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22화 (122/184)

122화 괴이한 환등幻燈과 요사한 귀면鬼面들이

그 절진의 결계의 무서운 점은 외부의 어떤 힘이 환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계 속에 갇힌 사람 자신이 자기 삶의 과정에서 너무 무섭거나 수치스러워 해결하지 못해 외면했던 환상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것에 무서움이 있었다.

물론 환상은 그걸 믿는 사람에게는 실체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허상일 뿐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것이 환상이다.

하지만 사혼환등으로 펼치는 환상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강호의 일반적인 진은 대게 자연물과 지형지물을 이용해 결계를 만든다.

반면에 사혼환등의 결계는 환등을 조종하는 수백여 명의 사기邪氣를 이용해 그 결계에 갇힌 사람 스스로가 끊임없이 환상을 불러일으키도록 자극한다.

사혼환등은 음산하고 음험한 사기를 수십 년간 끊임없이 주입해 만든 마물에 가깝다고 했다.

어지간한 도검의 공격에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사혼환등으로 만든 진에는 생문과 사문의 구별이 없다고 강호에 소문이 나 있었다.

모조리 부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다 요사의 요기 가득한 마마귀혼무까지 보태지면 결계 속에 갇힌 사람은 급격히 정혈이 고갈되어 강시처럼 말라비틀어져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청운은 진이 발동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은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고는 무영검을 빼 들었다.

무영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무영검이 청운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검신을 부르르 떨며 청아한 검명을 토해 냈다.

무영검에서 거의 삼 장 가까이 되는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청운은 단칼에 사혼환등 모조리 박살을 내버릴 기세로 쾌—타—절—변의 초식을 연결해 물결처럼 일렁거리는 수백 개의 사혼환등을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하지만 무영검의 강맹한 검기에 격타당한 사혼환등은 부서지기는커녕 한층 더 사이한 핏빛을 내뿜으며 청운의 주변을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오—호—호—호.

거기에 더하여 요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산발한 여인의 머리가 날아다녔다.

또한 붉은 혀를 길게 늘어뜨린 채 송곳니를 길게 빼문 귀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시체 같은 얼굴이 청운에게 마구 달려들기 시작했다.

청운은 아차! 싶었다.

청운은 공력을 더 끌어올려 자신에게 들러붙는 괴이한 환등幻燈과 요사한 귀면鬼面들을 닥치는 대로 짓쳐 갔다.

하지만 분명 환등과 귀면을 정확히 베었으나 뭔가를 벴다는 감각이 무영검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영검에 의해 베인 나무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잘린 나뭇가지들이 귀면의 팔다리가 되어 청운을 공격했다.

청운은 모든 게 환상리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환등과 귀면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청운은 환등과 귀면을 공격할수록 내공이 급격히 소진되는 걸 느꼈다.

청운은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멸환을 전개하기 위해 내공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청운이 막 멸환을 전개하기 위해 무영검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을 때.

무영검의 검로에 있는 모든 방위에서 사라유리와 남궁영봉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청운은 멸환을 펼치기 위해 무영검에 주입했던 진기를 다급하게 회수했다.

바로 그 순간 기혈이 진탕된 청운은 울컥하며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냈다.

공격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공격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도저히 자신이 공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유리가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 남궁영봉이 나타났다.

남궁영봉이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 어머니가 나타났고, 어머니가 나타났다 사라진 공간에서 동생 영아가 나타났다.

기력이 떨어질수록 살아오면서 청운 자신이 매몰차게 혹은 무정하게 대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번갈아 나타나 자신을 손가락질하거나, 울고 불며 자신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며 떼를 쓰며 매달렸다.

하남표국의 능국주도 나타났고 삼호도 나타났다.

청운은 그 모든 게 환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도저히 벨 수 없었다.

청운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영검을 납검하고는 단천파혼을 전개하기 위해 무문적, 아니 신단적을 품속에서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청운의 신단적은 파사의 공능이 있기에 틀림없이 모든 환상을 깨부술 것이라 생각했다.

청운은 남은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곧바로 단천일보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청운 주변에 있던 모든 나무와 바위들이 파쇄되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껍질이 먼저 벗겨지고 속이 분해되어 날아갔다.

바위들은 쩌—억—쩍 금이 가는 소리를 내더니 일순간 펑 하는 폭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청운은 신단적을 입에서 떼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 원 오십여 장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나무들은 밑동째 부러져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고, 바위란 바위는 모두 분쇄되어 주변은 거의 자갈밭이 되어 있었다.

너무 급격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탓에 기혈이 진탕된 청운은 한 모금의 선혈을 발밑에 토했다.

