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89화 (89/184)

089화 다른 여자 아닌 바로 그녀.

강호에서는 가능성과 두려움이 늘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능성 안에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다.

인생이 죽음과 삶의 선택 사이에 존재하듯이 강호의 삶은 늘 목숨을 건 위험과 그 위험을 극복해야 하는 한계 사이에 존재한다.

그 둘 다 동시에 살아야만 하는 것이 강호인의 숙명이다.

청운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 설계한 판에 들어가 그냥 자신에게 주어지는 패만 까대며 허우적거리며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지면서 무당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세상에는 반드시 싸워야 지킬 수 있는 가치도 있다.

내 능력과 재능은 바로 그것을 지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절대로 내 영화를 위해 남을 해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오로지 남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청운은 무당산을 하산했다.

* * *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낮이 끝나가면서 밤이 시작되는 낮과 밤이 겹치는 경계의 순간이었다.

낮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밤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청운은 어딘가 풍광 좋은 찻방에 들어 차를 마시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고, 주루에서 술을 퍼마시기엔 너무 이른 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다소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뭔가 아쉬운 순간 같다고 청운은 느꼈다.

지금의 이 순간은 ‘벌써’와 ‘아직’ 사이에서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다 보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고 마는 이중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의 행보를 조금만 늦추어 달라는 천리신개의 말은 자칫하면 지금의 이런 어정쩡한 시간처럼 자신이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묘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운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적거림 속에서 막연히 헤매다 갑자기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에 도착할 수는 없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은 천리신개의 조금 기다려달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다림과 자신의 기다림은 전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리신개의 기다림이 자신의 발길이 제자리에 멈춰 서는 걸 의미하는 것이라면.

청운의 그것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적극적 기다림을 의미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무당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왼쪽으로 삼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억새가 만발한 연못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의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청운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정리할 생각에 하산하던 길을 바꿔 그 연못으로 향했다.

연못은 둘레가 거의 삼백여 장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컸다.

노을이 가만히 출렁이는 수면은 마치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분홍빛 거울 같았다.

청운은 못둑에 만발한 억새가 그 내면에 자라는 무수한 사념 같다고 생각했다.

쏴—아—아—쏴—아—아.

무엇보다도 작은 바람에도 끊임없이 목쉰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자기 전체를 뒤흔드는 억새가 바람의 내면을 세세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청운은 수면에 비친 노을의 얼굴이 갑자기 이별하는 연인들의 눈시울만큼이나 붉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를 열심히 타오른 해가 붉은 진땀을 흥건히 흩뿌리며 서녘의 산군들 너머로 아스라이 지고 있었다.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며 해시계의 눈금처럼 뚝뚝 떨어지는 해는 한 줌의 애수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의 아래로 더 아래로 가뭇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청운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이 서 있는 연못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였다.

아니, 다른 여자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다.

남궁영봉이었다.

그녀가 노을만큼이나 붉디붉은 진홍색 경장을 입고 자신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땅거미가 드리우는 연못가의 어스름을 살포시 지르밟고 자신에게로 자석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못둑의 억새 숲을 따라 말없이 걸어오는 그녀의 긴 생머리가 나풀거리고 또 나풀거렸다.

바람에 쓸리는 연못가의 억새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중얼거릴 때마다 청운의 영혼은 저녁놀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청운은 그녀를 객점에서 처음 보던 날 중력에 이끌리는 행성처럼 그녀에게 이끌렸다.

그 순간부터 청운은 그녀에게 잘하고 싶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무심했고 어설펐고 실수투성이였다.

그때의 그 기억이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청운의 마음을 무섭게 매질했다.

어쨌든 살아야만 한다는 핑계가,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핑계가 소중한 것을 멀리하게 하고 멀어지게 했다.

심지어 잃어버리고 상실하게 만들고 말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날의 그녀가 오늘 또다시 자신 앞에 현신했다.

그녀가 노을 일렁이는 수면에 눈길을 던진 채 자신에게 물었다.

청운은 그녀의 말이 수면에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다시 생각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원망과 안타까움 그사이 어디쯤 머물러 있었다.

