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나도 그 점이 전혀 이해되지 않네.
청운이 막 말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찻잔을 들어 올릴 때, 문밖에서 시비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주님, 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석 장주가 문밖에 대고 말했다.
“어서 들라 해라.”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웬 절세의 미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틀어 올린 머리와 연분홍빛 경장이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석 장주에게는 가영이 말고는 딸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청운은 그녀가 도대체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석 장주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너를 구해준 무위검 강 대협이시다. 어서 인사를 올리거라. 제 며느리입니다. 석 달 전에 혼인을 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초가보의 초서서 낭자였다.
그녀가 청운에게 공손하게 읍을 하면서 말했다.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구명지은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청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제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 일일 뿐입니다. 너무 개의치 마시지요.”
초소소는 청운에게 인사만 하고는 곧바로 석가명과 함께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석가명 혼자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청운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갈신의께 인사하러 가 봐야겠다고 석 장주에게 말했다.
석 장주가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는 청운을 배웅했다.
청운이 석 장주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석가명과 함께 제갈신의가 있는 의당으로 향했다.
의당 앞에 도착하자마자 석가명이 소리쳤다.
“신의님, 무위검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삭가명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의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얀 학창의를 입은 제갈신의가 나왔다.
제갈신의를 보자마자 청운은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그에게 예를 갖췄다.
“신의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제갈신의와 청운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석가명은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다.
청운은 석가명의 태도에서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제갈신의와 탁자에 마주 앉았다.
탁자에 앉자마자 청운은 제갈신의에게 현성이를 치료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성도에서 산 금강석으로 된 침통을 내밀었다.
제갈신의가 침통을 열어 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했는가. 무슨 그깟 일로 이런 걸 다… 이건 그 대가치고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네.”
“받아주시지요.”
“현성이는 사람의 이지를 상실케 하는 것에 여러 가지 독을 섞은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네. 무슨 약물인지를 알아내는데 시일이 좀 걸리기는 했으나, 치료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네. 그런 일 때문에 일부러 예까지 오다니 내가 더 민망하네.”
“아닙니다. 부담스러워 하지 마시지요.”
“그건 그렇고 자네의 신태가 그전과는 또 많이 다른 것 같네. 내가 진맥을 한 번 해봐도 되겠나. 아무 손목이나 이리 줘보게.”
청운이 왼쪽 팔목을 내밀자 제갈신의가 청운의 팔목을 잡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진맥을 했다.
제갈신의는 채 일각도 안 되어 진맥을 마치고는 만면에 거의 경탄에 가까운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자네,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솔직히 말해 보게. 너무 놀라서 말이 다 안 나올 지경이네. 정녕 무슨 일이 있었던가? 소상히 말해 보게.”
제갈신의의 경악하는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운이 뒷머리를 한 차례 긁적였다.
잠시 후, 청운은 만년화리를 취한 일부터 양촌댁에서 얻은 책을 통해 태어나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경락과 맥을 타통하고 중단전까지 열었다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했다.
제갈신의는 더 이상 놀랄 수 없을 정도까지 놀라며 청운의 말을 받았다.
“진맥하는 순간 자네가 만년화리를 얻었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네. 그것도 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자네 몸속에 새로 생긴 기맥이었다네.”
“…….”
“사람의 인체에는 평생 사용하지 않는 경락과 맥이 있다는 건 물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폐쇄된 그 기맥의 통로를 실제로 타통한 사람은 아마 중원에서 자네가 최초일 것이네.”
제갈신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말한 그 내용들은 모두 천축에서 유래된 것이라네. 천축의 수행자들 중 더 큰 깨달음을 갈구하던 사람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들었네.”
“그렇습니까.”
“그렇네, 하지만 그 폐쇄된 기맥을 뚫는 데는 너무 큰 위험이 따르고 그것을 시도하다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들었네. 그만큼 위험한 것이지.”
“…….”
“도道를 구하다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는 사람의 전설도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다네. 우화등선했다는 자들 대부분은 사실 바로 그 폐쇄된 기맥을 뚫다가 절명한 것이라네.”
“…….”
“희한하게도 그렇게 죽은 자들 대부분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생전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 죽는다는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죽어서도 한동안은 시체도 썩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네.”
청운은 놀라움을 감지 못하며, 그가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행자의 죽은 그 모습을 보고 우화등선했다고 착각을 한 것이지. 세상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신비한 걸 좋아하는 법이지. 세상에 우화등선이 어디 있겠나. 중원 의학에서는 그 폐쇄된 기맥들이 일반적인 건강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있네.”
“…….”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그 기맥들이 막히는 것이 오히려 사람의 감각이나 신경을 조금 둔하게 만들어 살아가는데 더 이롭다는 것이 중원 의학의 관점이라네.”
“그렇군요.”
