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자네가 상대하려는 적이 도대체 누구인가.
“만년화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살아 있는 기러기이네. 하루에 다섯 마리씩 미끼를 단다고 치면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도록 백여 마리는 잡아서 키워야 할 걸세.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렇군요…….”
“자네가 상대하려는 적이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 자네 정도의 무위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는데. 만년화리의 내단까지 구하려고 하다니. 그들이 지옥의 나찰이라도 되는가.”
청운은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는 天에 대한 것을 모조리 만수귀왕에게 이야기했다.
청운의 이야기를 듣는 만수귀왕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기까지 했다.
특히 천산에서 맞닥뜨린 파황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신음까지 내뱉었다.
청운이 만수귀왕의 눈앞에 삼재구와 삼공적과 무문적을 꺼내 놓았다.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만수귀왕이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것들을 다시 내려놓은 후 만수귀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보여준 이 물건들을 보니 아주 오래된 전설이 하나 떠오르네. 삼재구는 잘 모르겠지만 이 피리들은 아무래도 신단수와 벽라목으로 만들어진 것 같네.”
“전설 말씀이십니까.”
“신단수와 벽라목는 약 일만 년 전 환인 안파견이 파내류산에 내려와 환국을 세울 때 천상에서 가지고 내려온 신목이라고 전설로 전해지고 있지.”
“…….”
“전설은 말하고 있네. 신단수는 천하의 사기를 제압하는 무궁무진한 벽사와 파사의 공능을 가진 신외지물이라고. 이것을 검이나 악기로 만들어 휘두르거나 연주하면 세상의 모든 사이하고 요사한 힘들을 잠재우거나 파괴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네.”
청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만수귀왕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신단수는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세상에 둘도 없는 복된 태평을 불러오기도 하고 모든 것을 사멸시키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네. 동방의 어떤 작은 나라에도 이 신단수 가지로 만든 피리 하나가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듣기는 했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한 길은 없지만.”
“네…….”
“그리고 벽라목은 하늘의 노기인 벽력의 기를 응축하고 있는 신목이네. 벽라목이 지닌 벽력의 기氣는 사람들이 천둥이 치는 날에 목격하는 번갯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네.”
“그렇습니까.”
“불꽃에도 붉은 빛, 푸른 빛, 하얀빛 등의 여러 가지 색이 있고, 그 색에 따라 열기의 강맹함이 천양지차가 있듯이 벽력의 기운도 마찬가지일세.”
“아…….”
“이 벽라목는 말 그대로 벽력의 최고 정화가 담겨 있다네. 그래서 벽라목으로 검으로 만들어 휘두르거나 피리로 만들어 불면 그 소리만으로도 지상의 모든 사이한 마물과 괴수들을 멸절시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네.”
“…….”
“하지만 벽라목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청력을 훨씬 넘어선 것이어서 인간의 청력으로는 절대 들을 수가 없다네. 오직 제거하고자 하는 마물과 괴수의 귀에만 들린다고 알려져 있네. 참으로 하늘의 안배가 신묘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자네는 이런 신외지물을 어디서 구했는가. 그것도 둘씩이나.”
청운이 그것을 얻게 된 경위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만수귀왕이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뜨고는 깊은 탄식을 뱉어 내며 말했다.
“이런 귀물이 자네의 손에 들어온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세. 아무래도 하늘이 자네에게 하늘을 대신해 무슨 엄청난 일을 시킬 모양이네. 그만큼 그 일은 힘들고 위험과 고초가 따르는 것일 테니 말이야.”
“…….”
“아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항상 자신을 돌보게. 위험과 고난에 처한 자신을 혼자 감당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고 무서운 것이네. 언제나 자기 곁에 있으면서 자신을 가장 빨리 도울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네. 내 말을 명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귀물에 대해 자세한 것은 나보다 곤륜선인이 더 잘 알고 있다네. 내가 자네에게 방금 한 얘기들도 실은 모두 곤륜선인에게 배운 것들이네. 이곳에서 곤륜산이 그리 멀지 않으니 내가 서찰을 하나 서 줄 테니 곤륜선인을 한번 찾아가 보게.”
“정말 감사합니다.”
“잘만 하면 그곳에서 만년화리를 낚는데 필요한 자하신철도 구할 수 있을 것이네. 삼재구에 대해서도 그에게 한 번 물어보게.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기사나 괴사에 대해 가장 박식한 분일세. 그리고 오금죽 세 대를 손질해 하오문 형주분타로 표물로 보내 놓겠네.”
청운은 귀수하백의 거처에서 삼 일을 더 머문 후 곤륜산으로 곧장 향했다.
* * *
만수귀왕 형님의 이야기는 어릴 적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전설 같았다.
만년화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단수와 벽라목이라니.
궁금해서 그에게 물어놓고도 내가 그 대답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청운은 곤륜선인을 만나서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륜渾倫.
즉 혼돈이라는 어원의 곤륜산.
황화의 원류가 시작되고, 서왕모의 전설이 깃들어 있고, 그 산정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북극성을 마주 보고 있는 신선들의 거처가 있다는 바로 그곳.
옥루봉 왼편의 요지瑤池라는 연못 근처에 곤륜선인의 거처가 있다고 만수귀왕은 말했다.
