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드디어 왔는가?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온몸으로 물속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채만 한 뭔가가 강심을 거슬러 적벽 근처로 올라오고 있었다.
‘드디어 왔는가?’
청운은 극황지감술로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자연물의 일부로 숨겼다.
바짝 긴장한 채 수면의 기러기를 바라보고 있던 한순간, 밤의 밤 같은 거대한 아가리가 수면 위의 기러기를 삼키기 위해 주둥이를 수면 위로 불쑥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낚싯대를 번개처럼 낚아챘다.
자신이 뭔가에 걸렸다고 느낀 거대한 괴수가 몸부림을 쳐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오금죽으로 만든 낚싯대가 부러질 듯 휘청였다.
괴수가 몸을 뒤틀 때마다 수십 장 높이의 파도가 때아닌 밤의 적벽의 바위를 사정없이 때렸다.
강물을 흠뻑 뒤집어쓴 청운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직감했다.
온몸으로 팽팽하게 전해 오는 그 무게감은 마치 강물 속에 빠진 보름달이라도 걸린 느낌이었다.
한참을 괴물과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던 청운은 괴물이 잠시 힘이 빠져 주춤하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금죽으로 된 낚싯대의 뒷부분을 적벽의 바위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괴물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후 무영검을 빼든 청운이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청운의 눈앞에 집채만 한 만년화리가 보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만년화리가 온몸으로 강심을 뒤틀며 요동을 치고 있었다.
청운은 귀수하백이 준 책자에서 익힌 수공을 전개해 내단이 있는 만년화리의 배꼽 쪽으로 다가가자마자 그대로 만념하리의 배를 갈랐다.
만념화리의 핏물이 청운의 시야를 운무처럼 가렸다.
하지만 그 핏물의 운무 속에서도 환하게 보였다.
누렇고 붉은 주먹만 한 만년화리의 내단이 청운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청운은 곧장 만년화리의 내단을 오른 손으로 뜯어내어 꿀꺽 삼켰다.
수면을 박차고 튀어나온 청운은 묘묘보허 신법을 극한으로 전개해 물마루와 물마루를 바람처럼 밟으며 적벽에서 낚시를 시작하기 전에 봐둔 십여 리 떨어진 산봉의 동굴을 향해 번개처럼 내달았다.
온몸에 불이 도는 것 같았다.
미증유의 열기였다.
서둘러야 했다.
동굴 속에 들어서자마자 청운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청운은 설산의 빙하계곡에서 얻은 빙하기의 구결로 만념화리 내단의 열기를 단전에서부터 십이경락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붉은 성운이 청운 전신을 감싼 채 소용돌이처럼 휘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다 산 유성우가 마지막 뼈를 태우며 청운의 좌우로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연꽃 같은 우주의 불꽃 속에 지그시 눈을 감은 청운은 자신의 옷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마저 잊은 채 우주의 열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용암 같은 뜨거운 열기가 백회열을 지나 회음혈을 거쳐 용천혈까지 끊임없이 돌고 돌았다.
청운은 영과 육의 바닥마저 태울 것 같은 화구 속 같은 열기를 격렬하게 견디며 죽을힘을 다해 삼 일 밤낮을 꼬박 대주천과 소주천을 되풀이했다.
* * *
새로운 깨달음이 왔다.
바짝 메마른 땅에 물줄기가 흐르듯 새로운 자각과 각성이 청운의 내면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깨우침의 물줄기는 두 개의 지류를 만들었다.
하나는 너무 익숙해서 청운의 몸이 친척을 반기듯 했고, 다른 하나는 너무 낯설어 이방인을 보는 듯했다.
한 줄기는 과거 자신을 일깨웠고, 다른 한 줄기는 현재의 자신을 뒤흔들며 요동쳤다.
청운의 몸속에서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서로를 부정하며 맹렬하게 충돌했다.
과거는 현재를 불안해했고 현재는 과거를 백안시했다.
한참을 서로 치고받던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힘이 다 빠지고 나서야 서로는 어렵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서로를 체념하면서 그 둘은 간신히 서로의 손을 그러잡았다.
그 힘든 악수는 바로 청운의 새로운 깨우침이고 미래였다.
그 새로운 깨우침은 청운 자신을 구속하던 과거의 깨달음을 깨부수며 다른 깨달음을 연이어 불러왔다.
청운은 반복되는 깨달음 속에서 지난번 깨달음과의 차이를 매순간 발견했다.
그 차이를 매개로 청운은 또다시 새로운 깨달음의 차원으로 진입했다.
새로운 깨달음은 늘 보아 왔던 것을 다르게 볼 때 불현듯 찾아왔다.
그것은 늘 보면서도 못 보는 것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청운 자신 속에 있었기에, 그리고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더욱 보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이 올바른 정도라고 쌓은 벽을 부정하고 깨부수어야 간신히 보이는 틈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부정해야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는 미로 같은 길이었다.
앞의 길이 끊어진 곳에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그동안 청운이 그토록 갈구하던 검로와 초식이 두서없는 새싹처럼 사방에서 움트고 있었다.
누구든지 자신만의 검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숱한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다음에 있는 거기까지의 움직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영육을 바쳐 그 길을 닦아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초식의 끝이 검로의 끝이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초식과 검로의 끝까지 가 본 사람들은 거기서 검로의 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검로를 만들어 낸다.
