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 빛은 오직 죽음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광휘였다.
태허진인이 검상을 살펴보라고 육검자의 앞섶을 조심스럽게 풀어헤쳤다.
검후와 진소소가 먼저 관에 머리를 들이밀고 상흔을 살피기 시작했다.
검후의 뒤에 서 있던 청운은 그들이 뒤로 물러나자 관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청운은 검후와 다르게 눈으로 살피지 않았다.
청운은 육검자의 검상에 손을 대고는 극황지감술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상을 통해 그날의 비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 난 검상은 중원 어느 문파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외의 것도 아니었다.
청운은 검상에 손을 대고 극황지황술을 더 끌어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대기 속에서 밝디밝은 빛이 산란했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빛의 찬란함이었다.
그것은 빛 속에 어떤 불순물도 없는 순수한 눈부심이었다.
그 순백의 밝은 빛 속에서 가공할 살기와 죽음이 느껴졌다.
그 지독하고도 가공할 빛의 살기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청운에게 전해졌다.
그자의 검로는 빛으로 그리는 그림 같았다.
그것은 끝없이 무수한 제각기 다른 빛의 파장이 서로 얽히고설켜 경계를 넘나들며 어우러지며 변화하고 도드라졌다.
그것은 그 빛을 대면하는 사람의 영과 혼을 옭아매며 파괴하는 지옥의 빛이었다.
그 빛은 오직 죽음만이 가득한 아름다운 광휘였다.
아니, 그것은 지극한 광휘의 지옥이었다.
그 지옥의 광휘를 반드시 틀어막아야 한다는 무서울 정도로 흥분되는 긴장에 청운의 가슴이 두방망질 쳤다.
육검자의 검상에서 손을 뗐을 때 청운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더 혼란한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멋모르고 독초를 한 움큼 삼킨 것 같은 쓰디쓴 회한과 자책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 올라왔다.
청운은 이제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청운은 사태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알았으니 대책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사건을 차분하게 머릿속에서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궁리해도 그자를 직접 상대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청운은 일행은 동굴을 나와 다시 태어진인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청운도, 검후도, 태허진인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방금 끓인 차가 거의 다 식을 때까지 오직 침묵만이 그들 사이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다시 데운 차를 따르며 태허진인이 먼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 두 분께서는 사형의 검상에서 뭘 좀 느끼셨는지요.”
마시던 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검후가 먼저 답을 했다.
“보기는 잘 봤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에 난 검흔만으로는 그자의 검법을 추측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저도 검이라면 좀 아는 편이라고 자부하는데 그 검상에서 어떤 검로의 규칙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검로의 규칙성을 모르면 막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저런 검이 강호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그 새로움이 주는 자극 때문에 흥분을 감출 수 없을 지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누가 저 검을 막아 낼 수 있을지 두려울 뿐입니다.”
검후는 말을 이어 갔다.
“가장 큰 걱정은 불행하게도 그자가 강호의 질서에 반하는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무라는 형식을 빌려 무여대사와 육검자 선배님을 살해한 걸 보면… 그자가 그 무서운 검으로 또 다시 어떤 일을 저지를지 심히 우려됩니다.”
검후가 말을 마치자마자 태허진인이 청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강 대협께서는 사형의 몸에서 무엇을 봤습니까.”
청운이 높낮이가 전혀 없는 심각한 어투로 태허진인의 말을 받았다.
“저는 빛을 봤습니다. 그 빛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이든 자유자재로 침투하는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기에 규칙도 없지요. 규칙 없는 것만이 규칙이지요. 시작하는 순간이 끝이고, 끝인가 하는 순간 다시 시작이지요. 시작과 끝을 모르기에 막을 수도 없지요.”
“…….”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모르는 그 빛 속에는 죽음이 가득했습니다. 너무 밝아 정면으로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그 광휘 속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광휘가 너무 찬란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빛이었습니다.”
청운은 그들의 낯빛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놀라 보였다.
청운은 다시 한 번 말을 이어 갔다.
“그 아름다운 빛은 모두를 죽이는 악마의 빛이었습니다. 방금 지옥에서 길어낸 것 같은. 그자의 검로는 그 빛을 따라 산란하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자의 검은 죽음의 빛 그 자체입니다.”
“이, 이런…….”
“그자의 검이 너무나 가공하기에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불러온 그 죽음의 빛을 내가 차단하겠습니다. 결과는 전혀 장담할 수 없지만…….”
청운의 말을 다 듣고 난 검후와 진소소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지를 못했다.
육검자의 몸에 있는 상흔을 같이 보고도 자신들은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을 청운이 한눈에 파악한 걸 알고는 그녀들은 감탄을 넘어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표정을 내비쳤다.
