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87화 (87/184)

087화 그는 자신의 최후 심득을 전개한 것 같았다.

무공으로 일을 해결해야 할 경우, 서로 간의 초식 교환의 횟수는 전적으로 북을 친 사람이 정한다.

청운은 오늘 삼 초를 생각하고 있었다.

삼 초의 교환으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청운은 그냥 무당산을 하산할 생각이었다.

능력의 뒷받침 없이는 강호에서 어떤 은원도 해결할 수가 없다.

그게 무림의 법칙이다.

해원대는 무당의 본산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향로봉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다.

삼백여 장 앞에 무당의 상징인 진무대제의 거대한 조상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 조상을 돌아 오른편으로 이백여 장 돌아가자 바로 해원대가 나타났다.

청운은 해원대 앞에서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해원대 주변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백여 명이 훨씬 넘는 군웅들이 운집해 있었다.

물론 적음쌍마와 흑선의 문제 때문이기는 했으나 청운이 번잡함을 싫어해 고의로 무당행을 두어 달 이상을 늦추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정도라니 청운은 허탈감마저 느꼈다.

더 안 좋은 것은 지금도 속속 사람들이 해원대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청운은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과 너무 다른 상황과 맞닥뜨려서 잠시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다.

청운은 어차피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아예 신경을 끊어 버렸다.

해원대에 오른 청운이 막 북채를 들고 해원고를 내려치려는 순간!

젊은 도사 한 명이 청운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젊은 도사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청의 무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그는 몸매가 단단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한 미남이었다.

그가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는 무당의 삼대 제자 우서영이라고 합니다. 무위검 강소협이시지요. 소협께서는 해원고를 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적송자 사백께서 곧 이리로 오실 것입니다. 소협께서 산문에 당도했을 때 이미 윗전에 기별을 넣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청운도 우서영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당칠검의 한 분이신 현청검 우소협이시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럼 소협의 말씀대로 여기서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 * *

일각쯤 지났을까.

갑자기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원대를 빽빽하게 둘러싼 동남쪽 인파의 숲을 헤치며 네 사람이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천리신개와 혼원벽력도 그리고 흰색 장포를 입은 두 명의 도사였다.

오른쪽의 도사는 거의 반백으로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고, 왼쪽의 도사는 완전 백발이었다.

그는 육십 대 중 후반 정도는 족히 돼 보였다.

오른쪽이 현 무당장령인 현진자 같았고 왼쪽의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노인이 적송자 같았다.

청운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는 그들의 걸음걸이와 신태에서 지고한 현기가 이는 것 같았다.

특히 적송자가 피워 내는 현기는 은연중에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청운의 오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청운이 먼저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무림의 새까만 후배 강청운이 무당의 신선이신 두 분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운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로 답한 적송자가 한동안 청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상대를 위축시키는 눈빛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잠시 후 그가 입술을 뗐다.

“강호의 협명이 자자한 무위검 소협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쁘네. 소협의 기개와 신태를 보니 강호의 소문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알겠네. 나는 소협이 무당에 왜 이런 발길을 한지 이미 알고 있다네.”

“그렇습니까.”

“무당의 전체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모든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네. 내가 선천적으로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로서는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네. 지금도 그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네.”

그 말을 들은 청운이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며 말했다.

“노선배님의 그 말씀은 결과만 합리화하면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논리와 진배없습니다.”

그러자 적송자는 말을 덧붙였다.

“무림은 모든 것이 경쟁이네. 무학을 발전시키는 것도 그렇고, 규모를 키우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뛰어난 제자를 입문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

“강호에서는 누군가 얻는 것이 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잃을 수밖에 없네. 그게 황금이든 명성이든 심지어 남녀 간의 사랑일지라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던가.

말로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약자를 도외시하는 편협하고 부박한 그의 말을 듣고 청운은 분노를 넘어 참담함을 느꼈다.

모두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약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우선 자신들의 이익만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은 철저히 적자생존만을 추구하는 정글의 논리일 뿐이었다.

“노 선배님의 무당만 생각하시는 그 진정성이 강호 전체에는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왜 모르시는지요. 무당 이전에 강호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닙니까.”

“…….”

청운의 말이 끝나자 적송자가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과 나의 가치관이 너무나 다른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무림의 법칙으로 하세. 소협은 몇 초로 했으면 좋겠는가.”

청운이 주저 없이 말했다.

“삼 초면 어떻겠습니까.”

적송자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고수들끼리의 대결에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삼 초면 상대를 알아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겠지. 소협, 나는 얼마 전에 본산의 진산절기인 양의검법과 태극혜검을 통해 새로운 심득을 하나 얻었네.”

“…….”