곤륜산으로 가는 길섶에는 수북하게 쌓인 늦가을이 고즈넉하지만 바쁘게 흐르고 있었다.
그 바쁜 계절이 길손의 마음을 조급하게 재촉했다.
곧 무자비한 겨울이 닥쳐오니 하던 일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산홍엽滿山紅葉.
곤륜산의 늦가을 단풍이 절정이었다.
태어나서 이십여 년 동안 매번 가을 단풍을 보아 왔지만 이런 각양각색의 단풍은 생전 처음 보는 절경이라고 느꼈다.
청운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곤륜산의 정취를 만끽했다.
혹시 곤륜선인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 정도 절경을 본 것만으로도 자신이 곤륜산을 찾아온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만수귀왕이 설명해 준 산길로 벌써 몇 개의 봉우리를 넘었다.
곤륜산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그렇게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자 만수귀왕이 말한 옥루봉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드디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수천 척 깎아지른 암봉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노송들.
그리고 그사이를 신선들의 숨결처럼 여여하게 흐르는 구름들이 한 폭의 웅장한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청운은 넋을 놓고 그 절경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요지는 옥루봉을 끼고 일각쯤 돌자 나타났다.
수정처럼 밝은 물에 옥루봉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한 폭의 수묵화였다.
그런데 정작 절경 속에서 곤륜선인의 선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누각은 고사하고 자그마한 모옥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곤륜선임—니—임.”
청운은 공력을 실어 몇 번을 소리쳐 불렀으나 들은 대답이라고는 자신이 외친 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청운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경치나 실컷 감상하자는 생각으로 요지 근처의 너럭바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청운은 수청처럼 맑은 요지의 수면에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비춰 보았다.
청운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얼굴이 자신이 늘 기대했던 자신의 얼굴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눈썹 위에서 자그마한 모옥 한 채를 발견했다.
그 모옥은 요자에 거꾸로 박힌 옥루봉의 중턱에 있었다.
청운은 즉시 몸을 돌려 까마득한 옥루봉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옥은 바로 옥루봉의 중턱쯤 십여 그루의 노송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옥 전체는 보이지 않고 모옥의 처마 한 귀퉁이만 간신히 보였다.
그것도 바람이 노송의 가지를 살짝 흔들며 들추어 줄 때 간신히 보였다.
모옥은 청운이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으로부터 약 이백여 장 정도 되는 높이에 있었다.
중간중간 튀어나오고 들어간 바위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모옥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운은 즉시 묘묘보허를 펼치며 모옥으로 올라갔다.
모옥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더 절경이었다.
청운은 곤륜선인이 왜 이곳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청운은 모옥 가까이 다가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인님 안에 계십니까. 저는 선인님을 뵙기 위해 하남에서 온 강청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만수귀왕 여위불 형님이 써주신 서찰도 가지고 왔습니다.”
몇 차례나 더 모옥에 대고 인사를 했으나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청운은 모옥으로 다가가 살며시 모옥의 문을 열어 보았다.
역시나 모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운은 모옥의 마루에 걸터앉아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진 선경을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전혀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청운은 마치 자신이 선계의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운은 아예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은 않아서 바라보던 풍광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선계였다.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아 있는 옥루봉이 마치 천계로 올라가는 바위 계단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옥루봉을 올려다보던 청운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렇게 상념의 시간이 옥루봉에 구름이 휘돌듯 흘렀을까.
청운은 모옥을 향해 다가오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발자국을 내딛는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허공을 밟고 오는 소리 같았다.
청운은 모옥 앞으로 달려 나가 옥루봉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아래에서 백발이 성성한 도골선풍의 신선 같은 노인이 모옥을 향해 구름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신법은 청운이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것이었다.
그 신선 같은 노인은 마치 계단을 밟고 오르듯이 허공을 밟으며 모옥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신법은 허공답보나 능공허도와 비슷하지만 허공답보도 능공허도도 아닌 것 같았다.
허공답보와 능공허도가 허공의 부력을 발판 삼아 펼치는 신법이라면 저 노인네의 신법은 바람결에 실려 오는 것 같았다.
일순간 어떤 생각이 청운의 뇌리를 번뜩하고 스쳐지나갔다.
저 노인장의 신법이 자신이 묘묘보허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노인장이 모옥에 도달했다.
청운을 본 노인이 돌연 얼굴에 이채로움을 가득 띠고는 말했다.
“이렇게 기개가 헌앙하고 신태가 비범한 젊은 공자 분께서 이 절지 중의 절지인 곤륜산의 옥루봉에는 무슨 일이신가.”
청운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는 하남에 사는 강청운이라고 합니다. 곤륜산의 신선이신 곤륜선인님을 찾아 불원천리 찾아왔습니다. 혹시 곤륜선인님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 노인장이 청운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곤륜산의 신선은 모르겠고 곤륜산을 지키는 산지기는 하나 알고 있다네. 노부가 바로 그 산지기일세.”
청운이 품속에서 만수귀왕이 써준 서찰을 꺼내 공손하게 곤륜선인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곤륜선인은 청운에게서 서찰을 받아들자마자 즉시 개봉해 읽어 내려갔다.
서찰을 모두 읽은 곤륜선인이 빙그레 한 가닥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물고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