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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25화 (125/184)

125화 흐르는 강물 위에 꽃잎 하나 띄우듯

그녀 얼굴에서 들뜬 아이 같은 어떤 열기가 느껴졌다.

청운은 그녀가 이따금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의 숨길에서 나지막한 열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날, 그때, 바로 그 순간에 그와 그녀가 바로 그 억새 일렁이는 연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마주침이 그 순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는 약속에 대해서도 기다림에 대해서도 행복한 안도감이 있었다.

청운과 그녀는 서로 특별한 마음의 문턱을 넘은 지 오래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재할수록 서로에게 더 생생했다.

그날, 그때, 바로 그 순간에 서로의 눈 속에 서로를 담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주침이 그 순간을 여전히 서로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청운의 소매를 붙들고 청운을 이끌었다.

월동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들어갔다.

그녀는 청운을 내실로 곧장 데려갔다.

언제 준비해 놓았는지 찻상과 생전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먹음직스러운 과자가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의 청운의 옆에 착 달라붙어서 한 손으로 차를 따르며, 다른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어보라며 청운에게 건넸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둘의 눈빛에 그들의 비밀이 모두 녹아 내려서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한 그녀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에는 그 말 이상의 자잘한 흥분과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다.

청운과 그녀는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인생의 여정에서 공모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감상에 빠졌다.

청운은 그녀의 둘째 오빠 남궁혁위의 문제로 고민스러웠다.

청운은 자신이 남궁가의 가문 일에 입을 뗄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말해야만 한다.

지금 말을 하면 그렇게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 순간이 순식간에 모두 증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운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청운은 모든 사실을 그녀에게 정확히 밝히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청운은 나중에 닥칠지 모르는 부담 때문에 진실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이 순간을 놓치면 다음은 정말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지금의 갈등이 더 큰 갈등을 불러올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운은 이 순간 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 * *

말해야 한다.

말할 수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래서 못한다.

말하면 틀림없이 후회하고, 말하지 않으면 더 크게 후회할 게 틀림없다.

청운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심했다.

청운은 마시던 찻잔을 조용히 다탁에 내려놓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영봉의 설레는 눈을 자신의 설레는 눈으로 들여다봤다.

아주 하기 힘든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청운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이 혼잣말하듯 웅얼거리며 간신히 입을 뗐다.

청운은 어떤 완곡한 왜곡도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봉매, 봉매의 둘째 오빠가 天과 깊숙이 관련이 되어 있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내가 대륙표국의 비고에서 확인했소. 오빠를 그들의 마수에서 구해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기어코.”

청운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 결국은 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고, 잘한 일이라고,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속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영봉은 청운의 말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밝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눈빛은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졌고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없었다.

그녀에게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어쩔 수 없이 동의를 뜻하는 굳는 눈빛과 한숨뿐이었다.

청운은 지금의 이 상황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야기된 것 같아 심한 죄의식마저 느끼고 있었다.

온 세상의 비탄이 그녀의 표정에 몰린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자 청운은 모든 것이 사무치게 공허하고 슬펐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냥 그녀와 이대로 살고 싶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불안한 그녀의 심장을 자신의 심장이 대신 뛰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진정으로 좋아하는 마음에는 정의도, 협의도 들어설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오빠 때문에 한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 모양만으로도 청운의 가슴은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청운은 뭐라고 위로를 하려다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청운은 어리석다 못해 무심하기 짝이 없었던 자신의 무정함을 자책하고 또 자책하면서.

오빠의 잘못을 비난하는 그녀의 입은 심하게 떨렸고 표정엔 엄청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오빠에 대한 심한 비난에 스스로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의 꽉 다문 입술에는 오빠에 대한 비난이 잔뜩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청운의 가슴에 기대어 울기 시작했다.

기대기는 했으나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슬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청운에게 위안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아무라도 그냥 기댈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흐느끼자 그녀의 마지막 말이 울음과 섞인 채 부서졌다.

그녀의 구멍 난 가슴에서 올라온 흐느낌은 그녀를 마주 바라보고 있던 청운의 가슴 한가운데에도 갑자기 커다란 구멍을 파버렸다.

