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래도 끝까지 하시겠습니까.
청운과 환제는 일합을 교환한 후 서로 반대쪽에 내려섰다.
청운의 검기와 환제의 창기가 허공에서 충돌하자마자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폭음이 한참이나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 여파로 주변에 있던 밑동이 부러진 나무들과 바위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함부로 처박혔다.
그 바람에 관제묘는 벼락을 맞은 듯 폭삭 허물어지고 말았다.
허공에 자욱했던 잔해들이 가라앉자 장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청운과 환제는 서로 등진 채 오 장여를 떨어져 있다가 다시 몸을 돌려 마주 보며 대치했다.
이번 일 합의 교환으로 청운과 환제 어느 쪽도 크게 손해를 보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청운의 표정이 초식의 교환 이전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고 평온했다.
반면에, 환제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불신과 경악의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머리를 좌우로 몇 번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장내를 뒤흔드는 일성을 토하며 혈마린창을 청운의 요혈을 향해 벼락처럼 찔러 넣었다.
“탈—백—귀—혼.”
환제의 혈마린창에서 때아닌 야밤에 구름처럼 검붉은 마기가 일더니 청운의 신형을 휩쓸어왔다.
그것은 마치 붉은 구름의 환상 같았다.
그의 창끝에서 뭉게뭉게 이는 적운이 아름답기조차 했다.
청운은 그가 왜 환제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의 전신요혈을 향해 쇄도하는 적운의 눈에 차분하게 쾌—타—절—변—회—접—파척의 초식을 연환해 자신의 무영검을 벼락처럼 찔러 넣었다.
퍼—퍼—퍼—엉.
또다시 강맹한 검기와 창기가 두 사람의 중심에서 격돌하자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격돌과 동시에 공중으로 치솟아 허공을 가득 메웠던 돌조각들과 나뭇가지들의 잔해가 투두둑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장내의 풍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청운은 신형을 한차례 휘청거린 후 제자리에 석상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반면에 환제는 비칠거리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았다.
말없는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환제의 눈빛에는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경악이 가득 넘쳐났다.
그는 자신의 불신을 떨쳐 내듯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강하게 몇 차례 흔들었다.
그의 당황하고 일그러진 표정에서 어떤 단호한 결심의 기색이 비치는가 싶더니 그의 입에서 바위를 깨는 듯한 거대한 일성이 쏟아져 나왔다.
“탈—백—만—혼.”
환제가 혈마린창을 청운의 전신을 향해 종횡으로 내려 그으며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적운의 환영이 일순간 장내의 시공간을 장악했다.
그 붉은 구름 속에서 돌연 핏빛의 수실 같은 창기가 청운의 전신요혈을 꿰뚫을 듯이 폭사되어 나왔다.
청운은 또 한 번 그 광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그 핏빛의 수실들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기 바로 직전 무영검으로 적운의 심장을 일도양단해 들어가며 일성을 토했다.
“멸—화—안.”
무영검에서 발출된 자황색의 투명한 검기가 적운이 장악했던 시공간을 하나하나 도려내며 새로운 색깔의 시공간을 만들었다.
청운이 이번에 펼친 멸환은 당연히 과거와 다른 것이었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흡수하면서 각성한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담긴 것이었다.
이미 청운은 검은 시공간을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청운의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적송자의 대천삼검이나 수라마군의 수라겁천이 펼쳐 보였던 경지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그건 바로 깨달음의 차이 때문이었다.
환제의 탈백마혼과 청운의 멸환이 격돌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대패로 사방을 밀어버린 듯 주변이 깨끗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주변에서 사라졌던 것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장내의 모습이 드디어 명료하게 드러났다.
청운은 두어 차례 신형을 휘청거린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에 환제는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주르륵 밀려나 제 발등에 두어 사발이나 되는 피를 울컥울컥 토해 냈다.
그의 몸은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의복은 걸레 조각처럼 찢겨 있었고 온몸의 자상에서 피가 찔끔찔끔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가에 묻은 핏물을 소매로 쓱 닦아 내고는 밤하늘에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청운은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솔방울이 떨어지듯 제 발등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 있던 제혼마검이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툭 던졌다.
“환제께서는 이만 뒤로 물러나시게. 나에게도 기회를 한 번 주시게. 무인으로서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어디서 저런 검을 경험해 보겠나. 내 마음은 이미 기울었지만 내 타오르는 호승심은 나도 어쩔 수 없네.”
제혼마검이 청운을 돌아보며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자네의 검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경지네. 이 강호에서 환제를 저렇게 궁지에 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 나이에 벌써 시공간을 그 정도로 이해하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네.”
“…….”
“수라마군의 안목은 마련에서도 최고인데 자네에 대한 평가는 틀려도 한참이나 틀린 것 같네. 아니면 그사이에 자네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이미 자네 편이네. 이 비무는 단지 내 호승심 차원임을 알아두게.”
“네.”
