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혈검비도가 마치 달무리처럼 둥실 떠올라 빙빙 돌고 있었다.
하 보주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아―알겠소. 그럼 사과부터 먼저하리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청운이 하 국주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다시 한번 윽박질렀다.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저기 계시는 석 장주님과 석가장의 식솔들에게 하시오. 그것도 최대한 공손하게 진정성을 담아서 하시오. 최대한.”
청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 국주와 총관은 석 장주를 향해 거의 뛰다시피 달려갔다.
그리고 죄인처럼 읍소를 하며 말했다.
“석 장주님, 내가 잘못했소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귀장에 끼친 손해에 대해 내가 충분히 보상하겠소. 약속하리다.”
석 장주가 아무 반응도 없이 무심하게 하늘만 쳐다보자, 하 보주는 거의 울상이 된 표정으로 서 장주에게 매달리다시피 사정했다.
석 장주는 냉랭한 눈빛으로 하 보주를 흘깃 쳐다보고는 무시하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는 됐으니, 강 대협에게나 다시 가 보시오.”
하 보주와 총관은 다시 몸을 돌려 청운에게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자신에게 채 다가오기도 전에 청운이 높낮이가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당신에게 이런 짓거리를 저지르도록 사주한 자가 누구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모두 밝히시오. 당장!”
하 보주가 깊은 한숨을 몇 차례 몰아쉬더니 모든 걸 체념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해표국입니다. 대협, 제가 무슨 배짱으로 감히 이런 일을 단독으로 저지르겠습니까. 그자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하남의 모든 상권을 저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
“정말입니다. 그 점 깊이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청운이 분기가 잔뜩 담긴 어투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 국주는 배알도 없소. 그들이 시키면 아무 생각도 없이 다짜고짜 그런 몹쓸 짓을 저지른단 말이오. 사해표국 말고 또 다른 세력은 없소. 오늘 일이 좋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토설하시오.”
하 구주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즉시 청운의 말을 받았다.
“대협, 저는 그 이상은 정말 모릅니다. 살수들과 사사천의 귀혼신창도 사해표국에서 파견을 했습니다. 저희 하월보는 그런 정도의 고수를 초빙할 힘도 여력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청운은 그를 더 이상 다그쳐 봤자 더 들을 만한 정보를 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마지막으로 다시는 석가장을 넘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해표국은 내가 조만간에 손을 볼 것이오. 중원표국 이상으로 징치를 할 것이오.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오.”
“…….”
“나머지 배상 문제는 석 장주님과 이야기하시오. 그리고 다시는 석강에 나타나지 마시오. 자숙, 또 자숙하시오.”
청운의 엄포에 하 보주는 계속 읍소를 하면서 굽신거렸다.
“대협, 알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청운이 무영검을 칼집에 납검하고 돌아서자 그제야 하 보주는 한시름 놓았다는 태도로 연신 한숨을 몰아쉬었다.
청운이 별채를 향해 걸어갈 때 석 장주가 하 보주와 총관을 데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운이 별채에서 두 시진 정도 쉬고 있을 때 석가명이 찾아왔다.
그는 청운에게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말했다.
조촐하게 술상을 봐놨으니 함께 약주나 한 잔하러 가자고 했다.
청운은 그를 따라나섰다.
술상은 석 장주의 집무실 옆 객당에 차려져 있었다.
청운이 들어서자 석 장주가 벌떡 일어나 청운을 맞이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청운이 극구 사양을 했으나 석 장주는 기어이 청운에게 먼저 술잔을 권했다.
청운이 민망해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잔을 받자 석 장주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대협에게 다시 한번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청운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은혜라면 제가 더 많이 입었습니다. 이번 일은 우연히 제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울 수 있었을 뿐입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청운이 술병을 들어 석 장주에게 술을 한잔 따랐다.
그때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주님, 제갈신의님께서 오셨습니다”
석 장주가 문밖을 향해 말했다.
“어서 뫼시어라.”
제갈 신의까지 합석한 술자리는 약 두 시진 정도 더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제갈신의는 왜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운이 굳이 그런 힘든 길을 가는지 이제는 알겠다고 했다.
석 장주와 석가명은 청운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어떻게 다 갚느냐며 연신 고마워했다.
청운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너무 그러시면 부담스러워 다시는 석가장에 올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청운은 석 장주에게 차후에 혹시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하오문으로 즉시 연락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즉시 달려오겠다고 했다.
* * *
어느새 여름의 불볕더위가 가을의 서늘한 바람에 자신의 자리를 서서히 비켜주고 있었다.
