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둘 다 서로에게 서로가 기대한 표정과 얼굴을 보여주었다.
“검후님과 무위검 강 대협님을 몰라 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시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저희 방주님이 직접 사과하라는 명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검후가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여태껏 강호 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허투루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스스로 거두어들인 적도 없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결정은 너희 황호문이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청운 일행은 <천화루>로 들어가 버렸다.
청운 일행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당주란 자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해시 무렵 한 무리의 사내들이 <천화루> 잎에 몰려와 부복했다.
대략 삼십여 명인 넘는 것 같았다.
무리의 맨 앞 은색의 비단 장포를 입은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천화루>를 향해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소리를 질렀다.
“섬서의 황호방 방주 천모가 검후님과 무위검 대협을 뵈러 왔습니다. 살펴주십시오.”
사내가 거의 한 시진에 걸쳐 수십 번을 더 소리를 질렀을 때 <천화루>의 문이 슬며시 열렸다.
눈빛이 심연보다 더 깊은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열린 문으로 걸어 나왔다.
그 청년은 <천화루> 앞에 부복한 사내들을 한 차례 쓱 훑어보고는 높낮이가 없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들 가시오. 검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겠소. 그리고 협행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소. 칼을 찬 무사로서 제발 약자를 괴롭히며 살지는 맙시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이것은 부탁이면서 경고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정말 황호방은 강호에서 간판을 내릴 각오를 하시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시오. 하오문 부문주인 내 귀는 강호 모든 곳에 다 열려 있소. 자, 당장 돌아가시오.”
청운이 부복한 무리를 향해 한 마디를 내뱉고 천화루로 들어가자 그제야 사내들은 주섬주섬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얻어 차인 개처럼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어둠 속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 * *
청운 일행이 가볍게 아침을 먹고 객점을 나왔다.
따스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관도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도 얕은 잠에 취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관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조차 잔잔한 음률 같았다.
초여름 아침의 맑은 대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한 식경쯤 걸었을까.
멀리 남궁세가의 웅장한 전각들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은 남궁세가 전각들의 지붕과 용마루가 그 자체로 자랑이자 자신감이라도 된다는 듯이 은은하게 번쩍거렸다.
회갑이나 칠순 같은 인생의 변곡점에 해당하는 특별한 날이 아니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간단하게 치르는 잔치임에도 남궁세가의 영향력 때문인지 세가를 방문한 사람의 숫자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득시글거리며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세가로 이어진 길이 번잡하고 북적거렸다.
세가의 식솔과 무사 열댓 명이 대문 좌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방명록을 작성하고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을 정리하고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운 일행이 문 앞에 도착해 탁자 위에 놓인 방명록에 이름을 적자, 탁자 뒤에 서 있던 무사 하나가 깜짝 놀라며 포권을 취하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청운은 하오문에서 챙겨 온 명주 두 병을 선물로 전하고는 그 무사를 따라갔다.
검후도 남해에서 가져온 붉은 산호로 만든 어른 주먹만 한 붉은 구슬 두 개를 선물로 내놓고는 청운의 뒤를 따랐다.
무사는 청운 일행을 대전 뒤쪽 왼편에 있는 전각으로 안내했다.
잔치가 치러지는 내원의 별채에서는 자신의 가장 좋은 옷을 쫙 빼입은 강호의 노회한 인물들이 한껏 위엄을 부리며 연신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내원의 별채는 돈을 지불한 대가로 꾸며진 완벽한 찬란함이 있었다.
비싼 옷과 치장으로 변이 과정을 거친 내방객들의 모습은 대전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오늘의 모임을 가주의 생일 잔치가 아니라 자신들이 강호의 유력 인사들과 친교를 쌓는 무슨 사교 모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이십 대 중 초반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주와 친분이 있는 다른 세가들의 자제들 같았다.
그 젊은이들은 강호에서 항상 한 묶음으로 언급되고 취급되는 오대세가의 자제들인 오룡삼봉이었다.
진소소가 그들 일행에게 관심이 있는지 힐금힐금 쳐다봤다.
