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오늘은 모르겠지만 다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구대문파의 제자들과 생각지도 않은 한바탕의 드잡이질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지금쯤 산을 거의 다 넘었어야 했는데 모든 게 어중간해져 버렸다.
다시 그녀가 있는 귀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운남으로 가는 산을 이대로 넘자니 영 찝찝했다.
그렇다고 근처에 하룻밤을 편히 묵고 갈 객점이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노숙을 해야 할 처지였다.
청운은 가다 보면 어딘가 관제묘라도 있겠지 하며 그냥 산을 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고수라도 혼자 가는 밤의 산길이 편치는 않았다.
홀로 가는 깜깜한 산길의 길동무라고는 산정을 고요히 비추는 흐린 달빛과 그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산군의 거무스름한 윤곽선뿐이었다.
가을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그 희미한 윤곽선마저 끊어 낼 듯이 시끄러웠다.
두어 시진 정도 그렇게 산길을 올랐을까.
삼백여 장 앞에 희미하게 관제묘 하나가 보였다.
그곳에서 한 줄기 실금 같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선객이 그곳에 있는 모양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느낌상 축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저 관제묘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단숨에 관제묘까지 날아갔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가운데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네 명의 흑의인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구운 오리 두 마리를 안주로 술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청운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그들의 신형에서 풍기는 예기가 대단했다.
그것은 새파란 불이 쉭쉭 거리며 타오르는 화구에서 방금 담금질해 꺼내 놓은 네 자루의 시퍼런 칼날 같았다.
관제묘에 도착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으나 지붕 위에도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그 정도로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다니.
청운은 그가 어쩌면 상상 이상의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 일진이 아주 사나울 같은 불길한 예감이 청운의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청운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무리 불길하게 느껴져도 문까지 열어 놓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더 이상한 모양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실없이 괜한 헛기침을 몇 차례 한 후 무심한 말투로 그들을 향해 입을 뗐다.
“이런, 저보다 먼저 오신 선객이 계셨군요. 염치없지만 곁불을 좀 얻어 쬐어도 되겠습니까.”
방금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엄지와 검지로 오리고기를 뜯어 막 입으로 가지고 가려던 사내가 살점을 든 채 청운의 말을 받았다.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그리고 한잔 하시오. 이런 야밤에 홀로 산길을 가는 사람을 외면하면 그건 강호인의 도리가 아니지요.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면 될 터. 지금은 지금 일만 생각합시다.”
청운이 그들과 반 장 정도 떨어진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까보다 더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게 좋겠군요. 지금 미리 다음에 일어날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자, 나도 한 잔 주시오. 오늘은 내가 신세를 지겠소. 다음에 만날 때는 필히 내가 오늘의 이 신세를 갚겠소.”
이번에는 그자와 마주 보고 있던 오른쪽 눈 바로 아래 깊은 칼자국이 있는 자가 청운의 말을 빈정거리며 받았다.
“글쎄, 오늘은 모르겠지만 다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우리는 늘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지라… 나도 다음이 꼭 있었으면 좋겠군요. 무위검 소협.”
역시 그랬다.
그들은 청운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다.
청운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그들의 말을 차갑게 받았다.
“당신들은 나를 아는데 나는 당신들을 모르니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것 같군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군데 이 야밤에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
“피차 목적이 분명한데 서로 질질 시간을 끌며 가을밤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요. 이곳은 너무 좁으니 밖으로 나갑시다.”
청운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흑의인들도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관제묘 밖으로 나왔다.
청운이 잠시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있을 때, 아니 관제묘 지붕을 흘깃 올려다보고 있을 사이에 그들이 청운을 가운데 두고 네 방위를 차단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관제묘 지붕에서 청운을 주시하는 자까지 전부 합하면 청운은 다섯 방위를 모두 차단을 당했다.
청운은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는 땅속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이 잠시 주변 상황을 살피는 틈에 흑의인들이 어느새 도를 뽑아 들고 청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에서 마치 암흑 같은 무거운 도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청운도 무영검을 뽑아 들었다.
진기를 주입하자 무영검이 검신을 부르르 떨며 용틀임을 했다.
바로 그 순간, 네 방위에서 시커먼 도기가 청운의 전신을 찢어발길 듯이 짓쳐왔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도기가 마치 성난 노도 같았다.
정파의 도법은 아니었다.
그들의 도에서 발출된 어둡고 칙칙한 마기가 장내를 뒤집어 놓을 듯이 출렁거렸다.
네 방위를 다 지키면서 그들을 반격할 요량으로 청운은 변—회—접의 초식을 연격해 펼쳤다.
검기과 도기가 정확히 네 방위에서 부딪쳤다.
깊은 밤의 적막을 찢어발기는 따—따—따—땅 하는, 듣는 사람의 귀청을 긁어내리는 듯한 쇳소리가 검기와 도기가 충돌하고 한참이나 지나서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만큼 청운과 흑의인들의 출수가 빠르고 쾌속하다는 걸 의미했다.
