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무슨 중대한 사단이 생긴 것 같은
“그 문도의 이름은 추현성입니다. 현성이의 말로는 약 두어 달 전 어느 날 갑자기 회천강 나루터에 그 크기가 엄청난 배 한 척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크기가 거의 삼십여 장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양 분타주는 말을 이어 갔다.
“그 배는 겉보기에는 그냥 맛있는 산해진미와 재미를 찾아 강호를 유랑하는 한량들이 탄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현성이도 돈푼깨나 있는 호사가들이 사는 재미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도는 그렇고 그런 배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네, 그런데요?”
“그런데 그렇게 크지도 않은 강에 그 정도 크기의 선박이 출몰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두어 달이 지나도 그 배가 나루터를 떠나지 않자, 그때부터 현성이는 그 배를 유심히 관찰했다고 했습니다.”
“…….”
“현성이는 그 배가 나라에서 금하는 불법적인 일을 도모하는 흑선이 아닌가 의심한 모양입니다. 현성이의 말로는 그 배를 드나드는 인물들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특히 자시부터 축시 정도의 한밤중에는 흑의의 검은 복면을 한 자들이 수시로 그 배에 드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현성이는 체질적으로 호기심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현성이는 우연히 흑의 복면인이 강가에서 세수를 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릴 때 그자의 팔뚝에서 붉은 초승달과 기형도가 그려진 문양을 봤다고 했습니다. 바로 <혈월막>의 표식이지요.”
청운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양춘호를 재촉했다.
양춘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혈월막>은 동영의 자객집단입니다. 닌자라고도 하지요. 혈월막은 닌자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자자한 집단입니다. 그들은 자국에서 주로 권력투쟁의 암투에 개입해서 상대편의 핵심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이 주 임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래서 가끔 자신이 지지하던 집단이 권력투쟁에서 패하면 국외로 탈주를 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동영에서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현성이가 본 혈월막의 닌자는 위기를 느끼고 자국을 탈출한 자들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렇군요.”
“그 보고를 끝으로 현성이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보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현성이의 신상에 틀림없이 무슨 중대한 사단이 생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양 분타주의 말을 다 듣고 난 청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종되었으면 찾아야지요. 문도 한 명 한 명이 다 운명공동체 아닙니까. 실종된 문도의 직급과 직책이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 우리의 식솔들 아닙니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단 하나뿐입니다. 단 한 번 태어나 단 한 번밖에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의 우주입니다.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바로 한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늘 밤 제가 한 번 그 배를 은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양춘호가 청운의 말을 곧바로 받았다.
“사자님, 그러면 제가 지금 즉시 무공이 고강한 문도들로 몇 명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양춘호의 말에 청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양 분타주님,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그 배를 드나드는 자들이 정말로 혈월막의 닌자들이라면 문도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이건 제가 문도들을 무시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바랍니다.”
“네.”
“문도들은 오히려 제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저녁 혼자 아주 은밀히 움직일 생각입니다. 제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섣불리 나서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야 현승이가 만약 그곳에 감금되어 있다면 구출에도 더 용이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자님.”
“아, 다만 한 가지 유의하실 점은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철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일의 성공과 실패는 보안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일은 당분간 저와 양 분타주님만 아는 걸로 하지요.”
“명심하겠습니다.”
“양 분타주님은 저에게 회천강 나루터의 상세한 약도만 그려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성이를 구출할 때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청운은 삼호에게만 은밀히 선박 주변에 대기할 것을 명했다.
* * *
있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밖에 없는 축시의 야심한 밤에 검은 복면에 흑의의 야행복 입은 한 사내가 회천강 나루터 근처의 노거수 우듬지에 홀로 서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부는데도 가지를 밟고 선 그의 신형은 미세한 미동도 없다.
오히려 그 복면인의 신형은 바람에 휘청이는 가지의 흔들림을 즐기는 것처럼 절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
바람을 타는 나뭇가지 그 자체처럼 바람의 결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노거수의 우듬지에서 삼십여 장 떨어진 거대한 선박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흑의인은 바로 좀 전에 하오문의 섬서분타를 떠나온 청운이다.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대한 배는 한 마리 검은 짐승 같았다.
갑판 위에는 바람과 그 바람에 출렁거리는 강물 소리와 칠흑 같은 어둠밖에 없었다.
한동안 배를 뚫어지게 주시하던 그 흑의인은 일순가 한 마리 비조처럼 배의 돛으로 신형을 날렸다.
청운은 돛 위에서 올라서서 선박의 구조를 세심히 살폈다.
