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96화 (96/184)

096화 그들은 오직 자신의 문파에만 속했다.

“그 곡괭이가 바로 자하신철일세. 가져가게. 내가 다시 새로운 곡괭이를 하나 만들려면 아마 한 십 년쯤 더 걸릴 것이네. 그동안 저 채마밭은 돌 곡괭이로 가꾸어야 할 것 같네.”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가 하산하는 즉시 나도 짐을 꾸려 전진파에 좀 다녀오려고 하네. 아무래도 삼계를 열려는 무리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전진파와 협력해서 미리 준비를 좀 해둬야겠네.”

청운은 일부러 신법을 전개하지 않고 천천히 하산했다.

곤륜선인이 하산하는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생각지도 않은 눈물이 자꾸만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결국 뒤돌아보지 못했다.

아니,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었다.

나에게는 내가 가야만 하는 오늘만큼의 내 길이 있기에.

그날이 하필이면 바로 오늘이라고 청운은 자신을 다독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가 떠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슴이 아려올 줄은 몰랐다.

여태껏 스승 없이 홀로 무공을 익힌 자신에게 곤륜선인은 스승 같은 존재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비록 청운이 곤문파에 정식 입문해 그가 가진 곤륜파의 비전을 다 전수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선인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비기를 아낌없이 청운에게 내주었다.

청운은 극황지감술을 채 한 달도 안 되어 거의 다 익히고도 선인과 좀 더 있고 싶어서 일부로 그의 앞에서는 다 못 깨우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곤륜선인도 청운의 그런 속내를 이미 다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이 각박한 강호에서 저런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에 선인을 생각할 때마다 청운은 눈물부터 먼저 나오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

* * *

청운이 곤륜산을 오를 때 늦가을이었던 계절이 어느새 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의 벌거벗은 나목을 바라보는 단풍들은 더 이상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청운은 곤륜산을 하산하자마자 가까운 표국에 들러 자하신철을 하오문 형주분타로 서신과 함께 붙였다.

서신에는 자하신철로 바늘을 어떤 크기로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상세하게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자하신철을 형주 최고의 공방에 맡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만수귀왕이 보낸 오금죽도 잘 보관하고 천잠사도 넉넉히 구해 두라고 양춘호에게 일러두었다.

기러기도 건강한 놈들로 한 백 마리 잡아서 돌보라고 하면서 은하전장에서 찾은 은자 천 냥을 동봉했다.

* * *

사천의 중심인 청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산대불 앞에 검은 무복에 죽립을 쓰고 피풍의를 걸친 이십 대 중반의 한 청년이 거대한 대불을 올려다보고 있다.

죽립을 살짝 젖히고 대불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민강의 강심보다도 더 깊고 맑다.

그 청년은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곤륜산을 하산하자마자 곧장 사천으로 왔다.

사천으로 오는 동안 청운이 본 것이라고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산과 그 산들이 만들어 낸 협곡과 강뿐이었다.

청운은 수십 개의 산을 넘고 때때로 배를 타고 해서 사천으로 들어왔다.

사천은 마치 만산의 고향 같았다.

산이 고향이고 삶의 터전인 사천인들의 성격은 자신의 주장을 잘 굽히지 않는 외골수가 많다고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첩첩의 산에 둘러싸이고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천인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잘 버리지 않는다고 강호인들은 말하곤 했다.

사천의 패자인 당문은 사천인의 그런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파로 강호에 알려져 있었다.

남만의 오독문과 함께 용독술을 이용한 독기공과 암기술로 강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당문은 무림정의와 가문의 이익이 상반되거나 어긋날 경우에 서슴없이 가문의 이익을 선택한다.

당문은 정파에도 사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사천에 있는 자신의 문파에만 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문파 일이 아니면 강호의 대소사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문파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일에는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당문의 사람들은 독과 암기의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워 혈족이 아니면 절대로 용독술과 암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심지어 가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며느리와 사위에게도 가문의 비전을 전수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문의 성격만큼이나 그들이 사는 전각들도 폐쇄성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담장은 온통 검붉은 벽돌로 두껍게 둘러싸여 있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도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두 명의 무사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온통 붉은색인 대문을 배색으로 대문보다 더 붉은 적의를 입고 있어서 언뜻 붉은 대문에 양각된 붉은 무늬처럼 보였다.

청운이 정문으로 뚜벅뚜벅 다가가자 그들이 돌연 긴장하는 표정을 얼굴에 내비쳤다.

청운이 대문의 오 장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이 손에 헐겁게 쥐고 있던 창을 곧추세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운이 그들에게 이 장 정도를 더 다가가 멈추어 섰다.

청운이 그들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는 하남에서 온 강청운이라 합니다. 귀문의 문주이신 천비천독 당천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안에다 기별을 넣어 주시지요.”