청운은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노을빛에 비쳐 붉게 반짝일 때마다 왠지 억새가 더 세차게 흔들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충 말아 올린 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땅거미가 드리우는 연못가의 어스름을 밟으며 자신에게서 다시 멀어져 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멀쩡히 살아 계셨으면서 그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어요. 그때 선하령 계곡을 갔다가 돌아온 후 저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

“어떻게 저에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소식 한 번 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고 바빴나요. 제발 말 좀 해보세요. 가가.”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어깨를 억새가 흔들리듯 들썩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이 혹시라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싶어 입술을 사려 물고서 말했다.

청운은 한심하게도 그녀의 무수한 말을 다 놓치고 ‘가가’라는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 순간 ‘가가’라는 그녀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오랫동안 청운의 귓바퀴를 맴돌다 귓속으로 들어갔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바로 그 한마디가 평생 청운을 그녀 곁에 꿰매는 바늘과 실이 되고 말았는지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청운은 그녀의 눈빛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한 채 남궁세가에서 그녀와 헤어진 후에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했다.

설산 유라궁에서 사라유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도 빠짐없이 말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청운의 말을 다 듣고 난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저만치 멀어져 갔다.

청운은 그녀의 뒤를 죄인처럼 말없이, 아니 죄인이 되어 끌려가듯 안절부절 따라갔다.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자마자 청운의 품에 자신을 던져 버렸다.

그렇게도 맑고 구김살 없던 그녀가 지금 청운의 품에서 울고 있다.

그녀의 팔딱거리는 심장이 청운의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청운은 자신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그녀의 심장 소리에 대문을 열 듯 자신의 영혼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그녀를 힘주어 끌어 않았다.

청운은 자신을 안은 그녀의 두 팔 바깥으로 어미 새가 새끼를 품듯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다시는 자신의 팔을 풀지 않겠다는 듯이…….

억새 흐드러진 황혼의 연못가에서 그렇게 이십 대 중반의 두 가을이 하염없이 서로를 향해 흔들리며 파고들고 있었다.

청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울음이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울지 않았다면 여자의 마음에 둔감한 청운은 끝내 그녀를 몰랐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그녀가 다소곳이 청운의 양손을 잡아들며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가가 내 곁을 떠나도록 놔두지 않겠어요. 설산에서의 일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잖아요.”

“…….”

“그리고 유라궁은 금남의 구역 아닙니까. 삼 년에 한 번 백일을 그곳에서 보낸다고 해도 어차피 내 곁에 더 오래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번에는 청운이 먼저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괜찮아요. 그 정도는 충분이 이해할 수 있어요. 가가가 나를 멀리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무슨 일이든지 이겨 나갈 수 있답니다.”

청운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봉매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다시는 당신을 외롭게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당신과 똑같은 곳을 바라보며 똑같은 길을 걷겠습니다.”

그날 노을 지는 무당산 언저리의 억새 가득한 연못가에서 청운과 남궁영봉은 서로가 바라마지 않던 순간을 동시에 맞보았다.

청운과 그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무당산을 내려왔다.

* * *

귀주성 귀양에서 요리로 첫 손에 꼽는 <진서루>의 이 층 창가.

눈빛이 심연처럼 고요한 흑의를 입은 이십 대 중반의 청년과 눈부신 미모의 생기발랄한, 적의의 경장을 입은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가 다정한 눈빛을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산해진미를 맛나게 먹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서로를 전부 발견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음식을 먹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말과 손짓과 표정과 얼굴과 눈빛을 먹고 있었다.

남자는 청운이고 여자는 남궁영봉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상관없이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남자에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영봉의 말을 한 번도 제지하지 않고 계속 들어주기만 하던 청운이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멈춘 틈을 타 그녀에게 물었다.

“봉매, 무당산에는 무슨 일로 오게 되었지요. 나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청운의 말을 받았다.

“제 외갓집이 바로 이곳 귀양이랍니다. 어머님이 외할아버지의 칠순 때문에 지금 외갓집에 와 계십니다.”

“아…….”

“저도 어머님을 따라 같이 오던 중에 형주의 객점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옆 탁자의 무사들이 가가와 적송자의 비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한 후 부랴부랴 무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분의 대결이 끝난 후였습니다. 그래서 천리신개 방주님에게 물으니 가가가 좀 전에 하산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다시 부리나케 가가가 하산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그 억새가 만발한 연못에서 가가를 발견한 것이지요. 저는 이 모두가 다 저와 가가를 위한 하늘의 안배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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