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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98화 (98/184)

098화 그리움이 만든 분노

퍼붓는 눈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자신을 감추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백색의 시간을 거스른다.

피풍의에 죽립을 쓴 한 젊은 사내가 태산 근처의 산길을 폭설 속의 희끗희끗한 침묵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내는 무슨 상념의 무게가 그리 무거운지 마치 폭설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있는 대로 푹 숙인 채 눈발이 휘몰아치는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살짝만 발끝을 얹어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도 그의 발자국은 거의 찍힐 듯 말 듯 눈 위를 가볍게 스치듯 흐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젊은 사내가 왼손을 들어 죽립을 살짝 젖히고는 눈이 퍼붓는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폭설 속에서 살짝 엿보인 그의 눈빛이 심연처럼 깊고 심원했다.

그 젊은 사내는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사천당문을 나와 지금 백두산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곤륜선인의 말처럼 天을 본격적으로 상대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백두산에 있다는 무영문의 흔적이라도 찾아봐야겠다고 청운은 마음을 먹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은 날씨가 꽤 좋았었다.

백두산까지 이르는 여정의 거의 반 이상을 온 태산 근처를 지날 때쯤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이른 오전이어서 청운은 하루 만에 금방 태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산의 산길에 들어선지 채 두 시진도 안 되어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

낭패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내일 날씨가 오늘의 날씨보다 더 좋아질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청운은 산속에서 잠시 쉴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행여 있을지도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술 두 병과 건포를 넉넉하게 준비했다.

청운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솟은 절벽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폭설이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바위가 보였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마치 눈 속에서 토끼를 찾아낸 솔개처럼 날아갔다.

과연 그 절벽 밑에는 쉴 만한 곳이 있었다.

깎아지른 경사진 사면으로 인해 그곳은 눈발도 비껴 내리는 곳이 많았다.

좌측으로 이십여 장 떨어진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하나 보였다.

맞춤하게도 동굴 전면에 커다란 바위와 노송 몇 그루가 버티고 있어서 안에서는 밖을 잘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동굴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 이점도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청운은 눈을 털어 낸 피풍의를 뒤집어 보료처럼 바닥에 깔았다.

청운은 태산 초입의 객점에서 산 술과 건포를 꺼냈다.

그리고 병을 들고 술을 몇 모금 마시며 건포를 손으로 찢어 입속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이런 날의, 이런 순간도 꽤 운치가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폭설은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도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눈만 보이고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설산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제 일 년이 조금 지났으니 다시 그녀를 보려면 앞으로 이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녀 배 속의 아기는 이미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그녀를 닮았을까 나를 닮았을까.

청운은 딸이니 당연히 자신보다 그녀를 쏙 빼닮았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그녀와 딸이 너무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니 더 보고 싶어졌다.

폭설을 헤치고 당장 설산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유라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궁 밖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애틋한 설산의 추억에 잠긴 채 멍하니 퍼붓는 폭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가 청운의 귀에 들렸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약해 들리지 않는 듯 간신히 들렸다.

청운이 청력을 최대한 돋우었다.

청운은 폭설 내리는 소리와 폭설에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를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소리의 발원지는 청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동북방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청운은 갈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청운은 결국 그곳에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폭설 속에서 산 한쪽이 거짓말처럼 불타고 있었다.

또한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는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상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주변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평소 산길을 지나는 과객을 급습해 돈과 귀중품을 빼앗던 산채의 산적들이 오늘은 거꾸로 급습을 받고 있었다.

청운은 산채를 급습한 자들이 관군인가 싶어 안력을 돋우어 살펴보니 아니었다.

산채를 급습한 자들은 전부 흑의에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잘 훈련된 살수들처럼 깨끗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살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련된 살초에 산채의 산적들이 흑의인들보다 숫자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적의를 입고 커다란 대감도를 휘두르고 있는 단 한 사람만이 십여 명의 흑의인들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전혀 밀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대감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기는 엄청났다.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가 도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흑의인들이 그 자리를 메우며 그를 공격했다.

아무래도 싸움의 승패가 곧 결정이 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산채의 오른쪽 바위 위에서 대단한 고수로 보이는 네 명의 갈의인들이 장내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가만히 서 있는데도 잘 벼린 칼 같은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오늘 산채를 급습한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들 같았다.

그들이 싸움판에 가세하면 금방 승패가 판가름 날 것 같았다.

청운은 괜한 남의 싸움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조금 전 자신이 있었던 동굴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막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별안간 아이와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흑의인들 중 일부가 산채의 한쪽 구석 토굴에서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부녀자들을 굴비 엮듯이 엮어서 끌고 나오고 있었다.

족히 오십여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아이와 여인의 비명은 바로 그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흑의인들은 아이와 부녀자들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채 그들을 인질로 대감도를 휘두르는 중년인을 협박하고 있었다.

