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두어야지요.
그리 깊은 동굴은 아니었으나 일 장 정도 뒤로 움푹 파여 있어서 앉아서 운기나 명상을 하기에 딱 좋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동굴 주변의 벽면은 마치 누군가 켜켜이 잘라서 차곡차곡 쌓아 덧댄 것처럼 깔끔했다.
전면을 바라보니 물줄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시끄러웠으나,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소리에 점차 익숙해지며 심신이 편안해졌다.
나중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여러 명의 대가들이 호흡을 맞추어 연주하는 음률의 화음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우선 내상 치료가 먼저라고 생각한 청운은 곧바로 운기토납運氣吐納에 몰입했다.
열흘 정도를 내상 치료에 몰두하자 혈령비진을 상대하다 다친 내상은 거의 회복이 되었다.
내상을 다 치료한 청운은 다음 날부터 아직 완전히 타통하지 못한 세맥을 뚫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청운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 때쯤 청운의 머리끝에서 투명한 자황색의 환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청운의 지금 경지는 무림인들라면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는 삼화취정三化聚頂, 오기조원五气朝元을 넘어서는 거의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조금 못 미치는 경지였다.
하단전에 정精과 중단전의 기氣는 확실히 모을 수 있었으니 상단전의 신神은 아직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태어나는 순간 폐쇄된 세맥을 완벽히 뚫지 못하고는 상단전을 열 수 없을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런 방법으로는 잘 안 될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상단전을 열고 신神을 모아 전륜轉輪의 빛을 얻으려면 뭔가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잠시 제갈신의가 준 별의 힘이 담긴 침을 생각했으나 제갈신의가 그 침을 자신에게 건네줄 때의 표정을 생각하고는 청운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청운이 운기토납을 멈추고 눈을 번쩍 뜨자 청운의 머리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 빙빙 돌던 투명한 자황색의 환들이 일순간에 청운의 콧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청운이 동굴을 나와 생각에 잠긴 채 장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바로 하오문 형주 분타주 양춘호였다.
청운 앞에서 급하게 숨을 몇 차례 몰아쉰 양춘호가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고는 말했다.
“부분주님을 뵙습니다.”
청운도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양 분타주의 말을 받았다.
“양 분타주님, 어서 오십시오. 저에게 무슨 다급한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양 분타주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부문주님, 황금면객이 무당의 적송자에게 비무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 일로 인해 강호의 여론이 크게 술렁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청운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청운이 긴장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양춘호에게 물었다.
“그 날짜가 언젭니까.”
양춘호가 곧장 답했다.
“칠 일 후 신시申時 무렵 향로봉 아래입니다.”
청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자 양춘호가 물었다.
“부문주님, 가실 겁니까.”
청운이 굳은 표정으로 곧장 대답했다.
“당연히 가봐야지요.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두어야지요. 그것이 순리이지요.”
* * *
그때부터 청운은 황금면객에 대한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서 틀림없이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하루가 가지 않은 것 같았고 새벽에 일어나면 새벽이 미루어진 것 같았고 저녁이 와도 밤이 지체하는 것 같았다.
무당까지는 반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다.
당일 아침에 출발해도 신시까지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몇 날 며칠 황금면객을 생각하면서 하릴없이 무영검을 닦고 또 닦았다.
당일 아침 청운은 아침 일찍 무당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황금면객이 무당산에 오르기 전에 그를 제지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예상보다 일찍 온다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빈틈없이 철저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관도에 말똥 냄새가 풍기던 늦여름이 시나브로 끝나가고 있었다.
한여름 펄펄 끓던 태양도 계절의 힘에 밀려 점차로 식어가고 있었다.
관도를 따라 불어오는 서풍에 시들어 스적스적 바스라지는 풀잎들의 소리가 가을의 중심을 점차로 차가운 겨울로 밀고 있었다.
여름의 시체 같은 갈색의 가랑잎들이 함부로 쌓인 길섶에는 한해살이풀들이 일제히 무릎을 꺽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 스산한 풍경이 곧 다가올 동장군 앞에 부복한 병졸들 같았다.
청운은 작고 사소한 것에도 괜히 기분이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청운의 눈에 그녀와 함께 자신의 청춘 전체가 바람에 이는 억새처럼 흔들렸던 그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연못가의 억새들은 그날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의 결을 따라 일제히 자기가 살아온 삶 전체를 세차게 흔들며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삶이란 원래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라는 듯이…….