초시과 검로는 그렇게 반복된다.
때문에 진정한 초식과 검로는 상대의 검로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재창조되는 끊임없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떤 성취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실수와 실패가 쌓이고 쌓여 겨우 이룩되는 것이다.
그 지난한 과정을 계속 딛고 일어설 때 비로소 자신의 검이 조금씩 완성된다.
때문에 검로와 초식도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검로와 초식은 출수하기 전에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매번 출수에서 납검의 과정에서 구성, 재구성되는 것이다.
검로와 초식을 전개하기 전에는 출수하는 자신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은 전개의 과정 속에만 존재한다.
검로와 초식은 전개할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 주변의 상황과 자연스럽게 담겨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검은 똑같은 순간, 똑같은 초식을 전개하더라도 그 초식을 상대하는 모든 상대가 제각각 자신의 약점에 따라 똑같은 초식을 다르게 느끼고 다른 궁지에 몰려 자신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검로와 초식은 부분적이면서 전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초식에는 완벽한 검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백의 덩어리를 조율하는 것에 가깝다.
진정한 검로와 초식은 주변의 시공간을 전부 환기해서 새로운 순간을 계속해서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상대는 예상치 못한 뜻밖의 시공간을 맞이하고, 알고도 대처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고 만다.
때문에 완벽한 검이란 애초부터 없다.
완벽한 검이란 자신의 머릿속에 오해와 착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초식은 초식 이전에도 없고 초식 이후에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검은 일순간 성공이 아닌 지속적인 성장의 이야기다.
내가 전개하는 모든 초식은 내 검으로 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청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깨달음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면 한낱 착각이고 망상일 뿐이다.”
“새로운 경지는 항상 새로운 차원을 생각하는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다.”
* * *
내단의 순수한 열기가 전신의 세맥까지 녹아 있던 탁기를 모두 태울 때까지 청운은 운기행공을 계속했다.
꼬박 사흘간의 운기행공으로 만년화리의 내단을 거의 대부분 녹여 낸 청운 나흘째 접어드는 날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연보다 더 깊고 깊은 청운의 눈빛에 은은한 서기마저 감돌았다.
청운은 동굴을 나와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십여 리 이상 떨어진 적벽의 풍경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청운은 사람이 기연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연이 사람을 선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청운이 표묘보허를 전개해 오십여 장 정도 떨어진 화감암의 암봉 아래 사뿐히 날아 내렸다.
“모든 만물은 유무상생하여 그 자체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있다고 바라보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바라보면 없는 것이니…….”
청운은 수중동굴에서 구무자의 심득을 통해 자신이 창안한 멸환겁의 구결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양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순간 청운의 양 손목에서 번갯불보다 더 빠른 자황색 환의 빛무리가 번쩍하며 암봉의 옆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운은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머금고는 몸을 돌려 곧바로 신법을 전개해 암봉을 떠났다.
청운이 떠나자마자 그 둘레가 거의 삼십여 장이 넘는 암봉의 윗부분이 두부처럼 잘려져 통째로 산정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적벽의 강바람을 등에 업은 청운이 어둡고 어두운 강호를 향해 경신술을 전개했다.
바람의 결을 헤집는 청운의 신형을 따라 한 줄기 서기가 기다란 성운의 꼬리처럼 이어졌다.
* * *
어느새 봄이 완연했다.
길섶마다 나무들은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자신의 꿈인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지마다 연초록의 새순을 밀어 올리며 곤한 꿈을 꾸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색의 단출한 무복에 죽립을 눌러 쓴 이십 대 중후반의 한 청년이 걸음걸음 깊어지는 봄의 표정을 즐기며 성큼성큼 관도 위를 걸어가고 있다.
그 청년의 발걸음은 지면이 아니라 지면 바로 위의 공기층을 밟고 가는 것처럼 한없이 가볍고 경쾌했다.
이따금 죽립을 젖히고 자신이 넘어야 할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은 봉우리 위의 걸린 하늘보다 더 깊고 푸르다.
그 청년은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적벽을 떠나 하오문의 총단으로 가는 중이었다.
청운이 적벽에서 회수한 오금죽과 천잠사와 자하신철을 하오문의 비고에 보관하기 위해 막 형주분타로 향해 가던 중에 분타주 양춘호를 만났다.
그는 청운에게 문주 서소지의 서찰을 건넸다.
내용은 낙양에 있는 하오문의 총단에 한 번 들러달라는 것이었다.
청운은 오금죽과 천잠사와 자하신철을 양춘호에게 맡기고는 곧바로 낙양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으나 청운의 신법으로도 삼사일이 족히 걸리는 길이었다.
중간중간 몇 개의 제법 높은 산도 넘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청운은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근처 객점에서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여옥산을 넘을 계획을 세웠다.
도성이 아닌 산자락 아래에 있는 객점들이 대개 그러하듯 <창룡루>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객점은 이름 빼고는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청운은 점소이에게 오리구이와 소홍주 한 병을 시킨 후 즉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저녁때여서 그런지 이 층에도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렸다.
청운은 가장 안쪽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대충 둘러보니 무림인들도 제법 있었다.
청운과 반대쪽 창가에 앉은 네 명의 사내들이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