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88화 (88/184)

088화 둘 다 서로를 이기지 못했다.

적송자의 우윳빛 검기와 청운의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서로의 전신요혈 바로 앞에서 맞부딪쳤다.

아까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폭음과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검기가 스친 장내의 화강암 바닥이 몇 자씩이나 움푹움푹 패였고.

돌가루도 아까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허공에 자욱했다.

적송자의 검기와 청운의 검기가 맞부딪친 충돌의 여파로 향로봉이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거렸다.

그 대결을 관전하던 공력이 약한 사람들이 뒤로 몇 걸음씩이나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털썩털썩 엉덩방아를 찧곤 했다.

대기를 가득 채웠던 돌가루가 내려앉자 장내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것 같았다.

청운과 적송자 둘 다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난 채 입가에 한 가닥의 선혈을 베어 물고 있었다.

둘 다 서로를 이기지 못했다.

양패구상이었다.

청운과 적송자 둘 다 불신과 경악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청운과 적송자 둘 다 상대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다니. 도대체 어떤 깨달음이 있었기에 저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라니. 내가 직접 검을 맞대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내 장담컨대 앞으로 채 삼 년이 지나지 않아 검으로 소협을 상대할 자는 강호에 아무도 없을 것이네.”

적송자가 먼저 자신의 애검을 칼집에 납입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나는 참으로 일생일대의 검다운 검을 보았네. 이제 나는 검에 대한 더 이상의 여한이 없네. 그리고 오늘 승부는 소협이 이겼네. 내가 검에 대해 깨달은 세월이 몇 배나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네가 지지 않았으니 이 대결은 소협이 이긴 것이네.”

“…….”

“차후의 모든 일은 소협의 뜻대로 처리될 것이네. 오늘 참으로 즐거웠네. 소협, 무당산을 잘 하산하시게.”

적송자는 혼잣말 비슷한 독백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청운은 장내에서 멀어지는 적송자의 등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청운이 소매로 입가에 흐른 피를 한차례 닦은 후, 몸을 돌려 막 하산하려고 했을 때 천리신개기무현과 혼원벽력도 팽주도가 청운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청운이 쳐다보자 천리신개가 청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강 소협, 어디 심하게 다친 곳은 없는가. 보름 전 흑선에서 본 소협의 무위도 참으로 대단했는데 오늘 소협의 진정한 검을 보고는 내 판단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네.”

“괜찮습니다.”

“오늘 소협 덕분에 일생일대의 장관을 보았네.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네.”

“…….”

“그건 그렇고 내가 소협을 불러 세운 것은 현진자 장령께서 소협이 하산하기 전에 잠깐 보자고 하시네. 소협,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청운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됩니까.”

혼원벽력도 추대협이 청운의 말을 받았다.

“나를 따라오시게. 장문인의 거처는 자소궁 근처에 있네. 소협,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번에 화산에서의 검과 오늘 무당의 검이 또 다른 것 같네.”

“…….”

“내가 판단컨대 그때보다 소협의 검이 한 단계 정도는 더 강해진 것 같네.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청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재천신교와의 격전 때 혈화제천이란 자에게 심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 내상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작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는 넋을 잃은 듯한 경이의 눈빛으로 청운을 쳐다봤다.

천리신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상을 깨달음으로 바꾸다니. 남들은 그냥 회복하기에도 급급한데. 소협은 무공에 관해 천품을 타고난 것 같네. 부럽구먼. 부러워.”

* * *

일각 정도 돌계단을 내려가자 무당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혼원벽력도가 자신의 오른손으로 전각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청운에게 설명을 했다.

“소협, 정중앙에 있는 건물이 조사전이고, 조사전 우측에 있는 건물이 진무관이고, 왼편에 있는 것이 자소궁일세. 무당 장령의 처소는 자소궁 바로 뒤에 있네. 자, 어서 가세.”

사백여 장을 더 내려가자 자소궁 앞에 당도했다.

가까이서 본 자소궁은 무당의 역사만큼이나 웅장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자소궁을 왼쪽으로 끼고 돌자 소담스러운 건물이 한 채 나타났다.

규모는 다소 작았으나 고색창연하면서 소박한 멋이 있었다.

천리신개가 그 앞에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장문인 안에 계시오. 개방의 거지가 왔소이다.”

