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31화 (131/184)

131화 세상에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일도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어떤 불길한 예감이 저들의 뒤를 쫓아가야 한다고 자꾸 재촉했다.

이 야밤에 복면까지 쓴 이유가 왠지 께름칙했다.

‘간다, 가지 않는다. 간다. 가지 않는다.’

몇 번을 침대에서 뒤척이던 청운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영검을 옆구리에 차자마자 청운의 신형이 한 줄기 연기처럼 창문을 빠져나갔다.

죽립을 눌러 쓴 흑의의 복면인들의 경신술은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모두가 절정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청운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묘묘보허 경신술을 더 끌어올렸다.

그들과 삼백여 장의 간격을 두고 뒤쫓았다.

흑의의 복면인들은 이십여 리쯤 내달리더니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있는 어떤 장원을 포위했다.

청운은 주면에서 가장 큰 노송의 우듬지에 올라서서 안력을 돋우었다.

<이가장李家莊>이란 현판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저자들이 무슨 이유로 이 야밤에 저 장원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한 것인가?

청운은 의아했다.

그래서 바로 나서지 않고 잠시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담벼락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흑의의 복면인들이 일제히 담을 뛰어넘어 장원으로 잠입했다.

곧바로 장원 안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웬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

곧바로 장원 안에서 칼부림 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은 즉시 장원의 지붕으로 신형을 날렸다.

장원의 마당에는 수십여 명의 흑의 복면인들이 다섯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흑의 복면인들에 의해 포위된 네 명의 무사들은 가운데 있는 문사 차림의 청수한 인상을 한 노인을 보호하고 있었다.

노인을 지키는 보표 같았다.

턱에 한 뼘 정도 길이의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 노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전혀 기죽거나 한 올의 두려운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흑의인들을 노려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다.

노인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흑의 복면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은 대관절 누구의 사주로 이 야밤에 내 집을 침입해 이런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느냐. 당장 칼을 거두고 물러나지 못할까.”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노인의 목소리에는 범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위엄이 가득했다.

노인의 말에 무리의 뒤에 서 있던 복면인이 빈정거리듯 조소하는 말투로 이죽거렸다.

그자가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착각하지 마라. 당신이 아직도 이 나라의 급사중(황제의 비서실장)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 자리에서 쫓겨난 순간 당신은 이미 일개 범부일 뿐이다.”

“…….”

“얘들아, 뭐 하느냐. 몇 놈 되지도 않구먼.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서 술이나 퍼마시자. 꿀꿀한 기분을 달래는 데에는 술이 최고지. 암, 그렇고말고. 쳐라.”

청운은 그 흑의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급사중’이라니.

그렇다면 저 노인이 바로 이자천 대인이란 말인가.

이자천은 간신배들이 들끓는 황궁에서 성정이 올곧고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충신이었다.

아무리 비바람에 시달리더라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들도 있다.

폭우에 깨끗이 씻겨 더욱 단단해지는 바위도 있고, 세찬 바람에 부러질 듯 흔들리다가도 곧바로 다시 바로 서는 대나무도 있다.

급사중 이 대인은 이 시대에 몇 없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저 흑의 복면들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아 그를 해하려 한단 말인가?

황궁에 대체 무슨 먹구름이 일고 있는 것일까?

천하에 둘도 없는 저런 충신을 해치려고 하다니.

하긴 너무 꼿꼿하고 올곧으면 적도 많은 법이지, 하고 청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뒤에 있던 흑의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흑의인들의 공세가 한층 드세졌다.

이자천을 보호하는 보표들은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으나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 수위는 흑의 복면인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수적인 열세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채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네 명의 보표는 무수한 검상을 입은 채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흑의 복면인들의 맹렬한 공세에 두 명의 보표가 어깨와 허벅지에 깊은 검상을 입고는 곧 쓰러질 듯이 신형을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한 흑의 복면인이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이자천의 심장을 향해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이자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

청운은 전륜지로 그자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이자천의 심장을 막 꿰뚫으려던 순간, 자신의 이마가 먼저 꿰뚫린 흑의 복면인이 짚단이 쓰러지듯 앞으로 푹 꼬꾸라지며 절명했다.

한순간 장내에 바위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잠시 후 흑의 복면인들 뒤에서 명령을 내렸던 사내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신지 썩 모습을 보이시오. 아니면 당장 물러가시오.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이 나라 안에서 절대로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을 것이오.”

“…….”

“나는 절대로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오. 내 말을 명심하시오. 한 번의 실수는 내가 눈감아 주겠소. 즉시 이곳에서 물러나시오.”