청운은 그 연못을 바라볼수록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상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녀와 있었던 그때 그 일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연못을 마치 성스러운 장소로 만드는 것 같았다.
가을 황혼이 잘 익은 황주 같이 불그스름했다.
이미 신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그자가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틀림없이, 예감이 강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연못에 비친 붉은 황혼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청운은 무영검을 양팔로 가슴에 비스듬히 껴안은 채 이울은 억새가 서풍에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연못의 스산한 황혼 아래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청운은 마치 조각상처럼 앉아서 하릴없이 서풍에 서걱이는 억새의 낯익은 흔들림을 바라보고 또 보았다.
억새의 그 서걱거림이 마치 조금 후에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소리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물기 빠진 억새의 건조한 그 소리가 자신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그날의 기억 전체를 되새기는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이 잠시의 감상에 빠져 있던 바로 그 순간 무당산의 초입에서 마치 한 줄기 빛살처럼 산을 오르는 자가 있었다.
그자는 굽잇길을 돌아 연못 근처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그자가 내뿜는 기도가 대단했다.
그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청운은 숨통이 조여드는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검기 그 자체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가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대기가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얼굴에 기괴한 황금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거의 귀까지 찢어진 커다란 검은 입이 웃고 있었기에 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바로 황금면객이었다.
청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삼십여 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청운이 높낮이가 없는 나직하지만 카랑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황금면객! 향로봉에 오르기 전에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를 먼저 넘어야 당신은 연화봉에 오를 수 있습니다.”
황금면객이 청운의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서서는 청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곧바로 면갑面甲 사이로 의아한 눈빛을 번쩍거리며 그가 말했다.
“너는 누군데 내 길을 막는 것이냐.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청운의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받았다.
“황금면객, 아니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성이 본래의 이름이겠지요.”
황금면객이 한 차례 신형을 부르르 떨더니 노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네놈은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오늘 이곳에서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청운이 곧바로 그의 말을 받았다.
“나는 강청운이라 합니다.”
황금면객이 신음에 가까운 헛바람을 토해내며 말했다.
“무위검! 안 그래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기 위해 온 중원을 이 잡듯이 누비고 다녔다. 결국 이렇게 만나는구나. 나를 만난 이상 죽을 준비는 되어 있겠지.”
청운이 조소 가득한 반쯤 흐리는 말로 대답했다.
“이곳에서 누가 죽어 있을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요.”
황금면객이 한 차례 청운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강호의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소문보다 몇 배는 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이구나.”
“…….”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구나. 내 가문을 짓이긴 철천지원수만 아니라면… 하지만 나를 만난 이상 너는 이곳에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말 없는 대치가 이어졌다.
청운과 황금면객 둘 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두려운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한 반감을 품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칼날 같은 살의가 풀풀 묻어났다.
그는 당사자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모용세가가 당한 참혹한 현실을 믿을 수도 잊을 수도 없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노려봤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는 자신의 가문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망가지고 도륙되는 것도 모른 채 다른 곳에 있었던 자신을 질책하는 느낌도 엿보였다.
그는 자백을 강요하는 심판관처럼 청운를 노려보았다.
말없이 청운을 건너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살기 이상의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응집된 살기가 거미줄처럼 자신을 옥죄는 것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파왕군과의 대결 때 한 번 느꼈지만 오래도록 잊고 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단지 그와 한 번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우물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청운은 받았다.
청운을 향한 그의 살기가 짙어질수록 청운의 눈빛에서도 무심한 듯 투지에 찬 흥분이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황금면객이 다른 모든 감정을 제거하고 유일하게 남긴 냉랭한 목소리도 말했다.
“왜 그랬느냐. 모용세가가 대체 너에게 무슨 대죄를 저질렀다고 내 가문을 그 지경이 되도록 짓밟았느냐.”
그의 서릿발 같은 태도와 말투에는 원한과 야심과 욕망이 돌멩이처럼 단단히 뭉쳐 있는 것 같았다.
더하여 잔혹한 오만함도 풀풀 풍겼다.
게다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자신감도 잔뜩 묻어 있었다.
청운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요.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거꾸로 모용가주에게 묻지요. 당신은 왜 강호에 그런 짓을 했습니까. 그리고 설산에서 모용후가 날 죽이려 했던 사실도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황금면객이 돌연 허공에 대고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한 청운이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청운을 노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