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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112화 (112/184)

112화 밤과 황금이 결탁해 낳아 놓은 사생아 같았다.

청운이 양촌댁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저 서책들과 관련된 무슨 안 좋은 사연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양촌댁이 멍하니 천장을 몇 번 올려다보더니 그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은은이 아버지는 원래 농사꾼이었습니다. 우리 전답은 별로 없었으나 소작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이 워낙 우직하고 성실해서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밥을 굶지는 않았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런데 은은이가 세 살 때 큰 홍수가 졌습니다. 그날 논에 물꼬를 보러 나갔다가 거센 물살에 떨어지는 돌에 받혀 은은이 아버지가 그만 허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은 농사일이 몹시 힘에 부친다고 했습니다.”

“…….”

“그러던 참에 황궁에서 수문장으로 있던 왕적삼이라는 절친한 친구가 은은이 아버지에게 황궁의 창고지기 자리를 추천해서 그때부터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군요.”

“네, 그런데 십여 년 전 칠황자의 역모 사건 때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사건은 역모가 아니라 귀비와 동창에서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칠황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었습니다.”

“…….”

“칠황자는 이따금 궁 밖의 저잣거리에서 술마시기를 즐겼습니다. 어느 날 밤 은은이 아비의 친구인 왕적삼이 몰래 궁 밖에서 몰래 한잔하고 오는 칠황자에게 성문을 열어준 적이 있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졸지에 왕적삼이 역모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양촌댁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때 은은이 애비가 오갈 데 없는 왕적삼을 며칠 저희 집에 숨겨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발각되어 왕적삼과 은은 애비는 한날한시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은이가 다섯 살 때의 일입니다.”

“…….”

“그 후 먹고살기 위해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일하다가 제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은은이가 제 약값을 대느라 중원전장에서 그만 염왕채를 쓰고 말았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

“저 서책들은 그 당시 은은 애비가 창고지기를 할 때 황궁에서 내다버리는 책들을 주워 온 것입니다. 은은 애비가 비록 농사꾼이었지만 천자문 정도는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걸 제법 좋아했습니다.”

양촌댁의 말을 들을 때 청운은 가슴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그 역모 사건은 청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귀비와 동창이 황궁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의 폭압과 전횡은 청운과도 무관치 않았다.

바로 그들의 그런 권세 때문에 청운은 번번이 과거에서 낙방했었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줄이 닿지 않고는 출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로 황궁의 모든 질서와 체계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청운 자신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한 것도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무리 학식이 깊고 재능이 뛰어나도 귀비와 동창에 줄이 닿지 않으면 출사는 언감생심이었다.

청운 자신이 바로 그 피해의 당사자였다.

청운은 은은이가 글을 좋아한다는 양촌댁의 말에 반색을 하며 말했다.

“은은이가 올해 열여섯이라 했지요. 제가 은은이 일자리를 하나 알아봐 드려도 되겠는지요. 지필묵이 있습니까. 제가 추천서를 하나 써 드리지요.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아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운의 말에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양촉댁이 옆방으로 가더니 누렇게 바랜 종이와 낡은 벼루와 붓을 들고 왔다.

청운은 벼루에 물을 붓고는 먹을 갈았다.

하도 오래 사용하지 않아 나무막대처럼 변한 붓을 먹물에 몇 번 적신 후, 총사 하여빈 앞으로 서찰을 썼다.

청운의 서찰을 받아 든 양촌댁의 입이 귀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은은이도 함박 웃음을 지었다.

한없이 고마운 표정으로 청운의 얼굴을 바라보던 양촌댁이 말했다.

“은은이를 구해준 은혜만 해도 평생을 갚고도 모자랄 지경인데, 은은의 일자리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양촌댁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청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제가 글은 모르지만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인지는 대충 압니다. 공자님의 글씨를 보니 대단히 명필 같습니다. 저 방에 은은이 애비가 애지중지하던 이상한 글자로 된 서책이 두 권 있는데 공자님께서 한 번 보시지요.”

양촌댁이 은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은은아, 가서 그 서책을 가지고 오너라.”

양촌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은이가 옆방으로 건너갔다.

잠시 뭔가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은은이가 처책 두 권을 들고 반안으로 들어왔다.

은은이가 그 책을 청운 앞에 다소곳이 내밀었다.

청운이 책을 들고 살펴보았다.

표지는 떨어지고 없었다.

상하권으로 되어 있었다.

범어였다.

언뜻 봐서는 경전 같기도 하고 의학서적 같기도 했다.

중간중간에 인체에 대한 도해가 있었다.

범어라서 해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청운은 사실 그 서책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자신에게 정성스레 밥상을 차려준 것이 너무 고마워 양촌댁에게 돈 줄 핑계를 찾기 만들려고 일부러 책에 흥미가 있는 척했다.

청운은 책을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은자 스무 냥을 꺼냈다.

책값이라며 양촌댁에게 주었다.

양촌댁은 깜짝 놀라며 극구 사양했다.

청운은 물건값은 반드시 치르는 것이 자신의 신조라며 거의 반강제로 돈을 주고는 이제 가 봐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뒷집에서 빌려온 닭값도 갚아야지요.”

