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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76화 (76/184)

076화 나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비도가 장내로 날아듦과 동시에 바로 그 노거수로부터 한 줄기 음험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비도와 목소리에 실린 위엄과 권위는 대단했다.

일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모두 제자리에 꼼짝 마라! 조금이라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황천길이다.”

그때 장내에 날아든 비도를 바라보던 군웅 중 하나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혈검령이다!”

그 외침을 들은 군웅들의 얼굴빛이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혈검령은 강호의 공포 중 하나였다.

혈검령주가 정확히 누군지는 몰랐지만, 혈검령을 어기고 살아남은 자는 아직 강호에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혈검령을 거의 저승사자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혈검령을 맞닥뜨리는 것을 지옥의 나찰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때 두 마디 비명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혈검령을 무시하고 몰래 장진도를 취하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던 두 사람이 가슴과 이마에 비도를 맞고 그대로 절명했다.

군웅들의 안색이 더 사색이 되었다.

그때 다시 노거수에서 예의 그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경직시켰다.

“감히 내 명을 거역하고 몰래 장진도를 취하려 하다니. 스스로 자신의 명을 재촉한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신에 흑의를 걸치고 얼굴까지 검은 복면을 한 자가 마치 먹줄을 튕기듯 노거수로부터 장내로 쏘아져 내렸다.

그는 마치 육안으로 검안을 하듯 찬찬히 장내를 한 번 쓱 둘러보았다.

그자의 형형한 안광은 자신이 던진 은빛 비수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자가 천천히 장진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청운은 이제 자신도 나설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주변에 은밀히 잠복하고 있는 고수들이 전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나타날 시기를 재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청운이 곧장 장내로 진입하기 위해 막 신형을 솟구치려 하던 바로 그 순간!

“멈추시오!”

오른쪽 숲에서 외침과 함께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모두 청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정도 크기의 맹盟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림맹의 무사들이었다.

맨 앞에서 무리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외당주 매화절검 서일기였다.

서일기는 흑의 복면인이 장진도로 접근하는 걸 막아서면서 말했다.

“혈검령 사자의 높은 절학은 잘 견식 했소, 저는 무림맹의 외당주 서일기라 합니다. 이곳의 일는 이제부터 무림맹에서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혈검령 사자께서는 이만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흑의 복면인은 한동안 서일기를 노려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언제부터 무림맹에서 강호의 보물에 관심을 두었는지 모르겠군. 무림맹은 강호의 일이나 잘 관장할 것이지 이런 일에까지 일일이 관여를 한단 말인가. 혈검령은 무림맹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어디 해볼 테면 마음대로 해 봐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혈검령 사자는 다시 장보도를 향해 발걸음을 한 발 더 내디뎠다.

그 순간 서일기가 자신의 검을 빼들고 은검령 사자를 단호하게 막아섰다.

두 사람은 삼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대치했다.

서일기의 결연한 모습을 본 혈검령 사자가 차가운 냉기를 안광에 흘리며 비아냥거렸다.

“결국 힘으로 한번 해보자는 말이군. 나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갑자기 혈검령 사자가 서일기를 향해 자신의 오른쪽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혈검령 사자의 소매에서 두 줄기 은빛 광채가 서일기의 가슴을 향해 번갯불처럼 폭사되었다.

대경실색한 서일기가 다급하게 자신의 검으로 은빛 광채를 쳐냈다.

쨍그렁, 챙!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서일기의 검에 가로막힌 혈검령 사자의 두 자루 비도가 서일기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왼편으로 날아갔다.

다시 혈검령 사자가 자신의 오른쪽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네 개의 은광이 서일기를 향해 날아갔다.

서일기가 자신의 검을 들어 허공에 둥근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서일기의 검 끝에서 여덟 개의 매화가 피어났다.

화산파의 진산절학인 매화검법이 전개된 것이다.

여섯 개의 매화가 네 개의 은광을 거침없이 쳐냈다.

나머지 두 개의 매화는 그대로 흑의 복면인을 향해 폭사되었다.

혈검령 사자는 흥, 하는 코웃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자신의 양 소맷자락을 아까보다 더 세차게 떨쳐냈다.

그러자 십여 개의 은빛 광채가 서일기의 전신요혈을 노리며 날아갔다.

덩달아 서일기의 검에서도 십여 개의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났다.

흑의복면인의 은광과 서일기의 매화가 중간 지점에서 격돌하자 장내에는 차—차—창—창, 하는 때 아닌 금속성 폭음이 쩡쩡 울려 퍼졌다.