흑의인들의 험악한 겁박에 그 중년인이 잠시 갈등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흑의인 중 하나가 무리 속에서 갓난쟁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더니 사정없이 여인의 목을 쳐버렸다.

젖먹이는 제 엄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악착같이 제 어미의 젖을 빨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청운은 온몸의 피가 갑자기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들이 산적들의 피붙이일지라도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힘없는 젖먹이가 딸린 어미의 목을 자르다니.

저들은 산적보다도 더 잔인무도 자들 같았다.

청운은 백여 장이 넘는 거리를 번개처럼 날아가 조금 전 여인의 목을 자른 흑의인을 단칼에 쳐죽이고는 분기에 가득 찬 일성을 토해 냈다.

“아무리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비정한 무림의 칼부림판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법. 아무런 저항 능력도 힘도 없는 아이들과 아녀자를 함부로 죽이다니, 그것도 젖먹이가 딸린 애 엄마를!”

청운은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말을 이어 갔다.

“너희들은 뼛속까지 악에 물든 자들이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흉신악살이구나. 지금 당장 자신의 한쪽 팔을 자르고 물러나면 내가 선처를 베풀겠다.”

“…….”

“지금부터 셋을 셀 동안 결정해라. 내가 숫자를 다 세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나에게서 어떤 자비도 기대하지 마라. 하—아—나, 두—우—울, 세—에—.”

청운이 숫자를 채 다 세기도 전에 흑의인 십여 명이 청운을 협공했다.

청운은 도저히 반성이라고는 모르는 그들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강호에 출두한 이후 처음으로 무지막지한 살검을 전개했다.

“으—악.”

“으—으—악.”

“아—아—악.”

“악—악.”

돌연 십여 개의 단말마가 혈화를 뿌리며 폭설 속에 나뒹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청운을 향해 달려들던 흑의인 십여 명이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에 휩쓸리자마자 한 마디 외마디 비명으로 자신의 잔인했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청운은 자신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인정사정없이 도륙했다.

청운은 속으로 작심했다.

저자들은 이 세상을 함께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청운의 검이 이토록 잔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운의 흑의는 흑의인들의 피로 염색이 되다시피 했다.

청운이 싸움판에 개입하고 나서자 그 즉시 장내의 상황이 돌변했다.

산채의 오른쪽 바위 위에서 장내를 주시하던 갈의의 사내들이 폭갈을 터트리며 청운 앞에 날아 내렸다.

“네 놈은 대관절 누구이기에 남의 싸움판에 끼어들어 분탕질이냐. 무위를 보니 무명소졸은 아닐 터. 네놈의 명호를 대라. 왜 난데없이 우리 귀현곡의 일을 방해하느냐.”

청운이 입가에 얼음보다 더 냉랭한 한 가닥 냉기를 베어 물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귀현곡의 살수들이었군. 그래서 이렇게 손속이 잔인무도했구나. 그럼 네 놈들은 세상에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귀현사살이겠구나. 나는 오늘 네놈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잘 들어라. 내 이름은 강청운이다.”

“무위검!”

청운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귀현사살은 그렇게 외치며 대경했다.

그들은 자신들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뒤로 몇 걸음 비칠비칠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노호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청운을 공격했다.

그들은 청운이 움직일 수 있는 네 방위를 차단하면서 협공을 했다.

그 순간 청운은 제자리에서 휘리릭 자신의 몸을 틀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갑자기 공격 목표를 상실한 귀현사살의 검이 공허하게 허공을 찌르는 순간.

무영검에 발산된 투명한 자황색의 성운이 마치 유성우처럼 그들의 전신을 휩쓸었다.

“으—악.”

“으—으—악.”

“악—악.”

“크—악.”

폭설의 무게에 젖어 시나브로 내려앉기만 하던 산채를 한순간 들썩거리게 하는 네 마디 단말마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귀현사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이백여 장 정도 떨어진 왼편의 송림 속에서 갑작스레 불화살 한 대가 치솟더니 살수들이 일제히 장내에서 몸을 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귀현곡의 살수들을 혼비백산케 달아나게 한 것은 청운의 단 일 초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 초처럼 보이는 여러 초식이 연격된 여러 초식이었다.

귀현사살이 청운이 움직일 네 방위를 미리 차단하면서 공격했을 때, 청운은 유일하게 비어 있는 방위인 허공으로 신형을 띄운 채 쾌—타—절—변의 초식을 연환해 일검을 내질렀다.

그러니까 귀현사살은 일 초처럼 보이는 청운의 연격된 다섯 초식에 즉사한 것이었다.

청운은 자신의 바로 발밑에서 나뒹구는 귀현사살의 시체를 분노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천지가 제 것인 양 나대며 악행을 저지르던 그들이 마치 솜씨 좋은 사냥꾼에게 도륙당한 짐승처럼 널브러진 모습에 청운은 기분이 몹시 침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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