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82화 (82/184)

082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키려면

과거 반혼시와의 격전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반혼시들은 지금의 천강혈시보다 숫자는 훨씬 많았으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썩은 짚단처럼 잘 베어지기라도 했었다.

반면에 천강혈시들은 말 그대로 무쇠 덩어리 같았다.

머리가 깨지고 피부가 터져 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고 육박 또 육박을 해왔다.

반혼시와 천강혈시 둘 중 어느 것이 더 지독하고 혐오스러운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둘 다 꿈에도 마주하기 싫은 끔찍스러운 마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청운의 눈앞에 있는 것은 반혼시가 아니라 천강혈시였다.

저 마물들은 가루를 만들지 않으면 계속 살아나고 또 살아날 것이다.

저것들을 가루로 만드는 방법은 ‘멸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상을 청운의 상태로는 펼치기에 불가능하다.

자신이 만약 무리해서 극성의 멸환을 펼친다면 천강혈시들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극심한 내상을 입는 청운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던 한순간 청운은 자신이 내뱉은 ‘가루’라는 말에 갑자기 번갯불이 튀는 걸 느꼈다.

혹시 하는 어떤 생각이 청운의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청운은 그 찰나의 순간에 <천기만전>에서 구입한 <무문적> 문득 생각해 냈다.

무문적으로 펼치는 [단천파혼]의 음공에 퍼뜩 생각이 닿았다.

강력한 음공은 사물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부터 파괴한다.

바로 좀 전에 맞닥뜨린 적음쌍마의 음공도 그랬다.

그들의 음공과 부닥치자마자 청운은 내기가 진탕되고 들끓는 걸 느꼈었다.

그들과 대결하는 내내 그것 때문에 청운은 죽을 고초를 겪었다.

끊임없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기경팔맥이 까뒤집히는 걸 억눌러야 했었다.

방금 자신이 당한 음공으로 천강혈시를 깨부수겠다는 생각을 하자, 청운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검이든 음공이든 수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장 저 마물들을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지금 청운은 자신이 죽는 것 빼고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상이었다.

[단천파혼]은 그 가공할 파괴력만큼이나 내력의 소모가 극심한 음공이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청운은 이대로 진력만 소비하다 저 마물들의 제물이 될 수는 없다고 작심했다.

베고 또 베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키기에는 어쩌면 [단천파혼]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을 향해 식인귀처럼 달려드는 천강형시들을 향해 쾌—타—절—변—회—접의 초식을 연격으로 내질렀다.

청운을 덮치던 천강혈시들이 사방으로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숲속에 처박혔다.

청운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품속에서 무문적을 꺼내어 입에 물고는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청운은 즉시 내력을 잔뜩 끌어올려 단천파혼의 단천일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반적 피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공할 음파가 청운이 입에 물고 있는 무문적에서 쏘아져 나왔다.

벼락의 대성통곡 같은 그 음파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이 아니라 모든 걸 파괴하는 저주의 마음이었다.

청운의 주변에 있던 나무며 바위들이 쩍쩍 금이 가더니 급기야는 가죽 북이 터지듯 속부터 터져 밤하늘의 대기에 흩뿌려졌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음파였다.

무문적의 음파가 스쳐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청운을 향해 다가오던 수십 구의 천강혈시들이 불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머리와 가슴이 터지고 팔다리가 망치에 유리가 깨지듯 몸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청운이 연주하는 [단천파혼]은 때 아닌 오밤중에 <수월산장> 주변의 모든 것을 타작해 버렸다.

청운의 연주가 [단천이보]를 거쳐 [단천삼보]에 다다르자 주변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청운 자신과 깜깜한 밤뿐이었다.

청운이 불어 젖히는 무문적의 음파에 닿은 사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부터 파괴했다.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무화되어 갔다.

태고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삐—익 하는 귀청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천강혈시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순식간에 청운의 주변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 이백여 장 정도 떨어진 오른편 송림 속에서 세 개의 검은 인영이 솟구치더니 적벽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달아나는 그들을 뒤쫓아 단칼에 쳐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내력을 끌어올릴 수 없는 중한 내상을 입어, 달아나는 그들을 빤히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앉은 자리에서 웩웩거리며 몇 사발이나 되는 선혈을 토했다.

청운은 자신이 뱉어 낸 선혈에서 풍기는 짙은 혈향에 몸서리를 쳤다.

청운은 서둘러 자신의 품속을 뒤져 내상을 다스리는 약병을 찾아냈다.