네 명의 흑의인들이 합격해서 펼치는 도법은 청운의 상상을 초월했다.
내공면에서는 청운에게 다소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합격술은 내공의 부족함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었다.
한 방위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도기를 막았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방위에서 더 드센 도기가 육박했다.
다시 그 도기를 막았다 싶으면 또 어느새 다른 도기가 다른 방위를 베어 왔다.
수십 초를 교환하고도 흑의인들에게 확실한 우위를 접하지 못한 청운은 점차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초조함의 상당 부분은 관제묘 지붕 위에서 이 격전을 지켜보고 있는 정체 모를 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치열한 격전의 와중에도 그가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청운은 이들과의 싸움에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하면 정작 관제묘 지붕 위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저자와의 대결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이래서는 한없이 싸움이 길어질 것 같다고 느꼈다.
일순 청운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십 성 가까이 끌어올렸다.
그러자 무영검에서 거의 이 장이 넘는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폭포수처럼 밤의 대기에 무수한 구멍을 뚫으며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관제묘 지붕에서 날카로운 일성이 터졌다.
“모두 즉시 뒤로 물러나라.”
하지만 이미 때가 늦고 말았다.
그자의 말보다 청운의 출수가 조금 더 빨랐다.
그자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무영검에서 발출된 쾌—타—절—변—회의 초식이 흑의인들을 격류처럼 휩쓸어 버렸다.
“아—악—으—아—악.”
“크—크—큭!”
“아—아—아—악.”
산속의 깊디깊은 밤에 때 아닌 유성이 떨어지듯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휩쓸고 간 자리엔 두 구의 시체와 시체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두 명의 반병신이 관제묘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이미 관제묘가 청운의 검기에 날아가고 없기에 그곳은 이제 더 이상 관제묘 앞이 아니었다.
노성과 동시에 관제묘 지붕에서 날아 내린 그자는 장내의 상황을 보고는 경악을 했다.
그자는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핏빛 같은 적의를 입고 있었다.
조금 검은 색의 피부에 사각턱을 가진 단호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흰자위가 거의 없는 그자의 시커먼 안광에서는 무서운 마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자는 마치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자신을 자책하며 몇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 알고 나서는 깊은 침음의 신음을 두어 차례 뱉어냈다.
그자가 청운을 빤히 쳐다보며 탄식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호에 너 같은 아이가 있었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모든 것이 다 셋째와 다섯째의 말을 건성으로 들은 내 잘못이다. 마련의 자랑인 수라도객 넷을 일순간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다니…….”
“…….”
“셋째와 다섯째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들었다면 이런 치명적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게 내 불찰이다. 이제야 누굴 탓하겠는가. 아이야, 네가 무슨 연유로 마련에 척을 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나는 네 목숨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게 내가 받은 명이니 어쩔 수가 없구나. 참으로 아깝구나.”
그 말을 들은 청운은 긴장했다.
그자는 말을 이어 갔다.
“그 나이에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기재를 내 손으로 거두어야 한다니. 나도 몹시 가슴이 아프구나.”
“…….”
“넉넉잡아 앞으로 한 십 년만 더 지나면 정사를 막론하고 천하제일을 꿈꿀 수도 있는 자질을 갖춘 너를 내 손으로 정리해야 하다니… 아이야,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현 마련주 제혼마검도 지금 네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
“삼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순수하게 무공의 고하로만 따지면 내가 마련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 나는 마련의 팔대천왕 중 첫째인 수라마군이다. 나는 삼 초만 공격하겠다. 내 삼 초를 무사히 받아내면 너는 여기를 떠나도 좋다.”
말을 마친 수라마군은 등 뒤에 있는 자신의 도를 빼 들었다.
그가 밤하늘에 일성을 토하며 허공에 대고 도를 부르르 떨었다.
“수—라—진—천.”
그에게서 뿜어진 시커먼 묵빛의 도기가 무중력의 암흑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잔뜩 벌린 채 청운을 한입에 집어삼킬 듯이 몰려왔다.
청운은 쇠사슬이 죄어오듯 자신의 전신을 옥죄어 오는 그의 묵기에 청운은 전신이 꽁꽁 묶이는 느낌을 받았다.
자칫 방심하면 초식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자신이 사나운 도기에 갈가리 찢어질 것 같았다.
청운은 거의 십 성의 치우전륜공을 끌어올렸다.
청운은 자신의 전신을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그자의 묵기를 입으로 불어 내듯이 일갈을 내뱉었다.
“쾌—타—절—변—회—접—척.”
수라마군의 묵도에서 뿜어진 도기와 청운의 무영검에서 뻗쳐 나온 검기가 서로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그러자 깜깜한 산속의 적막이 송두리째 파열되었다.
콰—콰—콰—콰—쾅—쾅!
연속된 폭음이 산 전체를 진동시켰다.
두 고수의 도기와 검기에 휘말린 주변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름드리나무며 집채만 한 바위들이 찰나에 제자리를 이탈해 주변의 지형마저 뒤바꿔 놓았다.
청운과 수라마군은 상대의 도기와 검기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