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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26화 (126/184)

126화 무엇이든 좋으니 솔직히 말해 주게.

남궁혁린의 호들갑에 살짝 얼굴을 붉히던 그녀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피해주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남궁혁린이 청운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을 좀 해보게. 궁금해 미칠 지경이네. 도대체 어떤 기연과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 짧은 세월에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렀나. 나에게도 그 비법을 좀 알려 주게.”

“…….”

“나는 삼 년 전에 구성에 도달한 제왕검형이 무슨 철벽에 막힌 듯 정체하고 있네. 내공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깨달음의 문제 같은데… 어떻게 그 벽을 돌파해야 할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으니…….”

남궁혁린은 말을 이어 갔다.

“아버님에게 여쭤보면 자꾸 세월을 견디라고만 하시니.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고견이 있으면 말 좀 해주게.”

청운은 남궁혁린의 칭찬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청운을 다시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그의 말은 반쯤만 진실인 의례적인 인사 같다고 느꼈다.

청운이 그에게 공손하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저에게 무슨 특별한 고견이 있겠습니까. 제왕검형은 강호인들이 손가락에 꼽는 절기 중 절기가 아닙니까. 더구나 저는 한 번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떤 말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궁혁린이 차를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청운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다짜고짜 자신을 따라오라는 그의 돌발 행동에 청운은 좀 황당했다.

어정쩡하게 일어선 청운이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남궁혁린은 청운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세가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중턱쯤 올라가자 방원 오십여 장 되는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한가운데 멈춰선 남궁혁린이 청운에게 무영검을 좀 빌리자고 했다.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무영검을 건넸다.

남궁혁린이 무영검을 뽑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감탄을 했다.

그리고는 툭 내던지듯이 한마디 했다.

“아! 참으로 좋은 검이네. 우리 가문의 지보至寶인 제왕검에 못지않은 명검이네. 이런 검을 도대체 어디서 구했나. 기연이 자네를 따라다니는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내가 제왕검형을 펼칠 테니 뭐가 문제인지 잘 살펴주게.”

청운은 대경실색했다.

자기 가문의 절기를 타인에게 노출하는 것은 무림의 금기 중 금기인데, 그것도 최대절기인 제왕검형을 보여주겠다니…….

청운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림의 금기 아닙니까. 외부인인 저에게 가문의 절기 중의 절기인 제왕검형을 보여주시겠다니. 저는 보지 않겠습니다.”

청운의 말에 남궁혁린이 인상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자네가 어찌 남인가. 그러면 내 동생과 결혼하지 않을 참인가.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가.”

그가 갑자기 화를 내자 청운은 몹시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세가의 절기를 본다는 것이…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제가 세가의 식구로 인정되면 그때…….”

남궁혁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남이 아니네. 아버님도 알고 계신 일이네.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절실해서 그렇네. 정 불편하면 내 시연이 끝난 후 자네의 절기도 한 초식 보여주면 되지 않는가. 그럼 잘 보시게. 시작하겠네.”

남궁혁란이 무영검을 가슴께로 비스듬히 들어 올리더니 곧바로 제왕검형을 펼치기 시작했다.

거의 발이 지면에 닿지 않고 떠 있는 것처럼 연속 동작이 때로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때로는 급류처럼 강렬했다.

갑자기 어느 순간 허공으로 솟아오른 남국혁린이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펼치기 시작했다.

눈으로 그 동작과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청운은 그의 동작을 감지하기 위해 살짝 극황지감술을 운용했다.

모든 동작이 아름답고 강렬했다.

어느 순간에는 승천하는 백룡이 대기를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도약하는 백호가 공간을 찢어발기는 것 같기도 했다.

시리도록 푸른 검기에 꿰뚫리고 베어지고 잘린 대기와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는 검기가 사라지면 다시 제자리에 나타났다.

그의 검로가 너무 아름답고 섬세해 마치 검기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제왕검형은 황금면객의 검과는 검로도 다르고 공간의 여백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랐으나 근본적으로 빛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명확했다.

황금면객의 검로가 예측할 수 없는 불규칙성을 보이는 반면에 남궁혁림의 검로는 나름 복잡하기는 했으나 다소 획일적인 규칙성이 보였다.

아마도 그건 깨달음의 차이 같았다.

제왕검형은 또 다른 빛의 검이었다.

황금면객의 검이 상대하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강력한 빛이라면 제왕검형은 빤히 보고도 막지 못하는 밝은 빛이었다.

청운은 강호에 탁월한 절기가 참으로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청운이 잠시 제왕검형이 일으키는 빛의 환상에 잠겨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왕검형의 초식을 모두 펼친 남궁혁린이 땅으로 착지했다.

청운은 진심을 다해 그에게 박수를 쳤다.

