 죽이는 환각 같았다.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청운의 혈맥이 길을 잃고 뒤엉키기 시작했다.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청운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위기를 느낄수록 청운은 자신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미 길을 잃어버린 미로에서 더 많은 길을 잃어버리는 느낌으로 청운은 자신의 전신에서 ‘무위’가 가득 차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청운의 본원진기가 스스로 생명을 자각한 존재처럼 황금면객의 찬란한 빛무리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과 황금면객은 공격과 방어로 서로 얽혀들기 시작했다.

검기와 검기가 종횡무진 얽히고 설키는 환상 같은 장면이 수면 위에 펼쳐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초식도 순서도 방향도 질서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생각도 의도도 결심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빛과 혼돈 혹은 빛과 시원만이 가득했다.

어느 순간은 두 개의 다른 점이, 또 어떤 순간에는 두 개의 다른 직선이, 또 다른 순간에는 두 개의 다른 곡선이 하나의 접점에서 교차하기도 했다가 반대 방향으로 갈라서기도 했다.

교차하고 갈라설 때마다 둘은 서로의 중심을 베고 또 벴다.

그때마다 무수한 빛의 폭발이 있었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폭발과 폭음은 서로의 가공할 검기에 의해 압축되었던 시공간의 폭발이었고 대기의 폭발이었다.

그 소리가 향로봉까지 울렸는지 무수한 사람들이 마치 먹이를 본 새처럼 향로봉에서 연못으로 날아 내려오고 있었다.

청운과 황금면객에게는 땅과 하늘 심지어 억새와 수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땅에서 둘이 싸울 때는 땅이 그들을 받쳐주는 발판 되었고, 하늘에서 둘이 얽힐 때는 허공이 계단이 되었고, 수면에서 설킬 때는 수면이 그들의 신발이 되었다.

둘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검기의 점과 선이 오갔을까.

어느새 연못 주변에는 수백여 명의 군웅들이 모여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군웅 속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황금면객과 무위검이다.”

또 다른 누군가가 감탄을 넘어 경외에 가까운 경탄을 발했다.

“저게 과연 인간의 무공이 맞기는 맞는가!”

살 대신 뼈만 보여 주는 승부는 앞도 없고 뒤도 없었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생과 사가 주는 처절함과 비장함밖에 없었다.

둘 다 모두에게 똑같이.

청운은 싸우는 순간에도 계속 자신을 비워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버린 곳에 자연이 전하는 말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던 한순간 청운은 황금면객의 검에서 피어나는 빛의 꽃에서 언뜻 빛의 줄기를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청운은 자신의 양쪽 팔목에서 잠들어 있던 치우환이 깨어나 무당산과 공진하는 걸 느꼈다.

착각이었을까…….

착각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청운은 그 느낌 그대로 무영검으로 빛의 줄기를 잘라갔다.

바로 그 순간 청운과 황금면객이 수면 위 수십여 장 높이에서 빛과 빛으로 교차했다.

청운은 지신의 무영검이 쏜살같았다가 멈추는 것 같았고 광풍 같았다가 잔잔한 것 같았고 번갯불 같았다가 아지랑이 같았다고 느꼈다.

그들이 교차할 때 두 개의 물기둥도 용오름처럼 두 사람을 따라 올라가 허공에서 부딪치고는 산산이 부서져 붉은 노을과 함께 수면에 다시 떨어졌다

아! 추락하는 그 붉은 노을 속에서 황금면객이 먼저 수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간발의 차로 청운도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황금면객은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고 처운은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하늘로 얼굴을 향한 채 마치 바위처럼 떨어지던 황금면객이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며 떨어지는 청운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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