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요즘 같으면 진짜 살맛이 납니다.
청운은 그 피리를 들어 올릴 때 적잖이 놀랐다.
피리의 무게가 어지간한 쇠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길이가 두 척이 조금 안 되고 구멍이 다섯 개인 오적 피리였다.
재질은 아무리 봐도 나무 같은데 무게는 나무가 절대 아니었다.
청운은 세심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그 재질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피리의 표면에는 단 하나의 글씨도 무늬도 없었다.
청운이 피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자 주인장이 말했다.
“그 피리는 어떤 장사꾼이 인삼을 거래하기 위해 해동의 백두산 근처 갔다가 구해 온 것이라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그 피리의 재질은 나무 같기는 나무 같은데…….”
“…….”
“그 재질이 워낙 단단해 표면에 어떤 글씨와 무늬도 새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단지 내 짐작일 뿐이니 너무 고심할 필요는 없소.”
청운이 주인장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주인은 은자로 백 냥이라고 했다.
청운은 생각보다 조금 비싸다 싶었으나 한 푼도 깎지 않고 노인이 부르는 값을 그대로 다 지불했다.
피리를 품속에 갈무리한 청운은 곧장 하오문의 형주 분타로 향했다.
* * *
형주 분타는 다른 분타와 대등소이하게 형주 향락가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긴 그런 곳이어야 말로 중원의 정보를 가장 빨리 수집할 수 있는 곳이기는 했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대개 사람의 이성이 무너졌을 때 나온다.
도박장과 기루는 사람의 온전한 정신을 가장 쉽게 허무는 곳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청운이 형주 분타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수십여 명의 하오문 문도들이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청운을 보자 문도들이 일제히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형주 분타의 문도들이 호법사자님을 뵙습니다.”
평생 이런 의전을 받아본 적이 없는 청운은 겸연쩍고 민망했다.
그리고 다소 불편했다.
청운은 선천적으로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사람의 내면을 은연중에 피폐화시키는 주범 중의 하나라고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었다.
청운은 그들의 예를 받으며 내심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곳의 문도들이 어떻게 내가 이 시각에 형주 분타에 올지를 알고 대기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의 안목을 속이면서 자신을 미행할 정도의 고수는 형주 분타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며 청운은 의아해했다.
청운도 그들에게 마주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여러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 올 줄 어떻게 미리 아셨습니까. 저는 누구에게도 제 행로를 말하지 않았는데…….”
무리의 앞에 있던 한 사내가 청운의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형주 분타를 책임지고 있는 양춘호라고 합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호법사자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자님께서 숭산을 내려오실 때부터 저희들은 사자님의 행로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
“검선의 장진도 사태가 마무리된 후 저희들은 사자님께서 바로 무당산에 오르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자님이 성도의 악기점에 들리시는 걸 보고는 혹시 이곳 분타로 오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저희들이 사자님의 안목에 들키지 않은 것은 저희가 미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일하는 방식은 미행이 아니라 그냥 주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길을 지나가는 사람처럼 혹은 옆에서 밥을 먹는 사람처럼 없는 듯 있습니다.”
‘그렇군…….’
“아무리 고수라도 그런 사람은 의심하지 않지요. 그건 그렇고 사자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양춘호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얼굴이 동글납작하고 체격이 다부졌다.
힘깨나 쓰게 생긴 몸이었다.
청운은 그의 안내를 받아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팔선탁이 놓여 있고 간단한 과자와 찻주전자와 세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청운이 양천호가 빼주는 의자에 앉자, 그가 차를 따라주면서 말을 걸었다.
“사자님, 요기 앞 기루의 별실에 주안상을 따로 봐두었습니다. 차를 드시고 거기로 가시지요.”
청운은 양춘호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들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그러겠다고 했다.
다만 기녀들은 부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기루의 별실에는 한 상 잘 차려져 있었다.
별실 입구 쪽 큰 객청에는 일반 분타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청운은 일반 붙타원 모두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고 건배를 한 후 분타주와 그리고 부분타주와 함께 내실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청운이 양춘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가 며칠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잠시 최근 강호의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보고 싶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天과 재천신교, 장진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 그런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하오문의 안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야트막한 산속인데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조용히 며칠 쉬시기에 아주 적당합니다.”
“그리고 혹시 만년화리에 대한 자료도 있으면 좀 부탁합니다. 근래에 어디에서 잡힌 기록이 있는지 좀 찾아봐 주십시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 분타주가 즉시 대답했다.
“쉬실 곳은 제가 즉시 청소를 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그리고 사자님이 원하시는 자료는 몽땅 찾아서 안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청운은 피로도 풀고 복잡한 머릿속도 식힐 요량으로 분타주, 부분타주와 함께 술잔을 권하거니 잦거니 했다.