청운이 석가장을 떠날 때 제갈신의가 아주 급할 때 복용하라고 챙겨 준 것이었다.

제살신의는 어지간하면 절대 한 알 이상을 복용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약은 독이기도 하니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특히 효과가 빠른 약일수록 독성도 더 강하다고 했다.

가능하면 복용량을 지키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너무 급했다.

그자들이 줄행랑치는 것을 분명히 봤지만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또 다른 적이 전혀 없을 거라고는 청운은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최후의 일 검이라도 펼칠 정도의 내공은 서둘러 회복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두 알의 환약을 꺼내 즉시 입에 털어 넣고는 대충 이빨로 씹은 후 꿀꺽 삼켰다.

청운은 곧바로 운기행공에 돌입했다.

혹시나 다시 있을 급습에 대비해 귀와 감각은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제갈신의가 제조환 환단의 약효는 역시 대단했다.

기경팔맥을 터트릴 듯이 그렇게 진탕되던 내기가 순식간에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급한 상황을 고려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최소한 보름 정도는 꾸준히 운기조식을 하며 정양을 해야 완전히 치유될 내상이었다.

청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청운은 대경실색하며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방원 오십여 장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산장도 없고 소나무도 없고 심지어 바위들도 없었다.

그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과 깊고 깊은 밤의 적막 그리고 청운 자신이 이따금 내뱉는 깊은 탄식뿐이었다.

* * *

형주의 성도에서 십여 리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 중턱.

울창한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하오문의 안가 안에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내가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에 몰두해 있다.

지그시 감은 두 눈 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몽글몽글 맺혀 있고 핏줄이 지렁이처럼 불거져 있다.

그 나이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도를 풍기는 그 사내는 바로 청운이다.

청운은 지금 적음쌍마와 천강혈시에 의해 입은 내상을 다스리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밖도 나서지 않은 채 내상을 다스려온 지 벌써 칠 일째다.

지독한 내상이었다.

오늘 오전에도 대주천을 이미 두 번이나 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청운의 머리 위에는 투명한 자황색의 환이 꽃다발처럼 일곱 개나 피어 있었다.

잠시 후 그 일곱 개의 환은 청운의 호흡을 따라 일제히 콧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제야 청운은 심연처럼 깊고 깊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청운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참으로 지독한 내상이구나.”

앞으로도 족히 칠팔일은 더 정양과 정섭을 해야 완치될 것 같았다.

그날의 상황을 꼼꼼히 되짚어보던 청운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내 행적을 정확히 알고 나를 그 산장까지 유혹했을까.’

그날 청운은 자신을 미행하는 어떤 기척도 주시하는 눈길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설마 하오문 형주분타에 간자가…….’

청운은 남을 함부로 의심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강한 도리질을 했다.

* * *

청운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무림에는 참으로 고수가 황하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암계와 귀계가 얼마나 난무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자칫했으면 그들의 마수에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이번 사태는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무공뿐 아니라 암수에도 극도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청운은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적음쌍마의 적음공도 그렇지만 천음혈사의 천강혈시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마련의 수뇌부는 련주 제혼마검 아래 백제, 흑제, 환제의 삼제와 팔대천왕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드시 무공의 고하로 한 집단의 서열이 정해진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무력 집단의 경우는 대개가 무공수위와 서열이 일치하는 것이 상례다.

특히 마도는 더 그랬다.

오늘 밤 맞닥뜨린 팔대천왕이 저 정도인데 삼제와 제혼마검은 얼마나 더 강할지 청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청운은 자신이 뜻한 바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무공 수위를 좀 더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절실히 느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누구와 맞붙어도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그 자부심이 한낱 미몽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우쳐 주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과 사태가 벌어질지 그리고 자신이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지 청운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을 이리저리 복기하느라 청운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바로 그때 문밖에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주 분타주 양춘호였다.

“호법사자님, 저 양춘호입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청운이 방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양 분타주님, 어서 들어오세요.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양 분타주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말부터 꺼냈다.

“사자님, 여기서 백여 리 떨어진 회천강 나루터 근처 주루에서 점소이로 일하고 있는 한 문도가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뭐라고요?”

“저희 하오문도들 직업이 원래 그렇고 그런지라 처음에는 며칠 지나면 곧 나타나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그 문도가 사라지기 직전 저에게 조금 이상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게 영 개운치 않고 찜찜해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청운이 양춘호에게 어떤 보고이든지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으니 서슴없이 말하라고 했다.

청운은 그게 바로 하오문의 호법사자로서 자신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양춘호가 청운의 말을 곧장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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