그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가주의 친구들로 보이는 나이 든 노인들이 자신들의 위엄을 더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몇 차례 내뱉으며 더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그들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 행위라도 되는 듯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무림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나 하고 있다는 듯이 현 강호의 상황에 대해서 경쟁적으로 떠들어댔다.
모두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세가의 가주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 남궁일천은 생일에 어울리게 깔끔한 푸른색의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다.
거의 명치까지 내려오는 멋들어진 긴 수염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하얀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가주 남궁일천은 가문의 절학 중의 절학인 제왕검형을 오래전에 대성했다고 강호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수많은 진검승부에서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궁 가주는 연회장에 들어서면서 몇 차례 사람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생일 때문에 방문한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알 듯 말 듯한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뭔가 대단한 권위와 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의 신비스러운 웃음처럼 자부심이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했다.
그는 거의 앞가슴까지 늘어뜨려진 수염을 몇 차례 매만지고는 운을 뗐다.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면서도 묵직한 위엄이 있었다.
가주의 연설 중에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음이 하도 심해 가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청운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음들 속에서 가주의 목소리는 크고 거친 몇 개의 음절 ‘에―’, ‘새삼’, ‘하여’ 등과 같은 말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장내를 지배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청운은 가주의 연설을 듯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때 청운은 누가 뒤에서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전에 본 적이 있던 봉매의 시비였다.
그녀는 청운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녀를 따라나서기 전에 청운은 연회장을 한 차례 쓱 둘러보았다.
검후는 아는 지인을 만났는지 늙수그레한 노인네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또한 진소소는 오룡삼봉으로 불리는 젊은 부류의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호감의 눈짓을 상당히 즐기는 것 같았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그들 모두를 매혹할 어떤 자신감이 내비쳤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은 그녀의 뻔한 눈속임에 속는 사람처럼 그녀의 말과 말 사이에 너스레를 떨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즐기는 데는 늘 대가가 따르는 법이어서 그녀 또한 본의 아니게 평소보다 다소곳한 태도로 주변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검후와 진소소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무슨 말을 했는지 청운이 막 시비를 따라가려고 했을 때 갑자기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청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청운도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종남의 길가명이오. 무위검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산의 손풍도입니다. 무위검 대협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점창의 소자화입니다. 무위검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아보세가의 황보윤입니다. 무위검 대협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제갈세가의 제갈연연이에요. 무위검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주언가의 언휘수입니다. 무위검 대협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끝도 없이 청운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운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이 정도로 피곤한 일인 줄 그때 처음 느꼈다.
그 순간 청운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속 호위나 시비를 두고서 사람을 가려 만나는 고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핑계나 구실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이 무리들과 의무들’이 너무 귀찮고 번거로워 한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청운은 속으로 제발 누가 이 무리들이 없는 조용한 밖으로 자신을 좀 꺼내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때 시비가 청운의 옷소매를 다시 잡아끌었다.
시비의 재촉은 남궁영봉과 자신 사이의 낭만적인 비밀을 아는 듯 은밀했다.
또한 그것은 영봉과 자신 둘 사이의 은밀한 특권을 그녀가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했다.
청운은 무슨 중대한 일이 자신에게 생기기라도 했다는 태도를 내비치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서둘러 여러 번 의례적인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못 이기는 척하면서 서둘러 시비를 따라 밖으로 나와 버렸다.
시비를 따라 남궁영봉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청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늘 가장 멀기 마련이다.
몸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더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청운은 그녀에게 그러질 못했다고 자책했다.
너무 몰라서 때로는 서툴렀고, 너무 바빠서 가끔은 무심했고, 너무 급한 일 때문에 더 가끔은 그녀를 잊기도 했었던 사실에 가슴이 미어질 듯 아렸다.
연회가 열리는 전각 뒤편 아담한 내원 별채의 월동문 앞에서 그녀가 섬섬옥수를 들어 올려 흔들며 그를 알은체했다.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기대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잠시 후 둘 다 서로에게 서로가 기대한 표정과 얼굴을 보여주었다.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그녀의 말에 청운은 가슴이 찡하면서도 구름 위를 둥둥 떠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들을 때 혼자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섬세한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짜증을 내는 모습마저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 때문에 공을 들여 곱게 눈 화장을 한,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