그는 충분히 박수를 받고도 남을 만한 시연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궁혁린은 땅에 내려오자 마자 무형검을 청운에게 건네며 말을 걸었다.

“그래, 자네는 나의 검에서 뭘 보았나. 본 것이 있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기탄 없이 말해 주게. 나는 삼성의 내공을 사용했네.”

무영검을 받아 든 청운은 자신도 먼저 시연을 한 뒤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고는 무영검을 들고 공터 한가운데로 갔다.

청운은 삼성 정도의 내공으로 쾌―타―절―변―회의 초식을 연환해 전개할 생각이었다.

청운은 자신의 좌우에 십여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집채만 한 바위를 흘깃 쳐다봤다.

일순간 청운의 신형이 지면에서 살짝 떠오르는가 싶더니 돌연 무영검에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무영검에서 쏟아진 수천수백 가닥의 검기는 주변 대기의 상태에 따라 한순간은 번갯불 같은 직선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완만한 곡선으로 변했다.

그리고 또다시 직선으로 변했다가 최종적으로 직선과 곡선이 순간적으로 서로 교차하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검로로 좌우의 바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청운이 무영검을 검집에 납검하고 돌아서자 거짓말처럼 좌우에 있던 바위들이 제자리에서 자갈이 되어 쌓여 있었다.

눈알이 빠져라 청운의 동작을 보고 있던 남궁혁린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이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청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박수를 치는 것도 잊은 채, 한순간 넋을 놓고 멍한 상태로 있던 남궁혁린이 뒤늦게 박수를 치며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하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자네가 전개하는 검로를 다 읽지 못했네. 실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자네의 검에 검하고혼이 되었을 것이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검이 존재할 수 있지. 나는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네.”

“하하, 과찬이십니다.”

“도대체 그동안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어떤 지고한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에 다다를 수 있는가. 제발, 나에게도 그 깨우침을 좀 가르쳐 주게.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려 말하기도 힘들 지경이네.”

남궁혁린은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재능과 그릇의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하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세월에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네.”

흠모와 경외에 가까운 눈초리로 청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자신을 너무 치켜세우는 그의 말속에 겉치레 같은 칭찬이 너무 많아 청운은 조금 불편했다.

그가 다시 청운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는 내 제왕검형을 보고 무엇을 느꼈나. 무엇이든 좋으니 솔직히 말해 주게.”

청운은 그의 자조 섞인 부탁에 왠지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이 곧바로 그의 말을 받았다.

“형님의 제왕검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름답기조차 했습니다. 벽은 형님이 펼친 제왕검형의 초식 자체에는 없었습니다.”

청운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 갔다.

“문제는 생사를 건 실전의 부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무용과 무술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형님의 제왕검형은 시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전에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실전은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가 있으니까요. 그런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절박함과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형님의 제왕검형에서 본 것입니다.”

남궁혁린은 청운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을 했다.

그도 자신의 벽을 본 것 같았다.

그냥 수련을 하면서 깨달은 검과 생사결의 대결을 통해 깨우친 검이 같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벽을 깨기 위해 아무나 붙들고 일부러 생사결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하고 그는 곤혹스러워 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청운은 그가 궁금해 마지않는, 그동안 강호에서 자신이 겪은 이들을 대충 에둘러 이야기했다.

그는 청운의 이야기가 대단한 기담이라도 되는 듯 귀를 기울였다.

가끔은 청운의 그냥 평범한 말에도 대단한 이야기이라도 들은 듯 이따금 폭소를 터트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남궁혁린과 청운이 진담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거의 야산을 다 내려왔을 무렵, 영봉이 그들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남궁혁린에게 톡 쏘듯이 한 마디 던졌다.

“오빠는 그새를 못 참고 강 공자를 데리고 어디 갔다 온 거지요. 둘이 볼 것도 없는 저 야산에서 뭘 하다 이제 내려왔어요.”

남궁혁린에 영봉에게 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영봉이 그에게 한 마디 더 쏘아붙였다.

“오빠의 무공에 관한 관심은 아무도 못 말리는 건 세가 사람들이 다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님 생신에 온 손님을 데리고 무공 시연을 하다니. 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남궁혁린이 동생의 힐난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은근히 영봉을 놀리는 어투였다.

“네 말이 다 맞다. 앞으로 조심할게. 특히 강 공자에게는 더 조심할게.”

오빠의 놀림에 살짝 삐친 영봉이 청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버님이 강 공자를 뵙고자 하십니다. 긴히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까부터 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영봉의 뒤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청운을 보며 남궁혁린이 얼굴에 의미심장한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객당 앞에 도착한 영봉이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영봉입니다. 강 공자도 함께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객당 안에서 카랑카랑하면서도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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