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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27화 (127/184)

127화 형님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짓까지 벌입니까.

영봉은 청운에게 객당의 문을 열어 주고는 곧바로 뒤돌아 가 버렸다.

좀 어정쩡해진 청운이 머쓱해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가주 남궁일천이 탁자에서 일어서며 청운을 반갑게 맞았다.

청운을 보자마자 남궁일천은 만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수염을 급하게 몇 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럴 수가. 내 감각으로도 감지 불가능한 기감이라니. 도대체 그 나이에 어떤 깨달음이 있었기에… 강호의 평가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구먼.”

청운은 한 차례 민망스러운 표정을 짓다 말고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강호 소졸 강청운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남궁일천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몇 차례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위검이 강호 소졸이면 누가 강호의 대협이 될 수 있는가. 너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네. 나는 형식적인 격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네. 자, 자 이리로 어서 좌정하시게. 앉아서 이야기 하세.”

객당의 벽체와 기둥들이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것 외에는 내부에 장식은 거의 없었다.

장식이라고는 마주 보이는 벽면에 늘어뜨려진 족자 몇 개가 전부였다.

객당의 분위기는 그의 검박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청운이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자 가주가 차를 따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그래, 내 둘째 딸 아이와는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나?”

청운이 얼굴만 붉힌 채 대답을 못 하자 가주가 입가에 한 자락 미소를 베어 물고는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나는 둘의 관계를 전혀 반대하지 않네. 문제는 언니인 영영이인데… 비록 한 살 터울이지만 나는 언니를 먼저 혼인시키고 싶네. 지금 여러 곳에 매파를 넣어 알아보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그동안 자네가 좀 참아주어야겠네. 그럴 수 있지.”

청운은 얼굴을 붉힌 채 쑥스러워하자 가주가 계속해서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문제는 그리 일단락된 걸로 하고, 좀 전에 영봉이로부터 혁위가 天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청운이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내비치며 아까 영봉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하남표국의 일 때문에 잠입했던 대륙표국의 비고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을 보았다고 말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 가주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야기의 핵심을 찾는 것처럼 맞은편 벽에 걸린 족자 그림을 한차례 쳐다봤다.

청운의 말에 가주는 자식에 대한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고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위엄에 덧씌워진 모욕을 감내하기라도 하듯이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침묵했다.

그 모습이 가주의 현재 속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을 옥죄는 가주의 침묵을 전부 감내하면서 가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운은 그 방을 떠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구실과 핑계라도 만들고 싶었다.

잠시의 침묵 후 가주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자네가 신경 쓰지 않도록 내가 잘 처리하겠네. 그리고 하나만 더 물어봄세. 자네 정도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 굳이 왜 그런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는가.”

청운이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내비치며 말했다.

“제가 그 일을 당한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마무리해야 될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 일이 반드시 제가 해야 하는 의무처럼 여겨집니다. 이제는 그 일이 너무 익숙해 때로는 편하기조차 합니다.”

남궁 가주는 청운의 말에 몇 차례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했다.

곧바로 그는 자신의 확고한 결심 같은 속내를 털어 놓았다.

“혁위의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네. 자네는 절대 나서지 말게. 정 안 되면 내 손으로 직접 내 자식을 처단하겠네. 믿어도 좋네.”

남궁 가주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그의 단호한 말속에는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청운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주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문의 일에 자신이 개입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청운은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주의 날카로운 분노의 목표물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남궁 가주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즉시 주 총관을 좀 불러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시비가 어딘가로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채 일각도 안 되어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주 총관이 들어왔다.

그는 약간 마른 몸집에 선비풍의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주 총관은 객당에 들어오자마자 가주에게 깍듯하게 포권으로 예를 갖추면서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가주님, 저를 찾으셨는지요. 갑자기 무슨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계시는지요.”

가주가 주 총관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 총관, 세가에서 일한지 올해로 얼마나 되었는가?”

가주의 뜬금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얼굴에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올해로 삼십사 년째입니다.”

가주가 다시 물었다.

“그 정도 세월이면 세가에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훤히 꿰고 있겠구먼. 주 총관, 자네는 혹시 최근에 혁휘에게서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가?”

주 총관이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대답했다.