은자 스무 냥이면 은은이가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두 모녀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청운이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해도 양촌댁과 은은이는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와 청운을 배웅했다.

그렇게 청운은 양촌댁을 나섰다.

* * *

중원표국은 달빛에 고요히 젖어 있었다.

거대한 암봉의 품에 안긴 듯한 즐비한 전각들의 윤곽이 밤이 일필휘지로 그린 한 폭의 묵화 같았다.

하늘을 배경으로 밤의 심장에 떠 있는 거대한 흑선 같았다.

별과 달 그리고 밤과 황금이 결탁해 낳아 놓은 사생아 같았다.

청운이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저 전각들은 사해표국, 대륙표국과 함께 중원 상계를 삼등분하고 있는 중원표국의 본거지이다.

청운은 지금 중원표국의 전각들이 마주 보이는 거대한 노송의 가지 위에 있다.

청운은 양촌댁을 나와 하오문 총단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중원표국으로 달려왔다.

총단에 가는 일보다 이 일이 한층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중원표국의 전각들을 잠시 이리저리 살핀 후 극황지감술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밤은 어둠만큼이나 소리로도 꽉 찬 것 같았다.

이상이 느껴진 곳은 두 곳이었다.

본청 바로 뒤에 있는 전각과 야산 바로 아래에 있는 전각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유독 그 두 전각에만 여러 명의 경비가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본청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은 본청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연결된 길이 마치 미로 같았다.

곳곳에 무수한 기관도 설치되어 있었다.

도대체 저곳에 무얼 꼭꼭 숨겨 두고 있길래 청운은 저 정도로 경비가 삼엄할까 싶었다.

청운은 저곳부터 먼저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청운은 먹줄을 튕기듯 곧바로 노송에서 대전의 지붕 위로 날아 내렸다.

청운의 신법은 마치 수면에서 떠오른 안개가 바람의 결을 타고 허공에 퍼지듯 소리도 없고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냥 밤의 일부 같았다.

무음 무적의 경지였다.

대전의 지붕 위에 내려선 청운은 내력을 운용했다.

그 결과, 순식간에 자신의 몸이 편하게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만들었다.

기와 십여 장과 그 아래에 있던 산자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밤하늘에 날려 버렸다.

대전의 바닥에 내려선 청운은 연단 바로 뒤에 있는 양탄자를 들추고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덮고 있던 철판의 고리를 당겼다.

청운이 내력을 끌어올려 음파를 완벽히 차단했기에 어떤 소음도 나지 않았다.

청운은 주저하지 않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석재로 만들어진 복도가 나타났다.

석벽과 천장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있었다.

화살과 창이 쏟아지는 기관이었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청운은 아예 기관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단번에 기관을 통과해 버렸다.

십여 장쯤 더 들어가자 두 번째 기관이 나타났다.

천장에 손가락보다 작은 구멍들이 빼곡했다.

독무였다.

청운은 이미 세상의 어지간한 독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만독불침이었다.

그래도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청운은 깊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기관을 통과했다.

역시 기관은 작동하지 않았다.

다시 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극황지감술로 감지했던 마지막 기관이 나타났다.

마지막 기관은 앞의 것들과 조금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들이 대각으로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고거에 한 번 경험했던 <철삭천잠사>였다.

쇠든 나무든 걸리는 것은 모조리 절단해 버리는 악마의 실이었다.

저 철삭천잠사를 절단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청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잠입할 때부터 문제가 불거지면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청운은 검집에서 무영검을 뽑아 들었다.

진력을 주입하자 무영검이 우웅 하며 검명을 토했다.

청운은 걸어가면서 절의 초식을 이용해 전후좌우로 휘둘렀다.

스—스—스—삭.

미세한 소리와 함께 철삭천잠사가 모조리 끊어졌다.

무영검을 검집에 납검하고 청운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반경이 십여 장이 넘는 둥근 광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둥근 벽면을 따라 사방에 큼지막한 석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곳곳에 유등이 걸려 있었다.

청운은 삼매진화를 이용한 지풍으로 몇 군데 불을 지폈다.

석실은 총 열두 곳이었다.

규모가 상당했다.

청운은 석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어떤 석실에는 값비싼 도자기와 귀중품들이 가득했고, 또 다른 석실에는 진귀한 약재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대부분 석실은 촘촘한 창살로 되어 있었으나, 세 곳은 무엇이 들었는지 아예 두꺼운 철문에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청운은 무문적을 품속에서 꺼내어 철문의 자물쇠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첫 번째 철문 안에는 장부와 서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특별히 눈길을 사로잡는 장부나 서류는 없었다.

청운이 막 석실을 나가려고 했을 때 석실 바닥 한곳이 다른 곳보다 반질반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자 석판 사이에 미세한 틈새가 보였다.

청운은 손등으로 석판을 두드려 보았다.

퉁퉁하는 소리가 속이 빈 것 같았다.

손에 힘을 주고 석판 한쪽을 꾹 누르자 반대쪽의 석판이 들렸다.

청운이 그렇게 석판 두 개를 들어 올리자 바닥에 고색창연한 철궤가 보였다.

제법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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