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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20화 (120/184)

120화 그자의 검에서 빛이 번쩍번쩍 쏟아지는가 싶더니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소속된 문파의 권위와 위신으로 강호에서 거들먹거리며 대접받는 것이지 강호 전체를 위한 의과 협은 아니다.

저들 문파의 권위를 인정해 준 건 바로 강호인데, 정작 저들의 가슴속에는 지금의 자신들 문파가 있도록 지지해 주고 키워 준 강호 자체가 없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진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 악이다.

결국 그런 아집과 집착이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결국 자기 자신까지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면 늘 경계해야 할 무지이다.

자신들의 조사나 스승을 흠모하고 공경하고 추종하는 것이야 나무랄 수 없다.

하지만 그 케케묵은 문파의 유훈에 갇혀 세상의 상식과 통념을 무시한 채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사안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수준 없고 저질스러운 맹목일 뿐이다.

그 누구의 생명과 인생도 문파의 체면과 위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문파 또한 그런 인간이 만든 일개 집단일 뿐이다.

문파의 위신과 체면이라는 허울뿐인 집단적 최면과 망상에 빠져 인간의 진짜 삶을 왜소화하고, 망가뜨리고, 황폐화시켜선 절대로 안 된다.

청운은 누군가 당시의 상황 때문에 만들고 정한, 잘못된 고정관념 속에 존재하는 정의와 질서는 언젠가는 모두 부서져야 할 허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인간의 유일무이한 삶, 그 전체가 문파의 것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느 문파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행한 일보다 강호에서 더 대접을 받거나, 그 반대로 홀대를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간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없다.

문파 또한 그런 인간이 만들고 지킨 것에 불과하다.

거목은 스스로 죽어야 비로소 집을 떠받치는 서까래가 될 수 있다.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문파도 시대의 정의에 맞게 스스로 죽어서 거듭나야 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주도적으로 만든, 잘못된 상태로 존재하는 정의와 질서는 언젠가는 모두 부서져야 할 허위이고 가짜일 뿐이다.

청운은 무엇이 옳고 그런지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자고, 연화봉을 대고 일갈하고 싶었다.

무공도 마찬가지다.

무공이 너무 약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고 굴욕을 당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강한 무공으로 남을 업신여기고 억압하는 것은 더 무서운 일이다.

힘이 없어 남에게 지배당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지나치게 강한 힘 때문에 남으로부터 경원시되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청운이 연무장에서 검법을 수련하는 화산의 어린 제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린 제자를 지도하던 제자의 사형 중 하나가 청운을 발견하고는 총총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아차! 싶었다.

타 문파의 수련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무림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당장 몸을 피해 사라지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어서 청운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청운은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진 나머지 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다고 자책했다.

그가 삼십여 장 가까이 걸어왔을 때 그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미남이었다.

청운은 과거에 한번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화산칠검 중 일인인 구서용이었다.

그가 청운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혹시 무위검 강 대협이 아니십니까.”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마주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구 소협, 그 동안 강녕하셨는지요.”

구서용이 아까보다 더 깍듯하게 스스로를 낮추는 듯한 태도로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며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정말 강 대협이셨군요. 그간 별래무양하셨는지요. 그런데 별안간 화산엔 무슨 일로…….”

청운이 만면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서 그의 말을 곧장 받았다.

“예, 태허진인님을 뵈러 왔습니다.”

구서용이 의아한 낯빛을 띠며 말했다.

“미리 기별을 주었으면 저희 제자 중 누군가 대협을 모시러 기꺼이 산문 밖까지 나갔을 텐데,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방문하셨는지요.”

청운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거, 제가 결례를 했습니다. 개인적인 다급한 볼일이 있어 사전의 연통도 없이 별안간 왔습니다.”

청운의 말에 이번에는 구서용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웬,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 * *

구서용과 청운이 장문사령의 집무실이 있는 상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연무장에 있던 화산의 제자 중 하나가 멀리 있는 청운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를 지르며 포권을 취했다.

“화산의 삼결제자 전소운이 무위검 대협을 뵙습니다.”

그 순간 연무장 이곳저곳에서 어린 제자들의 열이 흐트러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청운은 잠깐 몸을 돌려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어린 제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주었다.

청운은 다시 몸을 돌려 구서용을 따라갔다.

상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구서용이 안에 대고 고했다.

“장문인께 아룁니다. 하오문의 부문주이신 무위검 강 대협께서 장문인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구서용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에서 늙수그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안으로 뫼시거라.”