사내는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도 절대로 발설하지 마시오. 이것이 내가 귀하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배려요.”

청운은 그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고 흑의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기 위해 목소리에 잔뜩 공력을 실어 육합점성의 수법으로 말했다.

청운의 목소리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핫. 세상에 쥐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일도 있는 모양이지. 여기서 당장 물러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누가 너희를 사주했는지를 말하고 당장 이곳을 나간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내가 지금부터 셋을 세겠다.”

“…….”

“내 말을 거역하고 서툰 짓을 한다면 절대 인정을 베풀지 않겠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하―나, 두―울, 세―에.”

청운이 숫자를 세기 위해 잠시 육합전성을 푼 사이에 무리에 뒤에 있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오른손으로 청운이 있는 지붕을 가리켰다.

“놈이 지붕 위에 있다. 쳐라.”

십여 명의 흑의 복면인들이 땅을 박차며 지붕 위로 날아왔다.

청운은 무영검도 뽑지도 않은 채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흑읜들을 향해 전륜장을 쳐냈다.

청운의 장심에서 한순간 번쩍하는 황금빛 서기가 일었다.

“으―악.”

“악―악―악.”

청운에게 달려들다 황금빛 장력에 휩쓸린 흑의 복면인들이 대나무 회초리에 맞은 개구리처럼 털퍼덕털퍼덕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청운도 추락하는 그들을 따라 장내로 날아 내리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기어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마. 누가 네놈들을 사주했는지를 말하고 즉시 모두 이곳을 떠나라. 더 이상 나에게 아량을 기대하지마라. 하―나, 두―울, 세―에.”

청운이 숫자를 채 다 세기 전에 눈치를 보고 있던 흑의 복면인 십여 명이 다시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청운이 쌍장을 들어 다시 전륜장을 떨쳐냈다.

청운의 장심이 황금빛으로 번쩍하는 순간.

“으―악―으―악.”

흑의 복면인들의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청운의 장력에 맞은 흑의 복면인들은 실 끊어진 연처럼 오 장 이상이나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청운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뒤에서 흑의인 복면인들을 지휘하던 자에게 쇄도했다.

청운이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자는 호각을 빽 불고는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청운이 달아나는 그자를 무영검을 뽑아 이기어검으로 쳐 죽이려다가 다시 검집에 납검했다.

청운은 그자가 갑자기 측은하게 여겨졌다.

알고 보면 저자도 누군가의 사주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자가 도주하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청운의 전륜장에 반 이상이 죽고 간신히 도망친 흑의인의 숫자는 겨우 열 명이 조금 넘었다.

청운이 죽은 자들의 품속을 뒤져보았다.

단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죽은 자들의 팔뚝에 새겨진 귀면상의 문신이었다.

그 귀면상의 문신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귀호곡의 살수들……!”

청운은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그들이 귀호곡의 살수임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누가 사주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는 없었다.

청운은 살수 무리를 지휘하던 그자를 사로잡을 걸… 하고 살짝 후회했다.

청운이 살수의 팔목을 놓고 막 몸을 일으켰을 때 전직 급사중이었던 이자천이 청운에게 다가왔다.

이자천이 청운에게 포권으로 깍듯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공자 덕분에 이 구차한 목숨을 좀 더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공자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청운이 이자천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저는 강청운이라 합니다.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급사중 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자천이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급사중이라. 다 옛날 얘기지요. 이제는 그냥 모든 꿈을 접고 낙향한 한 사람의 필부일 뿐입니다. 그리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

이자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자천을 호위하던 보표들이 청운의 이름을 듣자마자 소리를 내며 신음을 내뱉었다.

곧바로 청운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네 사람 다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혹시 무위검 강대협이십니까. 저희들은 막영사검입니다.”

청운도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응대했다.

“막영사검의 고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호남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곳 하나까지 오셨는지요.”

막영사검 중 한 명이 청운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급사중 대인의 인품과 덕망을 흠모해 왔습니다. 대인께서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형제들이 뜻을 모아 스스로 어르신의 보표가 되었습니다.”

청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자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인,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나라에서 어느 누가 대인처럼 고매한 분을 해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저로서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짐작 가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청운의 말에 이자천이 잠시 참담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구명의 은혜를 입고도 혼자 사는 몸이라 딱히 대접할 게 마땅찮습니다. 다행히 나에게 괜찮은 차는 좀 있습니다. 들어가서 차라도 나누면서 이야기하시지요.”

그의 방은 단출해도 너무 단출했다.

달랑 탁자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올곧고 청렴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에게 왜 적이 많은지도 알 것 같았다.

그가 청운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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