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굳이 동참하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청운이 입가에 한줄기 싱그러운 미소를 베어 물고는 영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음식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운은 자신이 오늘 밤에 머물 숙소를 객점에 미리 잡아두었다.
그리고 영봉을 그녀의 외갓집까지 바래다줄 작정이었다.
그녀의 외갓집은 객점에서 채 십 리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과거에 바로 이곳 귀주성의 성주를 지냈다고 했다.
관직에 물러난 후 귀주성에서 가까운 풍광이 좋은 곳에 산장을 짓고 안착을 했다고 했다.
청운이 그녀를 바래다주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청운의 품에 한 번을 더 안겼다.
그녀가 청운에게 그녀의 외갓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청운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허락도 받지 않은 지금은 좀 그렇다며 그녀를 간신히 떼어놓고 돌아섰다.
그녀를 들여보내고 터덜터덜 혼자 객점의 숙소로 돌아오는 얼마 되지 않는 그 밤길이 청운에게는 멀고도 멀었다.
* * *
완연한 가을이었다.
바람이 떼어 낸 것도 아니고 나무가 떨군 것도 아닌데 낙엽들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들은 잠시 제 몸을 허공에 띄워 그동안 자신이 매달려 살아온 나무를 한 번 더 쳐다보는 것 같았다.
땅바닥에 수북하게 떨어진 채 서로의 몸을 포개고 있던 낙엽들이 누군가 밟을 때마다 와그작와그작 소리를 지르며 이게 모든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볍게 부는 작은 바람에도 몸을 불쑥불쑥 일으켜 세우며 이것이 진정 끝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눈발처럼 낙엽 휘날리는 관도를 따라 말끔한 자색의 무복을 입은 청년 한 명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 청년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걷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눈빛은 방금 심해에서 막 길어 온 물처럼 깊고도 깊다.
그 나이의 청년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의 주인공은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이따금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귀주성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로 무리를 지은 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청운은 그녀에게 선하령에서 주운 노리개를 돌려줄 때, 둘째 오빠 남궁혁휘가 天과 관련이 있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자신 그리고 자신과 함께할 미래를 꿈꾸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그 말을 막아 버렸다.
청운은 오늘의 한없는 기쁨을 내일의 알지 못하는 슬픔으로 그 순간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슬픔의 순간을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지극한 기쁨의 순간을 즐길 기회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발아래 시나브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은 깊고 깊은 가을의 적막에 한 줌 무거움을 더할 뿐이었다.
한숨을 한차례 더 내쉰 청운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날 내가 그녀에게서 감히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었겠는가.”
청운은 귀주성까지 온 김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만수림에 한 번 가 볼 생각이었다.
만수귀왕 형님에게 여러 가지 물어볼 것이 많았다.
청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관도가 끝나는 줄도 모르고 막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한 무리의 인물들이 청운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들은 승, 포, 도의 각양각색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아홉 명이었다.
무리 중에는 청운이 아는 자들도 몇몇 있었다.
소림의 십대 신승 중 하나인 정해와 화산의 삼결제자 화서용도 보였다.
그들이 일제히 청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마주보며 포권을 취했다.
화서용이 무리에서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강 소협에게 단도직입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청운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말을 받았다.
“무슨 얘기든지 말씀하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화서용은 말했다.
“저희는 구대문파 후기지수들의 모임입니다. <구무회>라고 합니다. 요즘 소협께서 天의 문제를 빌미 삼아 행하는 행보가 구대문파의 권위와 정기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
“소협의 의도가 아무리 협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구대문파의 제자들인 저희는 더 이상 소협의 그런 일방적인 도발을 묵과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제라도 소협이 그런 행보를 멈추겠다고 약속을 하면 저희는 두말없이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화서용은 말을 이어 갔다.
“소협, 당장 약속해 주실 수 있는지요. 소협이 정년 고집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그런 무도한 행보를 계속한다면 저희는 부득불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서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에 도열하고 있던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덩달아 청운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장 약속하시오. 모든 행보를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당장하시오.”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더 역겨워져서 청운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갈을 터뜨렸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강호에 협의를 추구하는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맞기는 맞는지요. 어떻게 자신이 속한 문파만 보이고 자신들의 문파가 속한 강호는 보이지 않는 것이오.”
“……”
“그대들의 그 편협하고 부박한 사고방식이야말로 강호의 협과 의를 좀먹는 해악이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악처럼 보이지 않는 악이 최악의 악임을 그대들은 정녕 모른단 말이오. 당신네 문파의 체면과 위신에만 두 눈을 부릅뜨고 강호 전체의 왜곡되고 뒤틀린 질서에는 눈을 감아도 정녕 괜찮다는 말이오.”
“…….”