객청의 문이 벌컥 열리며 오십 대 중후반의 선풍도골의 도사가 객청에서 나오며 포권을 취했다.

그는 바로 해원대에서 적송자 바로 옆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하얀 장삼에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청운과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가 포권을 취하자 그가 말했다.

“기 대협, 추 대협 그리고 강 소협. 어서 들어오시지요. 오실 줄 알고 방금 차를 준비했습니다. 무당에서 가장 좋은 차를 내오라고 했으니 아마 맛이 꽤 괜찮을 겁니다.”

천리신개가 껄껄껄 웃으며 눙치듯 말했다.

“안 그래도 적송자 선배님과 강 소협의 비무를 보느라 긴장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릅니다. 무당에서 가장 상품의 차라니 기대가 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자 현진자 장문인이 차례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한 모금 마시니 과연 깊고 은은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돌았다.

청운은 금세 한 잔을 마시고 한 잔을 더 청했다.

청운은 적송자와 대결하느라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차를 연달아 두 잔을 마시고 나자 몸의 긴장이 확 풀리며 갑자기 나른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천리신개가 말했다.

“소협, 이제 소협의 의도가 전 무림에 충분히 공론화되었으니 이쯤에서 소협의 행보를 좀 늦추었으면 어떻겠소, 소협이 모든 정파의 실상을 천하에 까발리면 정파의 정기가 크게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천리신개는 헛기침을 연달아 몇 번 하더니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다 정작 마도나 세외의 무리가 크게 준동하면 중원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무인지경에 처하고 말 것이오. 화산과 소림 그리고 무당은 구대문파 중에서도 서로 수위를 다투는 정파의 상징적인 문파들이오.”

“…….”

“이제부터는 구파일방 스스로가 천과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이 거지가 열심히 중재를 하도록 하겠소. 어떻소. 내 제안이.”

청운은 천리신개의 말에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그의 말대로 잠시 뒤로 물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같은 일을 벌이는지 그들에게도 시간을 좀 줄 필요가 있다.’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청운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변화하는 상황을 관망하는 것이 때로는 더 효율적일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청운은 천리신개의 고심 어린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방주님 그렇게 하지요. 그게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을 충분히 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제가 다시 검을 들더라도 그때는 말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림맹의 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현재 무림맹의 장로 계시는 청성의 대라무영검 일연자 노선배님과 단목세가의 팔황비도 단목장령 노선배님도 天과 관련이 있습니다.”

청운은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저는 다른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두 분은 대화를 마저 나누시고 천천히 하산하십시오. 자,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청운은 세 사람에게 일일이 따로 포권을 취한 후 방장실을 물러났다.

* * *

청운은 이번 적송자와의 대결을 통해 검의 새로운 경지를 살짝 엿보았다.

그 경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검을 새롭게 심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속에 있는 검을 다시 자각한 차원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각성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의 검에 대한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때늦은 발견이었다.

그렇다.

내 검의 완성은 전적으로 더 심원한 나의 자각과 각성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끊임없는 각성과 자각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 온 내 검이 어느 한순간 금강석처럼 요약될 것이다.

내 검의 불완전함과 취약함에 대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집요한 사유와 통찰이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이 창안하고도 무용지물처럼 사용도 하지 못하고 있는 ‘멸환겁’을 펼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 * *

선하령의 참사를 겪고 하남표국이 멸문지화를 목도한 날로부터 청운의 가슴에는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 밟으면 누구라도 빠져 죽을 수 있는, 심지어 자신마저 익사할 수 있는.

청운은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더 이상 그 얼음물 속에 빠져 익사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더더욱 그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왜 그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샅샅이…….

그날의 기억을 되씹을수록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가슴을 태우는 이 불길을 끄지 않고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건 무의미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무림에서 그런 참화는 비일비재하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며, 내일도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든 그 흉신악살 같은 마귀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 것이다.

청운은 어쩌면 바로 그런 일을 해결하라고 공부만 하던 자신에게 하늘이 연이은 기연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눈에 띠는 것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고민이었다.

뭔가 잡힐 듯 잡힐 듯한데 꼬리만 보이고 몸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루빨리 사태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몸통에 바짝 접근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왠지 모르게 여전히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딘가로 자신을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사태의 오르막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에 묵묵히 그리고 진정성을 다해 전력을 쏟아붓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명명백백 밝혀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청운은 자신의 행보와 생각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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