기혈이 뒤얽혀 속이 좀 거북하긴 했으나 청운은 사혼환등과 마마귀혼무를 단번에 박살을 냈다고 생각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다 시원했다.

청운이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제자리에 우뚝 섰다.

사혼환등의 결계가 깨어졌다면 다시 날이 밝아야 하는데 주변은 여전히 칠흑처럼 깜깜했다.

청운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고—오—오—오 하는 귀곡성이 어두운 숲을 뒤흔들더니 수백 개의 사혼환등이 다시 핏빛을 뿌리며 떠오르기 시작했고, 마마귀혼무가 만들어 내는 귀면들이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환영들도 나타났다.

청운은 저들의 철저함에 소름이 돋았다.

저들은 청운이 어떤 상황에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철저히 파악하고 계책을 짠 것 같았다.

청운은 단천파혼의 파괴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샅샅이 조사해서 자신에게 덫을 놓는 것 같다고 직감했다.

청운은 맥이 탁 풀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는데 똑같은 상황이라니…….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몰라 한동안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결계와 환영…….”

혼잣말을 뱉듯 중얼거리던 청운의 뇌리에 지금까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환상과 환영은 힘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청운은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은 오히려 상대의 간교한 술책을 자신이 도와주는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적들은 바로 그런 나의 초조한 조바심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혼환등과 마마귀혼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모두 실체가 아니란 환영과 환각이라면 외력에 의한 공격은 빈 허공에 대고 괜한 헛발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청운은 아예 방법을 달리해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체도 없는 것에 실체의 힘으로 공격하는 것은 적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진력만 고갈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청운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의식과 기감을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도록 모두 차단해 버렸다.

자신의 모든 의식과 기감을 의식적으로 닫아 버린 청운은 대신 감각을 최대한 키우기 위해 오감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최고조로 운기했다.

그러자 그들의 실체가 서서히 느껴졌다.

그들은 단천파혼의 음파조차 미치지 않는 오십여 장 이상이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나무와 바위 혹은 흙더미 같은 자연물로 위장한 채 사혼환등과 귀면을 교묘히 조종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은밀히 숨어 있는 그들의 기감이 느껴졌다.

청운은 적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멍한 상태로 깜깜한 허공을 보는 척하다가 돌연 번개처럼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리고는 한 줄기 빛살이 커다란 원을 그리듯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무영검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 스친 모든 곳에서 일순간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무수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커다란 고목에서도 나오고, 바위에서도 나오고, 흙더미에서도 쏟아졌다.

비명이 많아질수록 반대로 숲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혼환등과 귀면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계가 서서히 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깜깜하던 어둠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아직은 어렴풋했으나 숲도 점차로 원래의 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청운은 결계를 완전히 파훼하기 위해 숨 돌릴 틈 없이 적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영검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온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스스로 표적을 찾아가 은신한 적들을 도륙했다.

나무에서 바위에서 흙더미에서 솟구친 무수한 핏줄기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삐—익 하는 호각 소리와 동시에 숲속 곳곳에서 백여 명의 신형이 솟구쳐 오르더니 꽁지가 빠져라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청운은 조금 전 자신이 당했던 것 때문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는 상태였다.

자신에게 꼬리를 내리는 적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청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히려 분노가 사로잡고 있었다.

청운은 달아나는 적조차 가만두지 않았다.

청운은 묘묘보허신법을 최대한 발휘해 한 마리 사나운 매처럼 허공을 누비며 적들을 도륙했다.

청운의 무영검이 한차례 허공에 번뜩일 때마다 서너 명의 적들이 목이 떨어지거나 사지가 몸에서 분리된 채 우박이 떨어지듯 땅바닥에 떨어졌다.

무영검을 들고 맹금류처럼 허공을 누비는 청운의 눈은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사혼환마와 요사라 보이는 일남일녀가 오십여 장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사악한 요귀 같은 저들을 반드시 제거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때 다른 적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운은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후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무영검의 검기를 허공에 던지며 멸환을 출수했다.

무영검에서 발출된 두 줄기 검기가 각각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사혼환마와 요사를 직격했다.

“으—악.”

“악!”

두 가닥의 단말마가 주변에 있던 거목의 우듬지로 떨어져 내렸다.

사혼환마는 오른쪽 다리를 잃은 채 도망갔고, 요사는 자신이 왼쪽 팔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달아나고 있었다.

사혼환마와 요사가 신법을 가속하기 위해 신형을 움찔거릴 때마다 속도 대신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들은 도주하기에 바쁜 나머지 지혈도 하지 않은 채 줄행랑을 놓았다.

하긴 누구에게나 다리와 팔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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