“지금 당신들의 이런 행위는 거악을 희석시키는 소악임을 알아야 할 것이오. 당장 물러가 자숙하시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갈 길은 오로지 내가 정할 것이오. 내 약속은 그것이 전부요. 당장 내가 가는 길에서 비켜나시오.”
청운의 일갈이 끝나자마자 뒤에 서 있던 성질 급한 몇몇이 자신의 무기를 빼 들었다.
그들의 그런 행태를 본 청운의 눈에 서늘한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입에서 일말의 체념이 묻은 자조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당신들에게 나의 의견을 명확히 밝혔소. 그렇게 자기 문파의 위신과 권위에만 경도된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당신들 또한 강호의 득이 될 것 같지 않구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소. 지금 당장 돌아간다면 모든 걸 불문에 부치고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굳이 나와 한판 드잡이질을 하겠다면, 나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소. 이 일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들 책임이오. 내 말을 명심하시오.”
청운의 얼음장 같은 엄포에 한순간 모두 신형을 움찔했다.
하지만 곧바로 제 분기를 못 이긴 세 명이 청운을 에워싸며 말했다.
그중 가운데 있는 자가 청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점창의 진무웅, 이쪽은 종남의 가위연 소협 그리고 저쪽은 청성의 양도일 소협이오. 우리는 강 소협의 의견에 절대 동의할 수 없소. 우리에게 강호도 중요하나 우리가 속한 문파가 더 우선이오.”
“…….”
“나는 내가 속한 문파가 먼저 있어야 강호도 있다고 생각하오. 내가 속한 문파가 없는데 강호가 다 무슨 소용이오.”
그들 모두 한 번쯤 청운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점창의 진무웅은 육백사검에 달통해 육백검으로 불리고 있었다.
또한 종남의 가위연은 구궁신행검법에 능통해 구궁신행검으로 불리고 있으며, 청성의 양도일은 천풍무형신권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천풍신권으로 불리고 있었다.
모두들 각 문파가 자랑하는 강호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무리 자체보다 그 무리가 속한 집단의 이름이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저들이 하는 행태가 딱 그 짝이었다.
지금 저들은 자신이 속한 문파의 이름으로 나를 겁박하는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이참에 저들에게 단단히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다시는 자신에게 이런 어설픈 도발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청운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앞으로도 나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소,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진정 무력이라면 나도 굳이 사양하지 않겠소. 나는 이 일의 결과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소. 자, 들어오시오.”
청운이 자신을 에워싼 자들을 한 번 쓱 둘러본 후 애검인 무영검을 빼 들었다.
청운이 무영검에 사 성의 치우전륜공을 주입하자 쩌—쩌—쩌—엉하고 무영검이 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바로 무영검에서 일 장이 넘는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청운의 무위를 바로 앞에서 목도한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 신형을 떨며 뒤로 두어 발자국씩 물러났다.
청운을 둘러싼 자들이 막 기수식을 취했을 때, 또다른 한 무리의 인파가 우르르 달려오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멈추시오!”
그 소리와 동시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속속 장내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장내에 날아 내리자마자 청운에게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청운도 무영검을 쥔 채 포권을 취했다.
무리 중에는 청운이 아는 자들도 있었다.
소림의 십대신증 중 첫째인 정각과 화산의 삼결제자인 화주영도 있었다.
정각이 청운을 에워싼 점창의 진무웅, 종남의 가위연과 청성의 양도일을 흘끔 쳐다본 후 일갈했다.
“모두 검을 당장 거두시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천리신개 개방 방주님의 주도로 무당에서 열린 구파일방의 합의된 내용입니다. 구파일방의 수장들은 강 소협과의 약조를 반드시 이행할 것이라 약속을 했습니다.”
“…….”
“따라서 지금 당장 구파의 제자들은 검을 거두고 물러나시오. 지금 제 말은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명령입니다.”
자신들이 속한 문파 수장의 명령이라는 정각의 말에 청운을 에워싼 자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납입하고 뒤로 물러났다.
청운도 무영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청운이 시큰둥하게 장내를 한 번 훑어본 후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나는 내 길을 가겠소. 모두 잘 가시오.”
청운이 막 몸을 돌려 자신의 길을 재촉하려고 할 때 정각이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강 소협, 여기 있는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天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반천회反天會>를 조직하는데 뜻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회주로 혼원벽력도 팽추도 대협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청운이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쁘지는 않은 일 같군요. 하지만 <반천회>는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강호에 있겠지요. 저는 여러분이 제가 감당해야 할 위험에 굳이 동참하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이건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
“귀회가 아무쪼록 잘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제 갈 길이 너무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운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하자 그들도 일제히 청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운은 몸을 돌려 그들과 곧장 헤어져 자신의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