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건 제혼마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청운은 그녀가 문주를 닮아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문주가 입가에 한 가닥 묘한 웃음을 베어 물고는 말했다.
“아, 이 아이는 하나뿐인 내 딸입니다. 이름은 명명이라고 하지요. 얼굴은 처음 보지만 사자님은 이미 얘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 누군지 짐작하시겠지요.”
청운은 깜짝 놀랐다.
청운은 그제야 그녀가 삼호임을 간신히 알아챘다.
청운은 급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러 번 구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삼호, 아니 서명명이 살짝 볼우물을 붉힌 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은혜는 무슨 은혜… 오히려 제가 사자님을 잘 모시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자님의 비선이 된 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 문주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괘념치 마시지요.”
청운은 그녀가 ‘문주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에서 조금 부담을 느꼈다.
왠지 그 반대일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청운은 사실 무심한 예의로 삼호를 대했었다.
오늘 삼호의 그런 복장과 태도가 청운은 왠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총사 하여빈이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요량으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자, 자. 몇 년 만에 총단을 방문했는데 밖에서 이러십니까. 사자께서는 거의 삼 년만의 총단 방문이지요. 얼른 들어가서 차라도 나누며 회포를 풉시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저녁은 몽환루의 꼭대기 층을 모두 비워 두라고 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거하게 한잔합시다. 이런 날도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요. 안 그렇습니까? 문주님!”
총사의 호들갑에 문주 서소지는 만면에 은근한 웃음을 띠고는 말했다.
“당연하지요. 총사님. 인생 뭐, 별것 있습니까? 반가운 사람과 함께 한잔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이지요. 그게 사람 사는 재미지요. 자, 어서 안으로 듭시다.”
청운과 문주와 총사는 차를 나누며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삼호, 아니 명명은 다소곳이 차만 마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청운이 말을 할 때 흘깃흘깃 청운의 얼굴을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두어 식경 정도 차를 마시며 그간의 회포를 푼 청운은 어차피 저녁 만찬 때 다시 보기로 하고 먼저 일어섰다.
청운은 정보각에 가 봐야겠다고 말했다.
문주가 명명과 동행하라고 넌지시 권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다며, 청운은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문주와 명명의 표정에서 섭섭함이 조금 묻어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애써 모른 척하며 먼저 방을 나갔다.
정보각에 들어가자마자 청운은 황금면객에 관한 정보부터 찾았다.
그는 비무라는 형식을 빌려 수천의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무여대사와 육검자를 살해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공공연하게 강호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天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그 누구라도 이런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청운은 황금면객의 행각을 우선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의 행각을 이대로 방치하면 강호 전체가 동요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간신히 강호에 불러일으킨 天에 대한 반감의 여론이 도로가 되고 만다.
하지만 두렵기도 했다.
아무리 처음부터 살초를 펼쳤다 하더라도 십여 초 만에 무여대사와 육검자를 살해하다니.
그의 무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물론 청운도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제혼마검의 말마따나 황금면객과의 승부는 절대로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삼백 년 전의 강호라 하더라도 당대 제일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다.
청운은 승부는 둘째 치고 우선은 그와 그의 검을 알아야 하는데 그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황금면객의 정체를 곰곰이 추측해 보았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는 아마도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했다.
그가 아무래도 ‘회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주가 회주와 상제에게 준 선물이 검선의 <자전십이파검>과 흑황의 <구환마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첩첩산중이었다.
회주가 모용성이라면, 천주와 상제는 또 누구란 말인가.
검선의 <자선십이파검>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흑황의 <구환마검>까지 등장한다면…….
청운은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하나 부닥쳐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리 걱정한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청운은 걱정은 또 다른 걱정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해서 그들과 맞닥뜨렸을 때 당당히 맞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보각을 나왔다.
* * *
만찬은 요란뻑적지근했다.
산해진미와 입에 착착 감기는 여러 가지 명주가 탁자 위에 가득했다.
청운과 문주 그리고 총사와 명명이 상석에 앉고 나머지 문도들은 품계와 직급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모두 합쳐 백여 명은 훨씬 넘을 것 같았다.
묘하게도 삼호 서명명의 자리는 바로 청운의 옆이었다.
문주 서소지의 생각인 것 같았다.
청운은 조금 불편했으나 모른 척했다.
