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어쩌다 저런 망조 든 놈이 우리 가문에서 나왔는지.
“네놈이 가문에 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런 사특한 무리와 내통을 했느냐. 내가 너에게 뭘 섭섭하게 했느냐. 나는 지금껏 네 형과 너를 동등하게 대했다. 내가 언제 너를 차별했더냐. 너에게 제왕검형까지 다 주지 않았느냐.”
가주의 호통에 고개를 숙인 채 방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던 남궁혁위가 무슨 작심을 한 듯 고개를 치켜들고는 가주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제왕검형이 제 꿈의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꾸는 꿈은 그것보다 훨씬 원대합니다. 아버님이 어떤 질책을 하시더라도 저는 제 꿈을 꾸겠습니다. 저를 말리지 마십시오.”
남궁혁위의 말에 남궁 가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좋다. 네놈의 그 원대한 꿈이 대체 무엇이냐. 어디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네놈의 꿈이 정말로 가문을 배심할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 어서 한번 떠들어 봐라.”
남궁혁위가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는 뭔가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했다.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잘 사는 세상입니다. 지금의 모자라는 황제가 만든 힘없고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천주와 천제님의 가호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세상입니다.”
“…….”
“저는 황제가 이 땅에 멋대로 정한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법과 규칙과 질서가 아니라 이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하늘을 대신해 이 땅에 내려오신 천주와 천제의 숭고한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
“오직 그들만이 이 땅에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극락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남궁혁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 가주는 청하지로 남궁혁위의 마혈을 찍어 버렸다.
그러고는 머리끝까지 치민 노기를 터트리듯 화를 냈다.
“저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네놈이 지금 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기는 하느냐. 그건 바로 역모다 역모. 네놈이 정녕 수백 년 이어 온 가문을 멸문으로 이끌 참이냐.”
“…….”
“저놈의 말을 더 이상 들러볼 필요도 없다. 도대체 어떤 자가 네 머리에 그런 생각을 집어넣었느냐. 네놈이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아도 내가 반드시 찾아내 그들을 싸그리 멸하겠다.”
남궁 가주는 말을 이어 갔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총관은 지금 즉시 저놈을 지하의 밀실에 감금하시오. 그리고 매일 나에게 저놈의 동태를 보고 하시오. 어쩌다 저런 망조 든 놈이 우리 가문에서 나왔는지. 이 일을 대체 어찌할까.”
남궁 가주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궁혁린은 세가의 무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봉과 그녀의 언니 영영은 숨을 죽이며 흐느꼈고, 남궁혁린은 넋을 놓은 채 멍하니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노기를 억지로 가라앉히던 남궁 가주가 고개를 돌려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에게 가문의 치부를 보여준 것 같아 참으로 부끄럽네. 하지만 곧 모든 것이 다시 순리대로 될 것이네. 내가 책임지고 그리되도록 하겠네. 자네는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시게.”
청운이 깍듯하게 읍을 하자 남궁가주는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가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이런 일이…….”
남궁 가주는 처소로 돌아가면서도 연신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삼경의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거인의 등이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청운이 남궁혁린과 그녀의 언니 영영에게 목례를 한 후 막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조금 전 남궁혁위를 팔짱을 낀 채 데려갔던 무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방을 나왔다.
숨을 헉헉 대며 달려온 무사가 남궁혁린 앞에 부복하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첫째 공자님, 방금… 방금… 난데없이 복면을 쓴 자가 나타나 천석이와 사명이를 제압하고 둘째 공자님을…….”
무사의 말을 듣다 말고 남궁혁린이 버럭 화를 내며 다그쳤다.
“무슨 말인지 똑바로 말해 봐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혁위가 어찌 되었다고. 검은 복면인은 또 뭐고. 당황하지 말고 차근차근 다시 말해 보거라.”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했다.
“방금 어떤 흑의 복면인이 난데없이 나타나 밀실로 모시고 가던 둘째 공자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천석이와 사명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 간신히 도망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사내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두어 사발이나 되는 피를 토하고는 제자리에 꼬꾸라졌다.
쓰러진 부복한 사내의 등에 장력에 맞은 커다란 손자국이 있었다.
청운은 사내의 등에 남겨진 장인掌印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 장인에서 엄청난 귀기가 흘러나왔다.
그 귀기는 청운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헛바람이 새듯 중얼거렸다.
“설마, 천녀혈수! 그렇다면 모용후가…….”
청운은 즉시 극황지감술을 운기했다.
세가 뒤 야산이었다.
그새 오 리 정도나 달아나고 있었다.
청운은 더 늦으면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즉시 묘묘보허 경신술을 전개해 한 줄기 바람처럼 쏘아져 갔다.
남궁혁련도 즉시 청운을 뒤따랐다.