“나는 자네가 환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네. 그 점 고맙고도 섭섭하게 생각하네. 자네가 펼친 마지막 초식이 ‘멸환’이라고 했던가? 정말 난생 처음 보는 대단한 초식이었네. 그다음 초식도 있는가?”
그의 말에 청운이 긍정의 고개를 끄떡일 때, 제혼마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기뻐하면서도 당황하는 표정이 스치는 걸 청운은 알아챘다.
제혼마검이 청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하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부디 나에게는 최선을 다해 주게. 아껴두었던 마지막 초식도 보고 싶네. 그게 나에 대한 예우일세. 사설이 너무 길었던 것 같네. 나도 삼 초로 하겠네. 자, 시작하세.”
현 무림의 최강자 중 한 명이라는 마련주가 제혼마검을 빼들고 청운과 대치했다.
대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심히 청운을 건너다보던 그가 제혼마검을 뽑아 들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제혼마검에서 사람의 혼을 제압하는 것 같은 짙푸른 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아니, 그 마기는 제혼마검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거꾸로 대기 속에 존재하고 있던 마기가 검 끝에 맺히는 것 같았다.
거의 삼 장 가까이 되는 푸른 마기가 그의 검 끝에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짙푸른 마기와 한 시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운은 내기가 살짝 진탕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즉시 치우전륜공을 끌어올리며 마기에 저항했다.
그제야 혈기가 다시 편안해졌다.
마련주 여우성은 이미 주변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청운은 마련주가 자신이 강호에 나온 이래 대적하는 최고의 강자라고 확신했다.
청운은 무영검에 치우전륜공을 주입하면서 무조건 전력을 다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청운의 무영검에서도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삼 장 가까이나 사방연속무늬처럼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청운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혼마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청운은 받았다.
그만큼 마련주도 청운의 진정한 무위에 경악하고 있었다.
마련주 여우성은 득의만면의 미소를 머금은 채 제혼마검을 가슴 앞에 들어 올렸다.
청운도 무영검을 가슴 앞쪽에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출수할 준비를 했다.
마련주가 청운에게 먼저 출수하라는 의미의 턱짓을 했다.
그 순간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쾌—타—절—변—회—접—파척의 초식을 창조적으로 연환해 전개했다.
환제를 상대할 때와 같은 초식의 연격이었으나, 그 바탕에 실린 힘과 시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무영검에서 발출된 수백수천 가닥의 투명한 자황색 검기가 직선과 곡선, 점과 선 그리고 면을 동시에 그리며 마련주의 전신요혈을 향해 폭사되었다.
곧바로 마련주의 입에서 일성이 토해졌다.
“제—혼—종—횡.”
제혼마검에서 발출된 짙푸른 마기가 무영검에 뻗어 나온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서로의 정중앙에서 맞부딪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발출한 검기에 휩쓸린 주변의 모든 물체들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벗겨진 땅거죽이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우박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놀랍게도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 흙덩이들은 제혼마검과 청운의 호신강기에 다시 튕겨져서 사방으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청운과 마련주는 지면 위에 두 척 정도 떠 있는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의 표정에서 상대의 무위에 대한 놀라움과 경탄이 가득 묻어났다.
서로의 무위에 대해 서로가 인정을 하듯 상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련주가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옆에서 볼 때와 직접 맞상대하니 또 다른 차원이군. 최선을 다한 것인가?”
청운이 마련주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력을 다 했습니다.”
마련주가 빙그레 웃더니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고맙네. 이제 이 초가 남았네. 나머지도 최선을 다해주게. 나도 최선을 다하겠네. 그게 무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일세. 이번엔 내가 먼저 시작하겠네.”
마련주가 제혼마검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소리쳤다.
“제—혼—묵—로.”
마련주 여우성이 허공에서 양손을 순간적으로 교차하듯이 제혼마검의 검기를 청운을 향해 떨쳐냈다.
수백수천 가닥의 짙푸른 벼락이 청운의 전신을 짓이길 듯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청운도 무영검을 허공의 심장으로 찔러 넣으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청운의 입에서 장내를 뒤흔드는 일성이 토해졌다.
“며—으—ㄹ—화—안.”
제혼마검의 벼락처럼 짙푸른 검기와 무영검에서 쏟아진 유성의 혀 같은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검기의 범위에 노출된 수십여 장 안의 대기가 통째로 파열하는 듯한 굉음이 여옥산 전체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청운과 마련주는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수십여 장이나 뒤로 밀렸다가 간신히 신형을 바로 세우고는 땅 위에 동시에 착지했다.
마련주 여우성의 얼굴에는 경악과 당황을 넘어 불신의 표정이 가득 내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어떤 만족의 웃음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마련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운이 운을 뗐다.
“련주님, 이제 마지막 일 초가 남았습니다. 이 마지막 초식은 제가 아직 완전히 깨우치지 못해서 제 의지로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저로서도 전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