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제혼마검은 얼굴에 불신의 표정을 가득 내비치며 운을 뗐다.
“마족과 황궁과 모용세가라. 하긴 모용성이 야심이 큰 인물이기는 하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군림천하를 위해 마족의 저주를 깨우는 것도 서슴지 않다니… 그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강호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 나도 심히 걱정이 되네.”
“그렇습니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天과의 일 때문에 겪는 자네의 고충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네. 오늘 자네가 나에게 말해 준 天에 대한 정보는 앞으로의 내 강호 행보에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네.”
제혼마검이 깊은 한숨을 몇 차례 몰아쉬더니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이건 오로지 내 섣부른 짐작에 불과하지만 소림의 무여대사와 화산의 육검자를 살해한 검이 아무래도 검선의 <자전십이파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드네.”
‘<자전십이파검>…….’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걸세. 삼백 년 전 당대 제일인자였던 검선의 검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는 자가 현 강호에 과연 몇이나 있을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
“명심하겠습니다.”
“자네의 현재 무위가 거의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은 틀림없기는 하지만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네. 부디 황금면객이라는 자의 검을 조심하게. 당대 제일은 절대로 그냥 주어지는 호칭이 아닐세.”
청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제혼마검이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사사천주와 혈검령주를 특히 조심하게, 그들은 나와 달리 절대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일세. 사사천주의 묵성풍혼도법과 혈검령주의 마환십팔수는 수라마군의 수라도법과 견주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절기일세.”
“네.”
“자네의 지금 무위라면 그들과 일대일로 대적하는 것은 그리 겁날 것도 없지만, 그들은 성정이 음흉하고 음습해 귀계와 암계에 능하다는 것일세. 그들의 귀계나 암계에 말려들면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네.”
청운의 심각한 표정은 계속 이어졌다.
제혼마검은 그런 청운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주 힘든 상황이 도래하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진짜 위급한 사태가 발발하면 한번은 크게 힘을 보태주겠네.”
“말씀 감사합니다.”
“자네가 꿈꾸는 세상이 우리 마련에도 지금보다 좀 더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네. 자네가 만든 새로운 강호의 질서가 마련에 해가 된다면 나는 부득불 자네에게 검을 겨눌 수밖에 없네.”
“당연한 말씀입니다.”
“오늘 오랜만에 잘 놀았네. 평생 기억이 될 걸세. 나는 이만 가겠네. 잘 가시게.”
청운과 제혼마검은 자기 앞에 놓인 마지막 잔을 기분 좋게 들이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칠팔 명의 장한들이 순식간에 천막을 걷어 내며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정리했다.
잠시 후 그들이 술잔을 기울였던 자리를 여옥산의 깊은 밤이 재빨리 차지했다.
* * *
길이 정해지기 전에는 정해지지 않았기에 초래되는 혼란과 갈등이 있고.
길이 정해지고 난 후에는 정해졌기 때문에 야기되는 혼란과 갈등이 있다.
실재의 길은 한차례의 가시밭길이 끝나면 당분간 탄탄대로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삶의 길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시밭길 뒤에 또 다른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삶의 성공과 실패는 그 연이은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운은 소림의 무여대사와 화산의 육검자가 피살된 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天과의 단절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天이 그런 방식으로 그들에게 보복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더 혼란한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청운은 우선 사건의 경위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태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배경을 정확히 알면 대응도 정확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처음부터 다시 사건의 전모를 차분하게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문제는 天이 다시는 그런 짓거리를 함부로 저지르지 못하도록 철저히 그리고 단호하게 응징하는 일이다.
비무라는 형식으로 무여대사와 육검자를 살해한 황금면객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 같았다.
청운은 하오문의 총단에 들른 후 황금면객의 정체를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총단이 있는 낙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번쩍하는 한 줄기 서기가 기다란 꼬리처럼 청운의 신형을 뒤따르는 것 같았다.
낙양은 역시 낙양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도성은 오가는 사람들로 대로가 번잡했다.
대로 주변의 점포들은 손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고, 점포에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길을 서두르는 우마차의 행렬이 대로의 대부분을 메우고 있었다.
밤새 여옥산을 넘어온 청운은 몹시 허기를 느꼈다.
청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간단하게나마 아침 요기를 때울 수 있는 객점을 찾아보았다.
손님 맞을 준비에 열중인 객점은 많았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객점은 찾기가 힘들었다.
청운이 조식을 해결하기 위해 낙양의 대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잠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백여 장 정도 떨어진 뒤쪽에서 느닷없이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 소리가 청운의 귀에 들어왔다.
청운이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비명의 진원지에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청운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중원전장> 앞이었다.