구멍이 숭숭 뚫린 둘의 가슴 속에 그녀의 흐느낌이 삭풍이 되어 불고 눈이 되어 내리는 것 같았다.

청운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그 구멍을 여미고 달래고 꿰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가만히 그녀의 흐느낌을 듣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청운은 그녀의 흐느끼는 슬픔이 다 타고 진정되어 재가 되어 날릴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순간,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릿속에서 계속 엉뚱한 문장만을 다듬었다.

청운은 자신의 달아오른 심장을 식히려고 연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청운은 울먹이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붙들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자신의 어설픈 위로로 인해 그녀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일까 봐 두려웠다.

이 순간이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그건 상관없었다.

그녀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눈길이 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청운은 차분히 기다렸다.

청운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 년 전 남궁가주의 회갑 때 그녀가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을 거의 떠먹여 주다시피 했던 장면을, 그날의 그 장면이 두고두고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미소 짓게 했던 가를.

그 순간, 청운의 뇌리에서 엉뚱하게도 그녀와의 첫 눈맞춤의 강렬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때 그녀의 지혜로운 눈빛이 그녀의 오빠 때문에 생긴 내면의 출혈을 현명하게 지혈할 것이라고 청운은 굳게 믿었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내면에서 차오른 자신의 떨리는 눈빛을 내게 보여준 여자다.

마음이 지극하면 누구나 말보다 울음이 먼저 나오는 법이다.

청운은 그녀의 눈물이 회복의 조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청운은 속으로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이유는 과거에 그대를 충분히 안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과거에 그런 일이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다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나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그렇게 무지하고 무심했다고.

나는 늘 그대의 행복한 표정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었다고.

하지만 나는 늘 당신의 눈금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고.

당신의 생각 속에서 나는 늘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고.

순진하다 못해 모자라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녀의 젖은 눈이 결국은 청운의 눈마저 젖어 들게 만들었다.

청운은 점차로 눈앞이 흐려져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설명하기 힘든 순간을 견디는 청운과 그녀 사이에 뜨거운 침묵이 시끄럽게 요동을 쳤다.

청운은 내가 아픈 것보다 더 힘든 딱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걸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말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심장과 영혼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지독하게 비참하고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 버리자. 그냥 우리 둘만 생각하고 다 버리자.’

청운은 자칫하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흐르는 강물 위에 꽃잎 하나 띄우듯 때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여백은 여백으로 놔두면 그것들이 스스로 말을 할 때가 있다.

청운은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그때 비로소 다른 삶이 보이기도 할 것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래서 청운은 자신의 가슴으로 그녀의 슬픈 무게를 받친 채 한동안 그냥 가만히 있었다.

지극한 울음은 때로 약이 되기도 하는지, 어느 순간 그녀가 울음을 그쳤다.

청운이 그녀의 젖은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말게 씻긴 그녀의 눈길은 그의 무정함을 은밀한 다정함으로 다 수용하는 듯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던 청운의 심장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다시 제자리를 잡았다.

* * *

그때 누군가 요란하게 월동문을 밀고 닫으며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봉매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영봉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의 밝고 쾌활한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운은 자신에게는 없는 그녀의 그런 회복성과 자존감을 좋아했다.

그런 것들에 익숙한 것 또한 청운에게는 없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영봉아! 여기 있느냐. 강 소협도 같이 있지. 내가 들어가도 되느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봉이 곧바로 화답했다.

“들어오세요. 큰 오라버니.”

영봉이 문을 열어주자 그녀의 큰 오빠 남궁혁린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방안으로 들어섰다.

남궁혁린은 청운을 보자마자 포권 대신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며 반가워했다.

그 모습은 다음 대의 남궁세가 가주로서 자신의 위치와 자신감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청운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며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강녕하고말고. 우리 사이에 예는 무슨 예… 자, 자, 어서 이리 앉게. 오 년 전인가, 내 그때 그랬지. 자네 몸속에 엄청난 힘이 잠재해 있다고.”

남궁혁린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강호의 진정한 전설을 이렇게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게다가 우리 영봉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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