그렇게 술이 몇 분배 돌고 나자 청운은 기분이 딱 좋을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부분타주는 이미 대취한 것 같았다.
진소구는 횡설수설 했다.
“사자님, 요즘 저희 하오문도들은 사자님 덕분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삽니다. 사자님이 화산파의 육검자와 소림의 무여대사를 꺾었다는 소문이 돌자 그동안 저희들을 무시해 왔던 이곳의 군소방파들이 오히려 저희들에게 고개를 먼저 숙입니다.”
“…….”
“요즘 같으면 진짜 살맛이 납니다요. 사자니~임.”
청운은 술도 적당히 되고 해서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이 자신은 이제 쉬러 갈 터이니 두 분께서는 좀 더 술자리를 즐기라고 하고는 일어섰다.
그러자 양 분타주도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안가까지 자신이 모시겠다고 했다.
양 분타주의 말대로 안가는 한적하고 외진 야트막한 야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이 온통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 고즈넉해 보였다.
안가의 규모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일반 서민 여염집의 두 배 정도 크기였다.
분타주의 말대로 며칠 쉬기에는 적당한 것 같았다.
홀로 피리를 연습하기에도 맞춤인 것 같았다.
청운과 분타주가 안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하오문도 하나가 방문을 열고 급히 밖으로 튀어 나오더니 배꼽 인사를 했다.
청운과 양 분타주는 그 문도가 안내하는 방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청운은 그 방들 가운데 가장 큰방에 짐을 부렸다.
방은 침대와 탁자 하나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것이 청운은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청운이 양 분타주에게 그만 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양 분타주도 그만 물러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청운이 부탁한 서류들은 내일 신시 정도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면 어린 문도에게 시키시면 된다고 말하고는 양춘호가 안가를 나섰다.
* * *
청운은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만악만기>에서 산 악보와 <천기만전>이라는 골동품 가게서 산 피리를 꺼냈다.
살 때도 느꼈지만 피리는 정말 묵직했다.
사실 청운은 무게 때문에 그 피리를 고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운은 악보를 무릎 위에 펼치고는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길게 한번 심호흡을 들이마시고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좀 더 힘껏 불었다.
그러자 삐—비—삐—익 하는 잡소리만 났다.
청운은 순간적으로 피리를 잘못 샀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늙수그레한 노인에게 옴팍 속았다고 생각한 청운은 피리를 입에서 떼어내 등잔 불빛에 찬찬히 살펴보았다.
묵직한 무게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구멍도 적당한 간격으로 잘 뚫려 있고 어디 한군데 파손된 곳도 없었다.
청운은 다시 피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자세도 바로잡고 정신도 집중했다.
목운서점의 황 노인에게서 얻은 [악학천보]에서 터득한 방식으로 피리를 불었다.
여전히 소리가 옳게 나지 않았다.
수십 번을 더 시도하다가 그만 포기하고 청운은 밖으로 나갔다.
작은 바람에도 대나무들은 절묘한 선율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무수한 대나무 가지들이 바람의 현을 켜는 것 같았다.
청운은 오늘 자신이 피리로 내고 싶었던 소리를 대나무들이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니 바람이 대나무의 현을 뜯는, 아니 대나무가 바람의 결을 뜯는 듯한 소리가 더 감미로웠다.
대나무숲에서 매 순간 태어나는 쏴—쏴—쏴—아—아 하는 소리 속에는 세상의 온갖 음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선율 속에는 바다를 가로질러 온 바다의 소리도 있고, 모래폭풍을 뚫고 온 사막의 소리도 있고, 전장의 참담함을 목도하고 온 통곡의 소리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백아절현’의 두 주인공인 전국시대 초나라 거문고의 명인 백아와 그 백아의 소리를 유일하게 알아들을 줄 알았던 종자기도 아마 이런 소리를 지음했으리라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거문고 음을 유일하게 지음할 줄 알았던 종자기가 죽자, 그것을 개탄하여 백아가 자신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어 버렸으리라.
청운은 자신이 괜한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목운서점의 황 노인에게서 악기를 다루는 책자를 얻은 것이 화근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석가장에서 가영과 놀이 삼아 이런저런 악기를 만지다가 그만 악기에 푹 빠져 버린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런 피리를 은자 백 냥이나 주고 사게 됐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청운은 은자 백 냥으로 불쌍한 노인에게 적선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까보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대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지를 출렁거리며 대나무와 대나무들이 서로 부닥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람이 좀 더 사납게 불자 대나무들이 일제히 귀곡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청운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그 피리는 일반적인 음율을 내는 피리가 아니라 오로지 음공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