“한 이삼 년 전부터 둘째 공자께서 외출이 잦고, 가끔은 한두 달씩 거처를 비우는 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에도 늘 있던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둘째 공자께서 자신의 외출을 가능하면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일일이 다 보고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둘째 공자의 신상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지요.”

가주가 주 공관을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 요즘 강호에서 악행을 일삼고 있는 天이라는 집단에 대해 들어봤는가. 둘째가 天에 관련되어 있다는군. 자네는 정녕 몰랐는가.”

주 총관이 얼굴에 여실히 당황한 표정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금시초문입니다. 속하가 불민하여 가주님을 잘 모시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총관은 가주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순종적인 표정과 모호한 언사로 얼버무림으로써 자신의 충직함을 드러냈다.

총관은 세가의 내부자로서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주와 남궁 혁위 양쪽을 다 고려하는 이중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피력하기만 했다.

가주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수염을 몇 차례 쓰다듬고는 말했다.

“내 말은 자네를 질책하고자 함이 아니네. 정확한 진실을 알고자 함이네. 그만 됐으니 총관은 나가 보시게.”

총관이 나가고 한 식경쯤 지나 청운도 가주에게 읍을 하고는 객당을 나왔다.

객당을 나서는 청운의 등 뒤에 대고 남궁일천 가주가 다시 한 번 청운을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혁위 문제는 아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잘 처리하겠네.”

청운이 객방을 나오자 영봉과 남궁혁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청운을 혁린의 처소로 데리고 갔다.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영봉의 언니 영영도 있었다.

술판은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거의 자시가 다 되어 술판이 끝났다.

영봉이 내원의 별실에 잠자리를 준비해 놓았다며 청운을 그곳까지 안내했다.

영봉은 별실 앞에서 청운에게 살짝 한 번 안기고는 손을 흔들고는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갔다.

* * *

청운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목욕을 하고는 곧바로 침상에 누웠다.

창호지에 걸러진 부드러운 달빛이 은은하게 침대를 비췄다.

청운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청운의 시선은 계속해서 방문을 주시하면서 극황지감술을 운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흑의 복면인이 시퍼런 검으로 청운의 목젖을 찔러왔다.

그의 침입은 은밀하고도 과감했다.

하지만 그의 기습은 청운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청운은 그자가 방에 접근하기 전부터 그자의 모든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청운은 그자의 검이 목젖에 막 닿으려는 순간, 목을 살짝 젖혀 피한 후 그 탄력을 이용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무영검을 움켜쥐었다.

청운은 기습에 실패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한 흑의 복면인의 두 눈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말했다.

“혁위 형님, 형님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짓까지 벌입니까. 형님이 무슨 연유로 天에 가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天은 형님이 생각하는 그런 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천하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악의 무리일 뿐입니다.”

“…….”

“그들의 실체를 직시해야 합니다. 복면을 벗고 저와 이야기합시다. 제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흑의 복면인이 한 손으로 복면을 홱 벗어 던지며 말했다.

“형님이라니. 내가 왜 네놈의 형님이냐. 네놈이 영봉과 혼인을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네놈을 세가의 식구로 인정 못 한다. 그리고 天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니다.”

“…….”

“네놈이 잘못 알아도 뭔가를 한참 잘못 알고 있다. 天은 이 지랄 같은 세상을 사람 살기 좋은 세상으로 개혁하려는 훌륭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다.”

그는 말을 이어 갔다.

“네가 天에 가입해라. 그러면 좋은 직책을 주도록 윗선에 이야길 해주겠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다. 어떻냐, 내 제안이.”

복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퀭했다.

그의 표정에서 성공한 형을 둔 덜 성공한 동생의 우울한 분위기가 짙게 풍겼다.

그는 가문이 주는 엄청난 선물을 거부하고 울타리를 부수고 달아나 버린 망아지 같았다.

청운이 그의 말에 반박하려고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별채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곧이어 카랑카랑하면서도 단호한 묵직한 중저음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남궁 가주의 목소리였다.

남궁 가주가 방문을 확 열어젖히며 말했다.

“이 얼빠진 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강 공자가 아니라 바로 네놈이다. 네가 무엇이 부족해 그런 악의 무리에 발을 담갔느냐. 너를 꼬드긴 놈이 누구냐. 한 치의 거지도 없이 이실직고 하지 못할까.”

남궁 가주의 불같은 호통에 남궁혁위는 극도의 당황함을 내비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남궁 가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고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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