적의의 두 무사는 아연 긴장하더니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둘 중에 좀 더 몸집이 작은 자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혹시 무위검 강청운 소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청운이 그렇게 말하자 그자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창을 동료에게 내맡긴 채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일각쯤 지나자 그자가 다시 안에서 나오더니 청운을 안내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청운은 다소 놀랐다.

당문에서는 자신이 방문할 줄 알고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다.

대전의 태사의에는 오십 대 중반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혈족으로 보이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서 있었다.

대전 앞마당에는 대충 보아도 오십 명이 훨씬 넘는 자들이 이상하게 생긴 무기를 들고 도열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무기는 모도 각양각색으로 달랐으나 허리에는 모두 똑같은 가죽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청운이 장내로 들어서자 대전 앞에 도열해 있던 장한들이 줄의 틈 한쪽을 터주며 청운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때, 태사의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슬며시 일어나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이 그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하자 그가 포권을 취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가 청운의 전신을 발가벗기듯이 훑어보면서 말했다.

“나는 당문을 책임지고 있는 당천이네. 그 위명이 중원 천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강 소협께서 본문에 무슨 볼일이 있어 불원천리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이렇게 왔는가.”

“…….”

“내가 이미 대충은 짐작하고는 있으나 소협의 입으로 그 연유를 직접 듣고 싶네. 말해 보시게.”

그의 말투는 하대도 공대도 아니었다.

한마디 말 안에 하대와 공대가 모두 섞여 있었다.

그런 그의 말투에는 환대와 적대가 교묘히 뒤섞여 있어 듣는 사람이 그의 진정한 의도를 더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심중을 청운에게 끝까지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하대와 공대를 버무린 그를 말투를 쓰는 것 같았다.

현 당문 문주인 당천은 가문의 절기 중의 절기인 만천화우를 극성까지 익혔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풍기는 기도가 은연중에 사람을 압박하고 남음이 있었다.

청운이 치우전륜공을 살짝 운용하자 그 압박감은 금세 사라졌다.

청운이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강호에 그 명성이 드높으신 천비천독 당 문주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마 문주님께서 짐작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天과의 거래를 끊어 주십시오. 그들은 잔혹한 악행을 밥 먹듯이 일삼는 악의 무리입니다.”

청운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들 때문에 오늘도 중원에선 수많은 생목숨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당문 또한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의 마수에 걸려들 것입니다.”

청운의 말을 듣는 내내 헛웃음 짓던 천비천독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의 무리든 그렇지 않든 나는 모르는 일이네.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도 않네. 나는 내가 속한 당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흉신악살과도 거래를 할 수 있네.”

그 말을 들은 청운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천비천독이 말을 이어 갔다.

“당문의 일은 내가 잘 알아서 할 터이니 소협은 우리 당문에 대한 걱정은 끊고 소협 자신의 일이나 잘 돌보시게. 내 말은 이것이 전부네.”

청운은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말했다.

“황금은 언제나 그 값어치 이상을 요구하는 마물이지요. 황금에 눈먼 자들은 돈은 언제나 자신이 벌고 그 대가는 힘없는 사람들이 치르도록 세상의 질서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를 하지요. 문주님, 天은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天과의 거래를 다시 한 번 재고하시지요.”

천비천독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청운을 나무라듯이 말했다.

“재고고 뭐고 내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네. 소협, 당장 당문에서 물러나게. 그러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던 걸로 하겠네.”

“…….”

“당문은 소협이 생각하는 그리 호락호락한 문파가 아니네. 원한다면 당장 시험을 해봐도 좋네. 애들아 강 소협이 나가시게 대문을 활짝 열어드려라.”

청운은 더 이상 대화로서는 그를 설득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일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부류의 소인배였다.

골고루 재수 없는 작자였다.

그의 재미없는 말과 작태에서 들을 것 다 듣고 볼 것 다 본 청운은 결국 무영검을 빼 들었다.

“문주님, 당문이 天과 거래한 암기와 독이 정녕 어디에 쓰이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 암기와 독을 당문에서 직접 제작했으니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일지 당문이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청운이 지극히 무심한 눈빛으로 천비천독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당문은 돈을 벌기만 하면 그뿐이란 말입니까. 天의 무리들이 당문으로부터 구매한 암기와 독으로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단 말입니까.”

“…….”

“문주님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이 일의 결과로 파생된 모든 책임은 문주님이 전적으로 지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문주님을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청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비천독의 입에서 분기에 찬 폭갈이 터져 나왔다.

“애들아, 저놈을 아예 오독신사로 녹여 버려라.”

오독신사는 사천에서 나는 수십 가지 약물에 모래를 백여 일 이상을 담가 만든 것이었다.

그 모래에 닿으면 사람의 몸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줌 핏물로 화하는 악독한 독물이었다. 청운은 천비천독의 눈빛을 보고 이미 치우전륜공을 끌어올려 전신에 호신막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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