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03화 (103/184)

103화 그렇게 소환한 저주의 힘으로.

한족과 마족 간에 얽히고설킨 지독한 겁난이 끝나면 중원은 곧바로 마족을 잊었으나, 마족은 단 한 번도 중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천여 년 전 마족들은 최종적으로 십만대산으로 숨어들어 멸족하고 말았다고 [만기편람]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마족의 마령실인이 모용세가에 나타나다니, 청운은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는 그 누구의 삶도 안타깝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마족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증오, 분노, 살의, 절규, 좌절, 혼돈이 마족을 탄생시켰기에 마족의 존재 자체를 적대시해선 안 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하지만 마족 자체를 적대시하지 않는 것과 오랫동안 잠든 마족의 저주를 깨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전자가 인간 삶의 근본 윤리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인간 삶의 토대 자체를 파괴하는 겁난에 관련된 것이다.

청운은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마령실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리 찾으려고 노력을 했으나 찾지 못했던 天이 저지른 사건의 연결고리 하나를 찾은 느낌이었다.

천과 재천신교 그리고 파황군까지.

마족을 그들의 관계에 끼워 넣으면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그들의 사이하고 요사한 무공까지 모두 이해가 되었다.

청운은 모용세가에 대충 경고만 하고 떠나려고 했던 최초의 마음을 접었다.

이참에 아예 모용세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기로 작정했다.

청운은 이 장로 모용주를 돌아보며 일갈했다.

“요녕의 패자인 당신네 모용세가가 무엇이 아쉬워 수천 년 깊이 잠든 마족의 저주까지 깨운 것이오.”

모용주가 광소를 터트리며 청운을 빈정거렸다.

“으—하—하—핫. 네 놈은 정말 바보로구나. 그걸 꼭 내 입으로 설명해야만 이해한단 말이냐.”

“…….”

“모용세가의 위상을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강호에 우뚝 세우는 것, 바로 묘용세가의 군림천하가 우리 모용가의 오래된 꿈이다.”

모용주의 말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청운이 한심하다는 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네 세가는 정신은 빼놓고 거죽만 있는 것이오. 그렇게 소환한 저주의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유린하면, 어젠가는 자신들 또한 상대에 의해 파괴되고 유린당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것이오.”

“뭐라?”

“내가 누군가를 짓밟고 군림하면 그 누군가는 그만큼 자신의 삶이 망가지는 것이오. 그래서 그들 또한 당신네 세가를 향해 그 이상의 증오와 복수심을 키운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이오.”

“…….”

“진정한 군림천하는 타인의 존중과 감복으로 성취하는 것이지 금지된 힘으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오. 참으로 안타깝구료.”

청운의 비난에 노발대발한 모용주가 꽥 소리를 질렀다.

“저, 저런 오만방자한 놈을 봤나.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따위 망발을 내뱉느냐. 네 놈이 요즘 강호에서 제법 무명을 날린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

“네 놈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천하에 군림하려는 우리 모용세가의 오래된 꿈을 꺾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대계는 거의 완성 직전이다.”

청운은 그 말을 듣고 그들의 목표는 헛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모용주는 말을 이어 갔다.

“우리 모용가는 군림천하의 수단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력이건 문화적인 것이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군림하고 나면 결국 천하는 우리 모용가를 떠받들 것이다. 그게 강호의 오래된 법칙이다.”

청운은 만면에 비웃음을 가득 피워내며 한 번 더 흥분한 모용주의 의표를 슬쩍 찔러 갔다.

“당신네 세가가 마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강호에 소문이 나면 모용세가가 무사할 것 같소. 게다가 모용가주가 天會의 회주인 것이 밝혀지면 모용세가는 무림의 공적이 될 것이오.”

모용주가 뱀처럼 징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잔뜩 흘리며 이죽거렸다.

“네놈이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게 틀림없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문도 네 놈이 이곳에서 죽지 않아야 나는 것이지. 네 놈에게는 영원히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용주는 자신만만해 하며 말했다.

“네 놈이 여기서 죽으면 강호의 어느 누구도 우리 모용가가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 대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전혀 모를 것이다. 네놈은 네놈 목이나 길게 빼고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청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흥분한 모용주가 청운의 슬쩍 찔러본 도발에 걸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비밀을 누설한 것이다.

모용주는 아직도 자신이 무슨 비밀을 누설했는지조차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역시 짐작대로 연공실의 편지에서 본 ‘艹’는 모용성慕容盛의 초성이었다.

그러면 상제를 지칭하는 ‘口’또한 누군가의 초성일 확률이 높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자신이 격장지계에 빠진 줄도 모르고 비밀을 누설한 모용주의 안이한 방심으로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된 청운은 기분이 좋아져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청운의 표정에 지어진 의미 모를 미소에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모용주는 분기탱천해 철혈대주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요즘 강호에서 이름을 좀 날린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여기는 네놈이 나대고 다니는 그 어쭙잖은 강호와 모용세가가 어떻게 다른지 내 오늘 네놈에게 똑똑히 보여주마.”

말을 마친 모용주는 곧바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광혼철혈대는 뭐 하느냐! 저놈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당장 저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지 않고. 즉시 공격해라.”

모용주의 명령을 받은 철혈대주가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에 높이 들었다 내렸다.