갑판의 정중앙에서 아주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당장이라도 그 뚜껑을 열어젖히고 배의 선실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잠시 참을성을 발휘했다.
청운은 잠시 기다리다 보면 틀림없이 갑판으로 누군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어느 정도 내부 사정을 알고 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행하는 것은 천양지차의 결과를 야기할 수가 있다.
자칫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다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맞닥뜨릴 수 있다.
청운은 이런 은밀한 일을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심이라고 생각했다.
참을성 있게 두 식경 정도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레 뚜껑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자는 머리만 빼꼼 내민 채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상체부터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자도 청운과 마찬가지로 검은 복면을 하고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잠시 후 그자가 배의 옆구리에 비상 탈출용으로 매달아 놓은 작은 나룻배를 풀더니 강물로 내렸다.
그자는 곧바로 그 나룻배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상당한 경지의 신법이었다.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중원의 신법은 아닌 것 같았다.
그자는 그 어떤 기척이나 소리도 없이 나룻배를 물가로 몰았다.
나룻배가 물가에 닿자마자 그자는 모래를 파고는 나룻배를 파묻었다.
조심성과 은밀함이 철저히 행동에 배어 있는 자였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밤의 그림자처럼 그자의 뒤를 추적했다.
막 야트막한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청운이 그자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으름장 같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멈추시오! 어딜 그렇게 은밀하게 가시나. 내가 당신에게 꼭 물어볼 말이 있으니 바로 그 자리에 멈추시오.”
“%&+$%&*… %&8+$%&…….”
소스라치게 놀란 그자가 다짜고짜 청운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퍼부어 대며 살수를 전개했다.
그자가 하는 말은 전부 욕지기 같았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말로 하는 욕도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운은 돌연 기분이 나빠졌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공격 수위를 높여 그자를 몰아붙였다.
그자의 검법은 중원의 무학과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자는 검을 휘두르는가 하다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돌연 별처럼 생긴 암기를 날렸다.
그 예측할 수 없는 돌발성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자칫 청운도 그자의 암기에 몇 번이나 적중당할 뻔했다.
청운은 그자를 사로잡을 생각에 방어에 치중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자의 공격 방식을 유심히 주시하던 청운은 드디어 그자의 허점을 찾아냈다.
청운은 그자가 검법을 전개한 후 암기를 발출하기 위해 왼손이 품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쾌—타의 초식으로 그자의 전신혈도를 번개처럼 짚으려 했다.
상대가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한다는 걸 눈치 챈 그자는 마치 소금을 뒤집어쓴 지렁이처럼 발악했다.
하지만 청운과 그자의 무위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났다.
채 십 합도 주고받지 않아 그자는 청운의 날카로운 점혈 수법에 몇 군데 혈도가 점혈 당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그자가 갑자기 나무꾼의 도끼에 맞은 나무처럼 제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바로 절명해 버렸다.
청운은 아차! 싶었다.
그자는 상대가 도저히 자신의 적수가 아닌 걸 알고는 이빨 속에 숨겨 둔 독단을 깨물어 버린 것 같았다.
이런 자살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살수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살수에 대한 사전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청운은 지난번 天의 사자에게 당했던 수법에 또다시 당하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자책한 청운은 그자의 품속을 샅샅이 뒤졌다.
자신의 신분을 보증하는 검은 철패, 여러 개의 약병, 몇 가지 잡다한 물건과 누군가에게 보내는 서찰 그리고 검선의 장진도와 흑황의 장보도가 그자의 품속에서 나왔다.
청운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검선과 흑황의 장진도가 이 자의 품속에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청운은 그 선박을 세세히 조사하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잠시 후, 서찰을 뜯어보았다.
청운이 모르는 글자였다.
동영의 문자 같았다.
청운은 나중에 동영의 글자를 아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기로 생각하고 일단 서찰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청운은 장력으로 대충 구덩이를 파고는 그자를 안장했다.
비록 남의 나라에 와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의 시체가 짐승 밥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알고 보면 이자는 그냥 일개 하수인인 뿐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다 같은 목숨이다.
비록 강호에서는 그 목숨의 무게마저도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살아 있을 때 이야기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다시 그 선박으로 돌아갔다.
갑판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청운은 일단 부닥쳐 보기로 했다.
청운은 갑판의 뚜껑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는 조심스레 배의 선실로 진입했다.
청운은 선실로 내려가자마자 거미처럼 복도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선실은 외부에서 볼 때와는 달리 규모도 상당하고 장식도 화려했다.
바닥에는 서역에서 들어온 것 같은 값비싼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