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 섬세하고 멋진 풍경이 지워지는 데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네놈의 피는 귀혈독봉의 먹이로 줄 것이고 네놈의 살은 내가 발라먹을 것이다. 으―흐―흐―헛.”
청운은 귀수귀마의 잔인성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는 않았다.
이보다 더 지독한 일도 이미 수없이 겪은 청운이었다.
우선은 눈앞의 위험인 비홍사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귀수귀마가 오른손으로 허공에 대고 크게 원을 한 바퀴 돌리고는 재빠르게 청운을 가리켰다.
그러자 청운의 머리 위에서 선회하고 있던 세 마리의 비홍사들이 번개처럼 청운을 향해 쇄도했다.
비홍사들은 교묘하게도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청운을 공격했다.
앞에 있던 놈이 어느새 뒤에서 공격했고, 뒤에서 공격하던 놈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앞쪽에서 공격했다.
마치 무림의 절정 고수들이 진을 형성해 공격하는 것 같았다.
비홍사들은 마치 청운의 공격을 미리 읽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영검에서 발출된 검기가 비홍사의 몸에 토막 내려는 순간 공기 속에서 춤을 추는 솜뭉치처럼 검기에 이는 바람을 타듯 살짝살짝 피했다.
청운은 비홍사들의 교묘한 공격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삼공적, 아니 벽라적을 꺼내 불면 단번에 비홍사들을 마비시켜 토막 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비홍사들의 공격이 워낙 잽싸고 날래서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무영검에서 검기가 발출되는 순간에는 순식간에 삼 장 밖으로 달아나 버려 벽라적의 음파가 미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청운은 잔꾀를 내었다.
치우전륜공으로 호신강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고는 비홍사들이 최대한 몸 가까이 접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홍사들이 무슨 기회라도 포착했다는 듯이 일제히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비홍사들이 막 호신강기를 뚫으려고 하는 순간, 청운은 쾌―타―절의 초식을 번개처럼 펼치며 비홍사들을 모조리 토막토막 잘라 버렸다.
카―카―캭.
이상한 괴음과 동시에 비홍사들이 수십 가닥 토막 난 채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홍사들의 피가 얼마나 독한지 비홍사의 핏방울이 튄 호신강기가 치―이―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호신강기의 몇 군데가 거의 뚫릴 뻔했다.
비홍사가 토막 나는 걸 목도한 귀수귀마는 눈에 핏발이 서고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재빨리 장갑을 낀 자신의 왼손을 푸른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빼더니 청운을 향해 휙 뿌렸다.
번개처럼 빠른 두 줄기 푸른 섬광이 청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청운은 다급하게 무영검으로 그것들은 잘라 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비홍사보다 더 가늘고 더 빠르며 더 잽쌌다.
바로 그때 귀수귀마가 분기에 가득 찬 일갈을 내질렀다.
“내 귀여운 자식 비홍사를 죽이다니. 내 오늘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어디 비청사까지 당해낼 수 있는지 보자.”
청운은 귀수귀마의 말에 대답할 틈조차 없었다.
비청사들의 공격은 너무 빠르고 맹렬했다.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마치 푸른 번개가 눈앞에서 번쩍번쩍하는 것 같았다.
비청사들은 너무 빨라 마치 무영검에서 발출된 검기를 갖고 노는 것 같았다.
청운은 모험을 한 번 해보기로 작정했다.
청운은 오른손에 있던 무영검을 왼손에 바꿔 쥐고는 얼마 전 양촌댁에서 얻은 서책을 통해 터득한 전륜장을 오른손에 최대한 끌어올렸다.
청운은 장력은 검기보다 날카롭지는 못하지만, 그 영향력의 범위가 훨씬 클 것이라 생각했다.
청운은 전륜장으로 비청사들의 속도를 일시적으로 둔하게 만든 후 무영검으로 토막 내 버릴 생각이었다.
청운이 무영검을 왼손으로 바꾸어 쥐는 그 찰나의 순간.
두 줄기 푸른 섬광이 청운의 가슴을 노리고 쏘아져 왔다.
청운이 노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 줄기 푸른 섬광이 막 호신강기에 닿으려는 순간, 청운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전륜장을 쳐냈다.
번쩍하는 황금색의 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주춤하는 비청사가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청운은 왼손에 쥐고 있던 무영검으로 비청사를 토막 내 버렸다.
카―칵―칵.
이상한 소음과 동시에 손가락보다 더 가는 비청사들이 수십 가닥으로 토막이 쳐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청사가 토막 날 때 튄 몇 개의 푸른 핏방울이 호신강기를 뚫고 청운의 옷소매에 튀었다.
소매가 순식간에 구멍이 났다.
청운은 비청사의 독에 소름이 끼쳤다.
저 독에 닿았다면 만독불침지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비청사의 지독한 독에 놀란 청운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때, 귀수귀마의 장갑 낀 손이 다시 검은 가죽 주머니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청운도 그 순간 재빨리 품속에서 삼공적, 아니 벽라적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것은 한 줄기 검은 섬광이었다.
비청사보다도 더 가늘어 마치 검은 실 같았다.
그것은 바람을 타듯 허고 속에 머물러 있다가 먹줄이 튕겨지듯 청운에게 쇄도했다.