채 몇 호흡도 지나지 않아 야산의 대나무숲 속에서 그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청운은 섬전처럼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바로 그때 숲에서 이십여 개의 비도가 번갯불처럼 청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청운은 쾌―타―절―변의 초식을 전개해 무영검으로 비도를 모조리 쳐냈다.
바닥에 떨어진 비도의 옆면에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핏빛 혈룡이 번들거렸다.
청운은 그렇다면 모용후가 혈검사자와 같이 왔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쉬―이―익―쉬―익.
청운이 다시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신형을 솟구쳤을 때 또다시 소음과 동시에 대여섯 개의 암기가 청운의 전신을 노리며 쏘아져 왔다.
청운은 흥, 하는 콧방귀를 한차례 뀌고는 무영검으로 그 암기들을 모조리 박살내 버렸다.
그러나 청운은 암기가 무영검에 닿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 암기들은 살상용이 아니라, 도주를 위해 하오잡배들이 흔히 사용하는 연무환이었다.
눈앞에 연기가 꽉 차올라 청운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저급한 수법에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청운은 연무환이 날아온 곳을 향해 수어검의 수법으로 검기를 떨쳐냈다.
“아―악.”
그러자 곧바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청운은 눈앞의 자욱한 연기를 무시한 채 곧장 소리가 들린 지점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혈검령을 움켜쥔 팔 하나만 달랑 떨어져 있었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최대한 운기했다.
방원 십여 리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운은 갑자기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상실감과 공허함을 느꼈다.
청운이 몸을 돌려 막 세가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남궁혁린이 현장에 날아 내렸다.
그가 청운을 돌아보면서 눈짓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청운이 땅에 떨어진 팔 하나를 가리켰다.
남궁혁린이 혈검령을 주워들고는 자세히 살폈다.
청운과 혁린이 세가로 내려오자 남궁 가주가 뒷짐을 진 채 착잡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궁 가주가 남궁혁린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남궁혁린이 혈검령을 들어 올리자 가주가 흘깃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는 곧장 몸을 돌려 처소로 가 버렸다.
* * *
먼 곳의 산들이 칼처럼 날카롭게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푸르스름한 밤의 그림자가 산을 떠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해가 산정 너머로 떠오르자 푸른빛이 감돌던 새벽하늘에 찬란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늘진 곳의 나뭇잎들도 찬란하게 반짝였다.
청운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아침에 다시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서찰만 남겨 놓고 새벽에 세가를 나왔다.
석 가장에 가 볼 참이었다.
흑선에 감금당했다가 독물에 중독되어 이지를 상실한 현성이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해 제살신의에게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생각할수록 제갈신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것 같았다.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으면 법도 칼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단지 인사차 가는 것이지만 틀림없이 그는 또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할 것이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혈화제천에게 당한 내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자신이 틀림없이 심각한 상태에 직면을 했을 것이다.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그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만년화리를 취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고 청운은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가영이의 깜찍한 얼굴도 자꾸 눈에 밟혔다.
‘그새 삼 년이 지났으니 가영이도 열다섯 살이 되었구나.’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날 것 같았다.
가영이가 어떻게 변했을지 몹시도 궁금했다.
얼마 후 청운은 산길에 이르렀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봉들이 서로 경쟁하듯 솟아 있었다.
조금 가까운 산정은 짙은 녹음이 우거져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도 거의 속이 보이지 않았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솟아 있는 산정은 구름에 가려 희뿌옇게 보였다.
또한 가장 먼 곳의 산정은 하늘에 맞닿아 윤곽선만 희미하게 보였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가팔랐다.
두 시경쯤 올랐을까.
자신이 올라온 길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바위가 나타났다.
잠시 쉬어 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청운은 술이라도 한 병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을 바라보면서 청운은 금세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순간 눈앞의 풍경은 단조로운 형태로 변해 점차 희미해지더니 시야에서 물러났다.
대신 그의 시야에 남궁혁린이 남궁 가주에게 대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청운은 인간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별의 먼지로부터 태어나 다시 새로운 별의 재료로 환원하는 것이 인간 삶의 전부인데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지 못해 모두가 안달복달하는 것 같았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우주의 연기緣起에 의해 우연히 나타났다 소멸하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자신이 의도해 만든 줄 착각한다.
육체도 영혼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게 바로 자신이라고 애착을 넘어 집착을 보인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일수록 그 쓸데없는 착각을 엄청난 신념처럼 믿으며 가문을 만들고 계급을 만들고 집단을 만들고, 그걸 지키기 위해 타인을 핍박하고 강제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은 그 얼토당토않은 착각에 턱도 없는 고상한 의미를 잔뜩 부여해 자신들이 타인에게 저지르는 잔혹하고 극악무도한 행위의 정당성까지 담보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