그러자 마령인들이 청운은 회回자 형태로 두 겹으로 포위했다.

마령실인들이 청운이 움직일 수 있는 삼십육 방위를 모조리 차단해 버렸다.

마령인들은 실혼인의 오 장여 떨어진 뒤쪽에 도열했다.

마령인들이 도를 들어 기수식의 동작을 취하자, 실혼인들이 일제히 거대한 언월도를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곧이어 뒤에 선 마령인들은 마치 저 혼자 무예를 수련하듯 이리 뛰고 저리 날며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에 있는 실혼인들이 마령인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며 청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령인들이 손발을 놀리는 대로 실혼인들이 손발도 똑같이 움직였다.

철편 꿴 무거운 옷을 입었음에도 실혼인의 동작은 번개 같았다.

바로 그 점이 마령실인과 일반 강시의 다른 점이었다.

일반 강시들은 몸은 쇠처럼 단단하지만 상황에 대한 인지 능력이 없기에 동작이 획일적이고 상황에 따른 대처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다.

반면에, 마령실인들은 강시처럼 단단한 몸에다 무림의 절정 고수급이 가진 유연성과 임기웅변 같은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마령실인의 공세에 대처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 어지간한 보검이 아니라면 그들의 몸에 흠집 하나 내기 힘들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상대의 다음 공격을 예상해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해 상대의 공세를 요리조리 벗어나는 능력이 미꾸라지 같았다.

청운은 실에 감겼다 풀어지는 팽이처럼 신형을 회전시키며 쾌—타—절의 초식을 연환해 자신을 향해 사위에서 짓쳐들어오는 실혼인들을 향해 무영검을 내질렀다.

까—까—까—깡—까—앙.

무영검과 실혼인의 단단한 몸이 부딪치자 장내에는 때아닌 쇳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듣는 사람의 오장육부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였다.

청운은 그 쇳소리가 듣기에 몹시 거북했다.

그 듣기 싫은 쇳소리보다 더 청운을 놀라게 한 것은 마령실인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청운이 거의 팔성의 치루전륜공을 끌어올려 실혼인을 타격했으나, 실혼인을 겨우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게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실혼인의 언월도와 부닥친 무영검을 타고 오는 강맹한 경기에 팔이 가볍게 저려옴을 느꼈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아예 십성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무영검이 우—웅 하며 검명을 토하더니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이장 이상이나 일렁거렸다.

청운의 엄청난 무위를 본 모용주와 철혈대주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에서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청운은 일부러 묘한 웃음을 한 번 지어 보였다.

청운은 자신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실혼인을 향해 일검을 내지른 후, 솔개처럼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청운은 일검으로 실혼인을 멀찌감치 떼어낸 후 묘묘보허로 실혼인을 타 넘어 뒤에 있는 마령인을 공격해 싸움을 빨리 끝장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청운 혼자만의 일방적인 오산이었다.

앞줄에서 청운을 공격하던 실혼인들이 우르르 나뒹굴자마자 이선에서 청운을 포위하고 있던 실혼들이 청운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따라 치솟아 언월도를 맹렬하게 휘두르며 허공에 뜬 청운을 몰아세웠다.

온몸을 철편으로 감싼 그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실혼인들이 그렇게 높은 허공까지 치솟자 청운은 잠시 당황했다.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마령실인의 능력에 청운은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 마물들을 상대해야 할지 좀 난감하기도 했다.

청운은 백두산의 무영문 석실에서 습득한 묘묘보허의 후반부 신법을 펼치며 더 높은 허공으로 용오름처럼 치솟았다.

청운은 허공에 뜬 채로 실혼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마령인들을 향해 쾌—타—절—변—회의 초식을 연격으로 내질렀다.

비록 허공에 뜬 채로 전개한 공격이라 땅에서 펼친 것과는 그 위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청운의 검세가 워낙 강맹해서 마령인 열댓 명이 던진 돌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청운은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그 정도의 강렬한 공격이면 최소한 마령인들 중 최소한 반 이상을 처치할 줄 알았다.

마령인들은 철편으로 짠 갑옷을 입지 않아 그 정도의 공격이면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청운의 생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마령인들은 단지 실혼인들을 조종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신체 또한 실혼인에 못지않게 단단했고 무공의 수위 또한 최소한 절정 이상이었다.

청운은 오히려 그들의 동작은 실혼인들보다 훨씬 더 민첩하기에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새가 아닌 이상 허공에 계속 떠 있을 수는 없었다.

청운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앞줄에 있던 실혼인들이 무거운 언월도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우르르 달려들었다.

청운은 더 이상 이런 소모전이 싫었다.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이 지랄 맞고 짜증나는 싸움에 대한 다른 구상을 마친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청운은 자신을 둘러싼 밤의 대기를 베듯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선 실혼인들을 향해 자황색의 투명한 검기가 이장 이상이나 일렁거리는 무영검을 종횡으로 그어 내렸다.

쿵, 쿵, 쿵, 쿵!

무영검의 검기에 격타당한 이십여 구의 실혼인들이 강풍에 짚단이 쓰러지듯 뒤로 날아가 이곳저곳에 처박혔다.

그 찰나의 순간에 청운은 무영검을 납검함과 동시에 품속에서 무누적, 아니 신단적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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