“그것은 모두 삼 초식이네. 나는 그것에 대천삼검이라고 이름을 붙였네. 소협과의 대결에서 나는 그 삼 초식을 사용할 생각이네. 소협, 나는 내 신념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소협도 그래 주길 바라네. 자—아, 이제 시작하세.”

적송자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운과 적송자는 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했다.

적송자와 대치하자마자 청운은 뭔가가 자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청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송자의 무형지기가 자신의 전신요혈을 압박하는 걸 알았다.

무기 없이 기세만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기상인以氣傷人의 경지였다.

청운은 오늘 일이 참으로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청운은 적송자의 무형지기를 해소할 생각으로 예전 초식을 겸해 무영검으로 허공을 크게 사선으로 한 번 내려 그었다.

찌—르—르—르—릉.

해맑은 소리와 함께 청운을 압박하던 무형지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적송자가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는 정식 비무에 앞서 청운의 무위를 한 번 시험해 본 것 같았다.

적송자가 드디어 자신의 고색창연한 애검을 빼 들었다.

그가 진기를 끌어올리자 축 처져서 바람에 살랑거리던 그의 옷소매가 갑자기 공기를 불어넣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검에서 우윳빛 검광이 거의 이 장이나 번쩍거렸다.

청운도 무영검에 치우전륜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무영검이 우—우—우—웅 하는 청아한 검명을 토하더니 거의 이장이나 되는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장내에 요동을 쳤다.

두 사람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군웅들이 두 사람의 기도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씩 물러났다.

청운이 먼저 쾌—타—절—변—접의 초식을 연환해 출수를 했다.

무영검에서 폭사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적송자의 전신요혈을 금방이라도 짓이길 듯이 번갯불처럼 폭사되었다.

청운의 초식을 일별한 적송자가 자신의 검을 허공에 던지며 일성을 토했다.

“대—천—일—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적송자는 검을 던진 것이 아니라 검기를 던졌다.

그의 검에서 발출된 우윳빛 검기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북풍처럼 강맹했다.

청운의 검기가 번개처럼 빠르면서 거의 직선에 가깝다면.

적송자의 검기는 바위를 만나면 휘어지고 절벽을 만나면 낙하하는 물처럼 유연했다.

그의 검은 어느 순간 직선이기도 했다가, 다른 한순간 돌연 곡선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직선으로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자세히 보니 적송자는 자신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검으로 자신이 발출한 검기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수어검’이었다.

청운은 적송자의 검을 보면서 어쩌면 오늘 자신이 패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우의 검기와 적송자의 검기가 서로 대치한 정중에서 맞닥뜨리자 귀청을 찢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폭음이 울렸다.

향로봉 전체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검기가 닿은 곳마다 돌바닥이 파이고 그 돌가루가 때 아닌 눈처럼 날렸다.

두 사람의 대결을 관전하던 군웅들은 그 굉음에 화들짝 놀라 뒤로 몇 걸음씩 더 물러났다.

뿌옇게 허공을 메웠던 돌가루가 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명확히 드러났다.

청운과 적송자 둘 다 뒤로 한걸음 반 정도 물러난 채 서로가 서로를 경이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적송자가 먼저 출수를 했다.

“대—천—쌍—해.”

적송자가 청운을 향해 던진 우윳빛 검기가 기기묘묘한 각도로 청운의 전신요혈로 쇄도했다.

그의 검기는 빈틈을 찾는 바람처럼 청운의 빈틈을 송곳처럼 찔러왔다.

청운은 쾌—타—절—변—회—접—파척의 일곱 초식을 연환해 자신의 전신요혈을 보호하면서 적송자의 검에 맞섰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굉음이 장내를 들었다 놓았다가 했다.

아까보다 더 자욱한 돌가루가 허공을 뿌옇게 만들었고, 장내를 주시하던 군웅들은 다시 한 번 몇 발짝씩 더 뒤로 물러났다.

장내의 대기가 맑아지자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서로 두어 발자국씩 뒤로 물러난 채 흔들리는 신형을 바로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승패를 가리지 못한 것 같았다.

적송자는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청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운은 그의 눈빛을 대할 때마다 어떤 위축감을 느꼈다.

청운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기세에 두려움을 가지는 건 싸움도 하기 전에 먼저 지는 것이다.

청운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다시 무영검을 단단히 고쳐잡았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동시에 출수했다.

“대—천—만—해.”

“멸—환—.”

적송자가 자신의 최후 심득을 전개한 것 같았다.

청운도 방심하지 않고 치우전륜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멸환을 떨쳐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발출한 검기가 동시에 서로의 전실요혈을 향해 쏘아졌다.

적송자는 이번에도 자신의 검기를 허공에 던지듯이 출수했다.

그런데 아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적송자가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눈으로 검기를 던지는 것 같았다.

‘설마! 목어검?’

청운이 속으로 외쳤다.

손이 아니라 눈으로 검기를 던지는 경지라니, 청운은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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