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23화 (123/184)

123화 네가 내 이름을 물었으니 귀를 씻고 들어라.

무영검을 회수한 청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에 착지했을 때, 등 뒤에서 아! 아! 하는 두 마디의 경탄성이 울렸다.

청운은 무영검을 다시 힘주어 꼬나쥐고 몸을 홱 돌렸다.

그 경탄음의 주인들은 적들이 아니었다.

두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검후와 진소소가 거기 서 있었다.

검후는 얼굴 가득 경탄의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진소소는 경외심을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눈빛으로 청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청운은 즉시 무영검을 납검하고는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검후와 진소소도 덩달아 포권을 취했다.

검후가 아직도 얼굴에서 놀라움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청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대협의 무위가 강호의 소문을 몇 배나 능가하는 것 같군요. 단 일검으로 사사천의 자랑인 구사 중 둘을 반병신으로 만들다니…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도대체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지…….”

“…….”

“제가 직접 대적해 보지 않아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협의 검이 결코 황금면객의 검에 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빛의 검도 무섭지만 대협의 검도 저로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공스러울 따름입니다.”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다행히 대협의 검이 빛의 검과 달리 약자를 위한 검인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부디 대협의 검이 변절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청운이 검후의 칭찬에 만면에 민망하고 겸연쩍은 표정을 내비치며, 스스로를 낮추는 어투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저는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황금면객의 검은 제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자의 검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의기가 치솟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하하.”

“과연 제가 그자를 막을 수 있을지… 자나 깨나 그 생각이 저를 사로잡고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혹시 검후님께서 무슨 뾰족한 고견이라도 갖고 계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청운의 정중한 부탁에 검후가 난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저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검의 끝을 추구하면서 평생을 살았지만 육검자 선배의 몸에 난 검상을 보는 순간 어떤 해결책 대신, 이건 절대로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만큼 그자의 검이 대단한 것이지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

“평생 검에 대한 깨달음을 갈구했으면서도, 내가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가 싶어 모든 것이 허망할 지경입니다. 그동안 깨닫는다고 깨달은 게 다 헛것처럼 느껴집니다.”

“검후님, 너무 자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청허기공에 바탕한 검후님의 상청비검이 오래 전에 화경에 진입했다는 걸 강호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

“그자의 검이 나름의 장점이 있듯이 검후님의 검에도 그자에게 없는 다른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걸 확신합니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검후’라는 존칭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허명이 절대 아니지요. 너무 자신을 낮추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듣고 있는 제가 다 민망할 지경입니다. 옆에 진 소저도 계시지 않습니까.”

검후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서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군요. 어디 근처에서 식사나 하고 갑시다. 오늘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알고 보면 인간사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멀리 잿빛 암봉들 너머로 노을이 벌겋게 지고 있었다.

우뚝 솟은 산정마다 붉은 바다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노송들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깊은 우수에 잠긴 것처럼 산정을 향해 숙연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신비롭게 일렁이는 노을빛 속에서 차츰 어스름에 물들고 있는 산천이 엄숙하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 너머로 서서히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당당했던 산들도 점차 푸르스름한 빛으로 사위어 가고 있었다.

* * *

화산 밑 <만미객점> 이 층 창가에 쪽빛의 깔끔한 무복을 입고 고색창연한 보검을 어깨에 맨 한 명의 중년미부와 이십 대 초반 정도의 여인 한 명과 잿빛의 무복이 잘 어울리는 한 청년이 앉아 있다.

두 여인과 청년은 방금 화산에서 내려온 검후와 진소소 그리고 청운이다.

청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검후가 말을 걸었다.

“그래, 강 대협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지요.”

잠시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던 청운이 고개를 돌려 곧장 대답했다.

“남궁세가로 가는 길입니다. 곧 가주의 생일 때문에 인사차 들리는 것입니다.”

검후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거 잘 됐군요. 우리도 남궁세가에 가는 길입니다. 안 그래도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저희와 동행하시지요.”

청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것 참 잘 됐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가는 길에 강호에 대한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

검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한평생 남해의 구석에 처박혀 검만 바라보고 산 사람이 세상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강 대협에게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검후와 청운이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점소이가 양손에 쟁반을 들고 청운의 탁자로 걸어왔다.

점소이가 오리구이 한 마리와 소면 그리고 소홍주 한 병을 청운 일행의 탁자에 내려놓고 막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구석 창가에 앉아 있던 황의를 입은 사내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주문한 순서대로 줘야 할 것 아니냐. 우리가 먼저 들어왔는데 왜 저들에게 먼저 음식을 가져다주느냐. 감히 점소이 주제에 사람을 차별하느냐. 흥, 그러고 보니 계집년들의 얼굴이 제법 반반하구나.”