문주는 뭔가 기분이 좋은지 표정에 은은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문주가 채운 잔을 들고 일어섰다.
문주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문도들을 향해 제법 긴 건배사를 했다.
“문도 여러분! 우리 하오문도 이제 강호에서 어떤 문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탄탄한 입지를 굳혔습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 덕분입니다.”
문주는 말을 이어 갔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우리 하오문의 호법사자이신 무위검 강 대협을 환영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 하오문이 있기까지는 호법사자의 공이 지대합니다. 강 대협이 우리 하오문에 버티고 있기에 강호의 어느 문파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맞소!”
“하오문의 무궁한 발전과 호법사자님의 영광을 위해 건배합시다. 자, 제가 숫자를 세겠습니다. 모두 함께 잔을 비웁시다. 하—나, 두—울, 세—엣!”
여기저기서 건배! 건배! 호법사자님 만세! 만세! 하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일어나 박수를 치는 문도들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진 정도가 흐르자 대부분의 문도들이 대취를 했다.
그때 총사가 일어나더니 잔치판을 정리하는 인사말을 했다.
“자, 문도 여러분 많이 드시고 즐거웠습니까. 우리에게는 내일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만 자리를 파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와중에도 먼 길을 오신 호법사자님도 여독을 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네.”
“오늘만 날이 아닙니다. 제가 다시 이런 자리를 약속하겠습니다. 제 직을 걸고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모두들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
문도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연회는 끝이 났다.
총사 하여빈이 청운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차를 한잔하자고 했다.
청운은 문주, 총사와 함께 별실로 향했다.
총사가 청운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강 대협, 대협이 저희 하오문의 호법사자 직책을 맡아 주신 지 벌써 삼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강 대협께서 저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저희는 강 대협이 계속 저희와 함께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하지만 약속이 약속인지라 강 대협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강 대협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하 총사의 말은 청운이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문주가 자신을 보자고 할 때부터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을 했었다.
청운으로 인해 강호에서 하오문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이나 청운도 하오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청운은 이미 하오문의 사람들과 너무 정이 많이 들어 문주가 하오문과 그만 인연을 끊자고 할까 봐 더 겁이 났다.
그제야 청운은 왜 문주가 자기의 딸인 삼호, 아니 명명까지 정식으로 인사를 시켰는지 이해가 되었다.
청운은 문주와 총사에게 흔쾌히 호법사자직을 계속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문주와 총사가 청운의 손을 덥석 잡고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게다가 문주는 청운에게 더 놀라운 제안을 했다.
호법사자가 아니라 부문주직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청운은 강호 경험도 일천한 자신에게 부문주직은 너무 부담된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다.
그러나 문주가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결국 받아들이고 말았다.
문주는 따로 계약서는 없다며 그냥 구두로 약속하자고 했다.
청운도 그게 좋겠다고 말했다.
청운의 승낙을 듣자마자 문주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될 줄 알고 이미 별채에 부문주의 집무실과 목욕탕 딸린 침실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목욕물을 데워 놓았으니 푹 쉬며 여독를 풀라고 했다.
* * *
부문주실은 널찍하니 좋았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으나, 사람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한 설계가 마음에 들었다.
문주나 총사가 자신 때문에 많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무엇보다도 목욕탕이 집무실과 바로 연결된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청운은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목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모간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창에는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청운은 곧장 목간으로 다가가 김이 오르는 물에 발끝부터 집어넣었다.
달빛도 덩달아 슬며시 자신의 발을 물속에 들이밀었다.
하늘을 지나는 달 외엔 아무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랜만에 청운은 마음 편히 벌거벗고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묵은 긴장을 풀었다.
목간의 물이 출렁일 때마다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이 은가루를 뿌린 듯 환했다.
얼마 만에 이런 호사인가.
청운은 은빛 달이 녹아내린 따뜻한 물속에서 오래도록 온전히 원래의 자신을 만끽했다.
그는 숨 돌릴 틈 없었던 그동안의 강호 생활에서 오늘 밤과 같은 이런 평안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물속에서 한없이 편안했다.
청운은 며칠 전 옥여산에서 있었던 제혼마검과의 비무를 찬찬히 복귀해 보았다.
청운은 그에게 전력을 다했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삼 푼 정도의 힘을 남겨 두었다.
그건 제혼마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최후의 변수를 가정해 마지막 한 수를 남겨 두는 것은 강호인의 불문율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