청운이 검은 섬광과 죽기 살기로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때 귀수귀마의 음산한 괴소가 들려왔다.
“내 비청사까지 죽이다니. 어디 네놈이 천흑사天黑巳까지 견뎌 내는지 보자. 천흑사는 남만에서 만사萬巳의 제왕이다. 이무기는 물론 용이라도 천흑사를 당할 수는 없다.”
청운은 귀수귀마의 말이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천흑사를 막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빠르고 번개 같아서 검기로도 장력으로도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청운은 세상에 이런 기괴한 뱀도 존재하고 있었나 싶었다.
유일한 방법은 벽라적을 불어 마비시킨 후 처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흑사의 움직임이 워낙 날래서 도무지 틈을 포착할 기회가 없었다.
벽라적을 불기 위해서는 천흑사가 삼 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나 어려웠다.
청운은 한 번 더 모험을 감행하기로 작정했다.
청운은 호신강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린 후 천흑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청운이 끌어올린 호신강기의 영향력 때문에 주변의 대기가 금이 가는 것 같은 쩌―억―쩍 소음을 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귀수귀마가 너무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가득 담긴 경외의 눈빛으로 청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운은 일부러 천흑사를 유인하기 위해 왼쪽 어깨 부위의 호신강기를 살짝 거두어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천흑사가 청운의 왼쪽 어깨 쪽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왔다.
천흑사가 막 자신의 어깨 근처에 왔다고 느꼈을 때 청운이 벽라적을 힘껏 불었다.
하지만 천흑사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 청운이 벽라적을 부는 순간과 천흑사가 청운의 어깨를 스친 순간이 거의 동시였다.
청운은 한순간 왼쪽 어깨가 불에 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청운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한 천흑사를 토막 내고는 곧바로 천흑사가 스친 어깨 부근의 살을 잘라냈다.
잘려진 청운의 어깨살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한 줌 핏물로 화했다.
청운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품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는 귀수귀마를 검기를 허공에 던지는 것 같은 수어검의 수법으로 짓쳐 갔다.
자신의 품속에서 막 독봉과 뱀을 부리는 피리를 꺼내려던 귀수귀마의 오른팔이 팔꿈치 부근에서 잘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귀수귀마는 자신의 팔이 잘린 통증도 잊은 채 장내에서 몸을 빼내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오십여 장 이상을 달아나고 있었다.
청운은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멸환을 전개했다.
무영검을 떠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한순간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더니 귀수귀마의 신형을 휩쓸고는 자신이 출발한 무영검으로 돌아왔다.
“으―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는 순간, 귀수귀마의 몸이 가로로 두 동강 나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무영검을 납입하고는 귀수귀마의 손에 있던 피리를 주워들었다.
피리는 겨우 세 치 정도로 자그마했다.
청운은 그 피리를 밟아서 분질러 버리려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품에 갈무리했다.
만수귀왕 형님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같은 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지만, 소가 마시면 젖이 되기도 하니까.
청운은 왼쪽 어깨를 지혈한 후, 금창약을 듬뿍 바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샌가 하늘은 유리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하늘을 이렇게 정색을 하고 바라본 것은 서당에 다니던 어린 시절 말고는 처음인 것 같았다.
고개를 바로 하자 그 하늘 아래 초록의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옅은 구름이 서쪽 하늘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뿐, 온통 투명한 대기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청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하고 아득한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날이 어둑해질 무렵.
청운은 하남의 성도에 도착했다.
여름의 저녁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주루들이 늘어선 유흥가에는 서서히 홍등이 켜지고 있었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삼이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청운은 배가 조금 고팠으나 박물점에 들러 가영에게 줄 노리개 몇 개와 상아로 만든 빗을 하나 샀다.
그리고 하남에서 가장 큰 공방에 들러 은자 백 냥을 주고 제갈신의에게 줄 금강석으로 만든 침 한 통을 샀다.
모두 열두 개가 들어 있었다.
청운은 밤에 석가장을 방문하는 것이 아무래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주변에서 가장 깔끔해 보이는 <천미루>라는 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으면서 아예 그곳에 숙소까지 잡았다.
청운은 오리구이와 소홍주 한 병을 먹자마자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청운은 따뜻한 물에 가볍게 목욕을 하고는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흑사 때문에 살을 잘라 냈던 부위가 쓰리고 아팠다.
다행히 곧바로 금창약을 발라서 그런지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청운은 참으로 지독한 독이라고 생각했다.
침대는 바로 창가에 있어서 밤하늘이 그대로 창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휘영청 밝은 보름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보름달이 어두운 하늘과 밝고 맑게 화답하며 빛과 어둠의 매혹적인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달빛은 세상의 그 어떤 지붕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빛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고루거각이든 초가든 균일하게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고요한 정적에 잠든 세상이 은은한 달빛으로 인해 더욱 평화로워 보였다.
그 섬세하고 멋진 풍경이 지워지는 데에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침대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던 청운의 눈에 기러기 떼처럼 달빛을 배경으로 죽립을 쓴 수십 명의 흑의의 복면인들이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들어왔다.
난데없는 귀수귀마와의 혈투로 몹시 지쳐 있던 청운은 처음에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으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