“즉, 중원 의학은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는 감각과 신경이 너무 예민한 것이 오히려 여러 가지 정신적인 병을 불러온다고 본 것이지. 그래서 중원에서는 자칫 목숨을 걸고서 그 막힌 기맥을 뚫겠다고 시도한 사람이 여태껏 거의 없었다네. 당연히 그 기맥을 타통할 방법 또한 실전되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네.”
“…….”
“자네가 어디서 그 방법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도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가 없네. 특히 무공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는 더더욱 모르겠네.”
제갈신의는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상단전까지 모두 열면 원형지체原型肢體를 이루어 인간이 지닌 모든 잠력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천축에서 은밀하게 전해지기는 하네.
“아…….”
“하지만 나는 말리고 싶네. 내가 자네를 진맥한 결과로는 지금 자네의 무위만으로도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고 생각되네. 내가 잘은 모르지만, 강호에 자네의 적수가 거의 없을 것이네. 더 이상 욕심내지 말게.”
청운이 제갈신의의 박식함에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삼계三界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청운은 삼계가 이 땅에 열리는 것을 막는 것이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자신의 임무가 되었다고 말했다.
청운의 말을 들은 제갈신의의 표정이 거의 경악에 가깝게 돌변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칫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몇 차례 깊은 한숨을 몰아쉬던 제갈신의가 간신히 놀람을 억누르며 운을 뗐다.
“그런 일은 나라 전체가 나서야 하는 일인데 왜 자네가 모든 걸 책임지려고 하나. 나라가 하는 일을 뒤에서 도우는 건 몰라도 절대 먼저 앞에 나서지 말게. 그건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청운이 곧장 제갈신의의 말을 받았다.
“신의님, 그건 오해입니다. 제가 나서려고 해서 나선 게 아닙니다. 제 갈 길을 가다 보니 제가 그 길 위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하남표국의 멸문을 조사하다 보니 그 사악한 무리가 내 앞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운의 단호한 결심을 듣고 난 제갈신의가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청운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의당의 뒷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청운이 차를 두어 모금 마셨을 때 제갈신의가 손바닥만 한 목함을 하나 들고는 다시 들어왔다.
제갈신의가 청운 쪽으로 목함을 밀면서 말했다.
“내가 도와줄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네. 별의 기운이 담긴 침이네. 호흡을 들이쉬면서 명치에 찔러 넣으면 인체에 잠재된 선천지기를 한순간 최대한 끌어올려 줄 것이네.”
“…….”
“일생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네. 효능의 지속 시간은 단 일각이네. 일각이 지나면 탈진이 와서 두어 식경 정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이네. 절체절명의 위기 때 사용하게. 하지만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네. 생명을 갉아 먹는 마물이기도 하네.”
청운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세 치 정도 되는 시커먼 침이 하나 들어 있었다.
청운은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그것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어서 곧바로 청운은 석 장주를 만날 때부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혹시 석가장에 무슨 일이 있는지를 제갈신의에게 물었다.
청운은 석 장주는 연륜의 힘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석가명의 태도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이 언뜻언뜻 엿보였다고 덧붙였다.
제갈신의가 한동안 청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하월보 때문이네. 그자들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서 석가장을 압박하고 있네. 이곳에서 동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석가장의 사당이 있는 선산이 있다네.”
“…….”
“그곳이 풍수도 좋을 뿐만 아니라 형주와 낙양 그리고 개봉으로 이어지는 관도와도 인접하고 있고 행화촌에 있는 장강 포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교통의 요지 중 요지라네.”
“…….”
“하월보에서 그곳에 전장과 표국을 짓겠다며 자신들에게 그곳을 팔라고 석 장주에게 요구하고 있다네.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면서.”
제갈신의는 말을 이어 갔다.
“그 선산은 석가장의 근원이 유래한 곳이라며 석 장주는 일언지하 거절했네. 그리고 석가장의 바로 턱밑에서 다른 세력이 영업장을 개장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자 하월보의 압박이 노골적으로 심해졌다네.”
“아니, 하월보는 이곳 하남이 아니라 산서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무슨 연유로 이곳 하남에 자신들의 영업장을 지으려고 그 난리를 칩니까. 그것도 절대로 타인에게 넘길 수 없는 선산까지 팔라고 요구하다니.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것들이 다 있다니.”
“그렇지… 하지만 그들은 석가장에서 운영하는 점포를 돌아다니며 시비를 거는 것은 물론이고 며칠 전에는 하월보의 제 일 총관이라는 자가 흉악하게 생겨 먹은 고수들 수십여 명을 대동해서 석 장주를 직접 찾아와 무력시위를 하기도 했다네.”
제갈신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운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통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하월보는 석가장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들이 뭘 믿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는지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요.”
청운의 말이 끝날 때까지 청운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던 제갈신의가 곧장 청운의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