하오문 형주 분타 안가 앞을 졸졸졸 흐르는 개울에 때 이르게 떨어진 이파리들이 물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작은 바위들 틈으로 이리저리 물굽이가 질 때마다 이파리들이 자신이 자란 이곳을 떠나기 아쉬운 듯 수차례 제자리를 빙빙 돌더니 이내 흐르는 물과 함께 아래로 떠내려갔다.
그때마다 오후의 햇살이 반짝이며 물과 나뭇잎의 갈 길을 동시에 비춰 주고 있었다.
청운은 새벽녘 자신의 처소에 서찰 한 통을 남겨 놓고는 석가장을 몰래 나왔다.
자신이 떠난다고 하면 석 장주를 비롯한 식솔들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게 틀림없었다.
청운은 그 번잡함과 수선스러움을 피해 일부러 새벽을 선택했다.
어젯밤 술자리를 마치고 별채의 처소로 돌아왔을 때 청운이 떠날 것을 눈치 챈 제갈신의가 조용히 찾아왔다.
제갈신의는 청운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자신이 주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별의 기운이 담긴 그 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청운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았으나 제갈신의를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청운 자신도 가능하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을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든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수시로 생기는 것이 강호인의 삶 아닌가.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또한 강호인의 숙명 아닌가.
그렇게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형주분타의 안가로 곧장 갔다.
이곳 안가에 올 때마다 청운은 마치 자기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남궁세가를 떠나자마자 치른 몇 차례의 격전과 석가장에서의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싸움으로 인해 청운은 온몸의 진이 빠질 대로 다 빠진 상태였다.
청운은 안가에서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생각이었다.
쉬면서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계획도 세우고 여력이 허락하면 그동안 시도할 때마다 계속 실패했던 상단전도 다시 열어 볼 생각이었다.
가능할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하늘에 맡긴 채 편안하게.
청운이 안가에 도착하자, 형주 분타주 양춘호와 부분타주 진소구와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어린 문도가 깍듯이 청운을 맞이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눈 청운이 전에 쓰던 방으로 들어가자 양춘호와 진소구도 따라 들어왔다,
잠시 후 어린 문도가 찻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문도는 탁자에 찻상을 내려놓고는 곧바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양춘호가 청운에게 공손하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부문주님이 사사천의 귀수귀마와 귀혼신창을 처치했다는 소문이 전 강호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단 몇 달 사이에 구사 중 셋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고 둘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버린 부문주님의 무위에 강호인들이 경악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
“덕분에 강호인들이 저희 하오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두가 부문주님 덕분입니다.”
양춘호는 말을 이어 갔다.
“이곳 안가에서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확실히 푸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부문주님을 수발하겠습니다. 필요하신 건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즉시 다 대령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곳 안가를 목욕도 할 수 있게 개조했습니다. 언제든지 수발드는 문도에게 말씀만 하시면 물을 데워드릴 것입니다.”
청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수발드는 문도를 시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양춘호와 진소구는 한 시진 정도를 머문 후 안가를 떠났다.
청운은 조금 이른 저녁을 미리 먹고는 목욕을 했다.
목욕실 창으로 대나무 숲을 바로 바라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따뜻한 물에 전신을 담근 채 대나무들끼리 살 부비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든 근심 걱정이 일순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목욕을 마친 청운은 대나무 숲으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나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단전을 열기 위한 운기조식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목욕하고 산책하는 것이 청운의 일과였다.
그렇게 보름쯤 휴식을 취하자 그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일과 중에서도 목욕을 마치고 대나무 숲을 산책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대나무 숲에선 그냥 들이마시는 공기에도 맛과 향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오늘 저녁도 대나무 숲 한가운데서 청운은 지그시 눈을 감고 대나무의 잎들이 바람에 전하는 말을 들으며 대나무가 내뿜는 향에 취해 마치 꿈꾸는 한 그루 나무라도 된 듯이 서 있었다.
그렇게 몽롱한 즐거움에 취해 있던 청운이 이상한 예감에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아무것도 없던 어둑어둑한 허공에 수십여 개의 핏빛 혈검비도가 마치 달무리처럼 둥실 떠올라 빙빙 돌고 있었다.
마치 허공 자체가 보이지 않는 활대의 시위처럼 비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혈―령―비―진!”
청운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혈령비진은 수십여 명이 진을 구축해 그 진 안에 갇힌 사람이 죽을 때까지 비도를 비오 듯이 퍼부어 대는 오직 살인만을 목적으로 하는 절진이었다.
청운은 아차! 싶었다.
안가에서 너무나 한가하고 여유로운 생활에 몸과 정신이 익숙해져 있다가 경계심이 무뎌진 상태에서 혹시나 있을 수도 있는 적의 급습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나오고 말았다.
가장 편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을 나오는 바람에 무영검도 무문적도 챙겨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청운은 자신이 너무 태무심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