사십 대의 한 아낙이 땅에 엎어진 채 땅바닥을 두 손으로 치며 꺼이꺼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 여인을 빙 둘러싼 행인들이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반쯤 열린 중원전장의 문이 왈칵 열렸다.
그리고 삼십 대 초중반 정도의 인상이 험악한 사내 둘이 문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땅바닥에 엎어진 채 흐느끼는 여인에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일부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네 딸년을 구하고 싶거든 돈을 가지고 와라. 돈을… 무작정 생떼를 부려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아침부터 찾아와 재수 없게 난리를 피워.”
막말도 그런 막말이 없었다.
“갚을 능력이 없으면 애초부터 돈을 쓰지 말아야지. 이 재수 없는 년이 남의 피 같은 돈을 생짜로 처먹으려고 하네. 나, 원 참. 아침부터 재수 없게 신성한 남의 영업점 앞에서 울고불고하지 말고 썩 꺼져라.”
청운은 그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네 이년! 한 번만 더 갚을 돈도 없이 전장 앞에 얼쩡거리면 아예 기어 다니지도 못하게 요절을 내버리겠다.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썩 꺼져라!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말고.”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땅바닥을 치며 흐느끼고 있던 여인이 상체를 반쯤 세우고는 표독스러운 눈길로 사내들을 노려봤다.
그 여인의 눈빛을 접한 사내들이 흉흉한 눈빛을 흘리며 여인에게 두어 발짝 다가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사람을 노려보네. 그래, 잘 됐다. 아예 이참에 운신도 못하게 물고를 내주마.”
사내들의 협박에 여인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아! 내 딸이 없는 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없고말고. 어떻게 은자 열 냥이 일 년도 채 안 돼 은자 이백 냥으로 둔갑을 하느냐. 아무리 염왕채라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불어나는 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
“뭐라는 것이냐!”
“이미 원금을 포함해 이자로만 은자 서른 냥을 더 갚았는데도 기어코 생떼 같은 딸까지 빼앗아가다니, 이 날도둑 같은 놈들아! 그러고도 네 놈들이 사람이냐. 인두겁을 쓴 짐승도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네놈들의 승냥이 같은 그 뻔한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
“처음부터 내 딸의 미색에 혹해서 장주 양수탁이 꾸민 일인 줄 내 익히 알고 있다. 그 짐승 같은 놈이 몇 번이나 내 딸에게 치근덕거리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년이 어디서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느냐!”
“허,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이 나와 내 딸을 옭아매려고 그런 수작을 부린 걸 내 모를 줄 아느냐. 당장 내 딸을 내 앞에 내놔라. 내가 이 중원전장의 대문에 목매달고 죽기 전에.”
“저런 미친년을 봤나. 남의 돈을 떼먹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지,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고 패악질을 부려, 부리긴… 내 오늘 네년에게 남의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단단히 가르쳐 주마.”
사내가 여인에게 다가가 막 발길질을 하기 직전.
보다 못한 청운이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사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장 멈춰라. 그 여인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네 놈의 목줄을 비틀어 버리겠다.”
사내가 청운 쪽으로 돌아보더니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흘리며 빈정거렸다.
“아이구, 이 삭막한 낙양 땅에 난데없는 의협이 강림하셨네. 오지랖 넘치게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셔요, 의협님. 자, 의협님 나가신다. 모두 길을 비켜라.”
사내의 빈정거림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청운은 번개처럼 사내의 팔목을 비틀어 잡고는 옆으로 휙 던져 버렸다.
사내는 던진 돌처럼 삼 장 이상을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동료가 당하는 걸 본 전장의 대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제 주제도 모르고 청운의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무작정 달려들었다.
청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자를 향해 일 권을 내질렀다.
콰—지—직
소리와 함께 대문에 처박힌 그 사내는 부서진 문짝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 소리에 전장 안에서 검을 든 칠팔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무리 중에 가장 앞에 달려오던 황의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눈매가 뱀처럼 날카로웠다.
“아침부터 웬 난리냐. 영업 준비하기도 바쁜데 도대체 어떤 놈이 전장의 대문을 부수고 지랄이냐. 흑웅, 네가 설명해 봐라.”
대문과 함게 나동그라져 있던 사내가 끄—응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청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위님,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다짜고짜 저와 강호를 팼습니다. 저기 저 여편네가 아침부터 전장의 대문을 두드리며 패악질을 하길래 쫓아내려고 하는 와중에 저놈이 갑자기 끼어들어 난동을 부렸습니다.”
호위라고 물리는 자가 청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네 놈은 대관절 누구길래 우리 전장의 영업을 방해하느냐. 지금이라도 손괴된 문 값을 물어내고 사죄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