사내들의 험악한 말에 분기를 참지 못하고 진소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것을 검후가 제지했다.

점소이가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황의 사내들 연신 굽신거리며 말했다.

“대협, 그것은 저분들께서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주문을 해서 그렇습니다. 오해이십니다.”

사내가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돌연 점소이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닥쳐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이 우리 황호방을 은근히 무시하는 것을…….”

보다 못한 청운이 한마디 툭 던지듯 말했다.

“이 음식을 저분들께 먼저 갖다 드리게. 우리는 천천히 먹겠네.”

황의 사내가 청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누가 네놈보고 나서라 했느냐. 네놈 침이 튄 음식을 우리보고 먹으라니… 네놈 맞은편에 있는 야들야들한 년이 부탁하면 몰라도… 킬, 킬, 킬.”

애초부터 황의인은 음식 주문 때문이 아니라 진소소를 어찌해 볼 요량으로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진소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검후가 제지하지 않았다.

진소소는 사내들 앞에 도착하자마자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는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사내는 탁자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다른 황의인 갑자기 박도를 빼들고 진소소를 내리쳤다.

청운은 진소소의 무위로 보면 충분히 사내의 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지척이라 자칫하면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전륜지를 발출했다.

피―핏.

소리와 동시에 사내는 도를 떨어뜨리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사내의 도는 허공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그대로 탁자에 박혔다.

탁자에 박힌 채 부르르 떨던 도가 멈추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심지어 검후도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곧바로 드러났다.

도의 손잡이 근처에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도에 구멍을 내는 것은 절정 이상의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강맹한 지풍이 정확하게 도에만 구멍을 내고 그 뒤의 벽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게 힘을 조절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진소소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조차 모르고 멍한 상태에서 일어서는 황의인의 턱을 그대로 걷어 차버렸다.

황의인은 한입 가득 피거품을 물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다른 황의인 하나는 이미 어디론가 내빼고 없었다.

난데없는 시비로 기분을 잡쳐 버린 청운 일행은 대충 젓가락질 몇 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대부분의 음식을 남긴 채 객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바로 그때 십여 명의 사내들이 청운 일행을 에워쌌다.

모두 똑같은 황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송곳니를 사납게 드러낸 누런 호랑이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수놓아져 있었다.

아까 객점에서 달아났던 사내도 그 무리 속에 끼어 있었다.

그자가 바로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그 사내의 가슴에는 누런 호랑이가 아니라 검은 호랑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당주님, 바로 저년과 저놈입니다요. 바로 저년이 석천이를 개 패듯이 팼습니다.”

당주라고 불리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길래 우리 애를 다짜고짜 두들겨 팼느냐. 이 섬서 땅에서 황호방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당장 누군지를 밝혀라.”

진소소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내 이름을 듣고 싶으면 당장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가르쳐 주마.”

당주라는 사내가 돌연 앙천대소를 터트리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저것들이 완전 미쳤구나. 못 먹을 걸 처먹었나. 감히 대 황호방 당주를 보고 무릎을 꿇으라니. 이 섬서 땅에서 아예 기어서 가도록 만들어 주마. 얘들아! 잡아 족쳐라.”

당주란 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신형을 솟구친 진소소가 원을 그리듯 한 바퀴 돌면서 사내들의 턱을 모조리 걷어차 버렸다.

당주란 자만이 겨우 피했을 뿐, 나머지 사내들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삼사 장이나 날아가 이곳저곳 처박혔다.

자신들의 부하들이 단 한 번의 발길질에 초주검이 된 걸 목격한 당주라는 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조차 더듬거리며 간신히 입을 뗐다.

그새 말투마저 공손해져 있었다.

“도, 도대체 귀하들은 누구신지요. 존성대명을 말씀해 주시지요.”

여태껏 아무 말도 없이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던 검후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일갈했다.

“우리는 저기 맞은편 <천화루>에 오늘 유숙할 생각이다. 지금 당장 너희 방주에게 달려가서 해시까지 사과하러 오라고 해라.”

“네……?”

“만약 내 말을 어기면 오늘 밤에 너희 황호문은 강호에서 사라질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물었으니 귀를 씻고 들어라. 나는 남해검각의 화선유고, 이분은 무위검 강 대협이시다.”

검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당주란 자가 갑자기 땅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