구서용이 곧바로 바깥문을 열고는 청운에게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대협, 가운데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청운이 대청마루에 올라서자마자 가운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무당의 장문사령인 태허진인이 나왔다.

태허진인은 오랜 수련을 한 도사답지 않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청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태허진인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자 선객이 둘 있었다.

둘 다 여자였다.

청운이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들은 벌떡 일어나 청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포권을 취하며 응답했다.

한 명은 사십 대 초반 정도였고, 다른 한 명은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둘 다 깔끔한 쪽빛의 무복을 입고 등에는 고색창연한 보검을 차고 있었다.

둘 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사십 대 초반의 여인은 계란형의 얼굴형에 이마가 넓어서 우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십 대 중반의 여인은 오종종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이었다.

둘 다 풍기는 기도가 대단했다.

나이가 많은 쪽은 외부의 기를 온전히 내부에 갈무리할 정도의 반바귀진에 이른 고수였고, 젊은 쪽도 이미 초절정에 이른 것 같았다.

전자는 보이지 않는 검 같았고, 후자는 잘 벼린 날카로운 검 같았다.

태허진인이 만면에 웃음기를 띠고서 청운과 여인들을 번갈아 보더니 청운에게 그녀들을 소개했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남해검각의 검후인 화선유와 차기 검후를 거의 예약해 둔 그녀의 애제자 진소소였다.

검후가 누구인가?

그녀는 청허기공에 바탕으로 한 검각의 비전절기인 상청비검의 극의를 이미 십여 년 전에 깨쳤다고 강호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의 직전 제자이자 차기 검후로 내정된 진소소소도 상청비검의 수위가 거의 십 성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청운이 다시 한 번 그녀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춰 말했다.

“남해의 전설이신 검후님과 진소소 낭자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후와 진소소도 청운을 향해 깍듯하게 예를 갖추며 응답했다.

“당대 강호의 전설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계시는 무위검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로에 대한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태허진인이 가볍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자, 자, 이제 서로에 대한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앉아서 차라도 나누며 궁금한 얘기를 하도록 합시다.”

태허진인이 청운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래, 무위검 대협께서는 무슨 다급한 볼일이 있어서 기별도 없이 이렇게 화산의 늙은이를 찾아오셨는지요.”

청운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말했다.

“육검자 노 선배님의 일 때문에 왔습니다. 노 선배님의 느닷없는 불행이 저의 불찰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사인이라도 정확히 규명해야 제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

“소문으로만 듣는 것과 직접 현장에 와서 듣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제 화산행은 제 마음의 짐을 좀 덜고자 하는 것도 없지는 않으나, 그것보다는 황금면객의 무위를 정확히 파악해야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결행한 일입니다. 장문인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태허진인이 심각하면서도 엄중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양해랄 게 뭐 있습니까. 사형의 불행이 참으로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것 또한 강호인의 운명 아니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황금면객의 잔악한 행각은 누가 하든 반드시 제지해야 할 것입니다.”

“…….”

“노납으로서야 무위검께서 나서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그자의 무위는 난생처음 보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자의 검에서 빛이 번쩍번쩍 쏟아지는가 싶더니 채 이십 초도 안 되어 사형께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립니다. 심지어 두려움이 앞서 이제 더 이상 그 장면을 생각하는 것조차 싫을 지경입니다.”

태허진인은 말을 이어 갔다.

“검후께서도 바로 그 일 때문에 남해에서 불원천리 먼 길을 오셨습니다. 내가 말로 골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사형의 몸에 있는 검상을 직접 한번 보시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연화봉 북면에 사시사철 얼음이 어는 빙굴이 한 곳 있습니다.”

“…….”

“사형은 지금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 화산은 사형에 대한 복수가 마무리될 때까지 사형의 장사를 치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가 보도록 하지요. 자, 모두 저를 따라오시지요.”

태허진인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청운과 검후 그리고 진소소도 차례로 일어나 장문인의 뒤를 따랐다.

상궁에서 연화봉의 북쪽 사면을 끼고 일다경쯤 걸어가자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청운 일행은 동굴 입구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동굴에서 나오는 서늘한 냉기부터 느껴야 했다.

동굴의 입구는 머리를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하나의 희미한 유등만이 냉기 가득한 바닥에 차가운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십여 장쯤 들어가자 제법 널따란 공간이 나타났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앉아도 될 만큼 널찍했다.

육검자의 관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질 좋은 오동나무로 만든 관이었다.

청운 일행은 육검자의 관 앞에서 잠시 묵념했다.

태허진인이 조심스럽게 관뚜껑을 들어 올렸다.

육검자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눈만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꾸짖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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