특히 청운의 얼굴을 바라보는 진소소의 눈빛에는 동경과 질시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자신과 별로 나이 차도 없는 젊은 사내가 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안목과 통찰이 그 정도에 닿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거의 질투에 가까운 눈빛을 내비쳤다.
화산에 오기 전 무위검이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지만, 그가 이 정도의 인물인지는 직접 보기 전까지는 사실 그녀는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대면으로 그녀는 청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청운의 말에 태허진인과 진소소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검후가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강 대협의 말을 들을 때 문득 오래된 검에 대한 전설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삼백 년 전 검천劍天이란 곳이 존재했었다는 전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곳은 중원의 끝자락인 둔황의 명사산 사이에 있는 사정沙井(월아천) 근처라 했습니다.”
“…….”
“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직 빛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살고, 그 빛을 평생을 견디며 산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오직 빛의 검을 추구하는 일인전승의 밀문이 한 곳 있었다고 했습니다.”
검후는 말을 이어 갔다.
“오직 빛의 본질을 아는 한 사람에게만 그 검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삼백여 년 전 그곳에서 더 이상 빛을 이해하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그 빛의 검은 실전失傳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빛의 전설이지요.”
“음…….”
“강 대협의 말을 들을 때 왜 갑자기 그 전설이 제 뇌리에 문득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 빛의 전설이 당대에 재현된 것은 아니겠지요?”
“…….”
“혹여 육검자 선배님의 몸에 난 검상이 그 전설이 재현된 것이라면… 너무나 무섭고 가공스러워 저는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
* * *
도림새의 매화 숲을 지나온 바람이 이마와 코끝을 미끄러지듯이 스친다.
그 바람 속에서 진한 매화 향과 솔향 그리고 이름 모를 풀내음이 났다.
오늘따라 새소리는 유난히 맑고 투명하다.
청운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매화 숲 너머로 겹겹이 쌓인 산정과 암봉들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장관이었다.
하지만 청운의 눈에는 그 절경이 펼쳐져 있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 고민과 혼란이 화산의 장관과 절경을 깡그리 삼켜 버리고 있었다.
빛의 검을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도 고민이었고, 무엇보다 봉매의 둘째 오빠 남궁혁위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청운은 남궁세가로 가기 위해 화산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남궁가주의 생신에 맞춰 남궁세가에 잠시 들러볼 참이었다.
한동안 못 본 그녀가 몹시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天과 관련이 있는 남궁세가의 둘째 남궁혁위의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가 天과 관련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녀 때문에 언제까지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부닥쳐야 할 일이다.
그녀뿐 아니라 남궁 가주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청운은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전에 남궁세가에서 미리 알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화산을 내려오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청운은 육검자를 살해한 그자의 빛의 검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당연히 해답이 없는 생각이었다.
너무 환한 빛은 어둠의 부재다.
그자의 유일한 단점은 빛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자는 어둠을 전혀 모른다.
그자를 이기려면 어둠을 알거나 더 밝은 빛을 아는 것뿐이다.
청운은 생각했다.
나에게는 빛도 어둠도 없다.
‘무위’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위란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은 바로 그 공간에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이 비울수록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위의 공간이다.
그 비워진 자리에 전륜의 빛을 담을 수도 있고, 치우의 성운을 담을 수도 있다.
동시에 둘 다를 담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더 비워야 한다.
내가 원할 때마다 빛과 성운을 가득 담을 수 있도록.
* * *
얼마나 내려왔을까.
천신처럼 우뚝 솟은 잿빛 암봉들 너머로 아직은 희미한 노을이 산정으로 서서히 불그스름한 발을 내리고 있었다.
공기가 멈추어선 듯 사위가 고요했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운은 갑자기 뭔가 아주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청운은 다급히 겁황지감술을 운기했다.
고—오—오—오.
바로 그 순간 귀곡성이 숲속을 소용돌이쳤다.
아직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사위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진법陣法이었다.
아니, 진법에 사술邪術이 가미된 結界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귀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수백 개의 핏빛 등이 숲속을 빙빙 돌고 있었다.
사혼환마邪魂幻魔의 사혼환등邪魂幻燈.
“사사천邪邪天의 구사九邪 중 둘째 사혼환마가 왔단 말인가.”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을 주위로 빙글빙글 도는 사혼환등의 핏빛 속에는 오—호—호—호 하는 요사한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사사천의 구사 중 여덟째 요궁妖宮의 요사妖邪까지.
청운은 그 둘이 사사천에서 유독 구음신마와 친하다고 하더니 그의 복수를 하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구사 중 하나라면 몰라도 둘이라면 만만치 않을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특히 둘 다 요사한 사술과 술법에 능해 자칫 저들의 술수에 말려들면 뜻밖의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혼환등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환상을 스스로 불러내게 하는 절진의 결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