그 격돌의 여파로 인해 주변 거목들의 가지가 태풍을 만난 마구 부러져 나갔다.

장내는 그렇게 부러진 나뭇가지들의 잔해와 군웅들의 부산함으로 인해 온통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혈검령 사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소맷자락을 맹렬하게 떨쳐냈다.

이번에는 이십여 개나 되는 은빛 광채가 서일기의 전신요혈을 향해 폭사되었다.

동시에 서일기의 입에서 무언가 터져 나왔다.

“매—화—만—천.”

드디어 서일기의 최고 절학이 전개되었다.

수십 개의 매화와 은빛 섬광이 장내에서 격돌하자, 귀청을 찢을 듯한 엄청난 폭음이 연속적으로 주변의 대기를 찢어발겼다.

그 충격의 후폭풍으로 주변의 수십 그루 거목들의 허리가 꺾어지고 분질러졌다.

그 틈을 틈타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던 군웅들이 대부분 장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의 숲에도 더 이상 은밀히 잠복한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허공으로 치솟았던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의 잔해가 가라앉자 장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흑의 복면인은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난 채 신형을 비틀거리며 서 있었고, 서일기는 왼쪽 허벅지와 어깨에 비도를 맞은 채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땅을 짚고 서 있었다.

곧바로 서일기를 향해 달려간 부하 하나가 서둘러 서일기의 몸에 박힌 비도를 뽑아 내고는 지혈을 했다.

청운은 더 이상 관망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공력을 잔뜩 실은 일성을 토해 내며 장내로 곧장 진입했다.

“두 분은 그만 싸움을 멈추시오. 나는 강청운이란 강호의 소졸이오. 아직 그 진위도 파악되지 않는 그깟 장진도 한 장을 두고 이 무슨 한심한 작태요.”

청운이 장내로 들어서자 서일기와 무림맹 무사들이 일제히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위검 강 소협을 뵙습니다.”

무위검이란 말에 혈검령 사자도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다음에 또 봅시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 봤자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게 없다 싶었는지 심기가 불편한 말을 끝으로 곧장 신법을 전개해 숲을 빠져나갔다.

청운은 장진도를 주워들고 한 번 살펴보고는 그것을 서일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청운은 서일기를 마주보며 말했다.

“서 당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이 장진도는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그림이 그려진 양피지가 일부러 오래 묵은 것처럼 보이도록 누군가 꼼꼼히 무두질로 장난질을 쳤습니다.”

“…….”

“하지만 양피지의 재질은 틀림없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서 당주님, 제 짧은 소견으로는 무림에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짜 장진도를 강호에 유출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실제로 장보도가 강호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이미 누군가 검선의 절학을 얻었을 것 같군요. 그래서 그 위치만 그려진 이런 가짜 장진도를 유출했겠지요. 이런 사건은 최초로 장진도를 획득한 자를 추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동의합니다.”

“홍화나찰을 서둘러 찾아 어떤 경로로 장진도를 획득했는지를 밝혀내야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 같군요.”

청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서일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 소협, 저도 소협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윗전에도 그렇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어쨌든 소협의 도움으로 일을 무사히 마무리 짓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서일기의 깍듯한 인사에 청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도움은 무슨 도움. 전혀 괘념치 마십시오. 맹주님께 안부나 전해주시지요.”

청운은 서일기 일행과 하직을 하고 형주를 향해 다시 길을 잡았다.

난데없는 장진도 사건 때문에 편안한 밤을 보내지 못한 게 청운은 못내 아쉬웠다.

* * *

난데없는 장진도의 출현 때문에 청운은 밤을 거의 꼴딱 세우고 말았다.

청운은 산길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고개를 들어 초여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에서 이틀 남짓 모자란 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견우성과 직녀성을 좌우에 거느린 은하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밤하늘 한쪽에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까.

멀리 동쪽의 산봉우리 위의 구름을 붉게 물들이며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 새벽바람이 옹달샘의 물처럼 시원했다.

바람은 너무 차지도, 너무 덥지도 않았다.

청운은 비록 잠은 자지 못했지만 막 잠에서 깨어나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를 홀로 들으며 호젓한 산길을 걷는 것도 꽤 괜찮은 호사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깊게 한 번 새벽 공기를 들이켰다.

속이 다 시원했다.

장진도 때문에 복잡했던 정신이 시원한 공기에 헹궈지는 것 같았다.

청운은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산 전체가 자신의 몸속 깊이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시원한 산 공기가 뱃속 가득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면서 자고 있던 위장도 깨운 모양이었다.

청운은 형주의 성도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형주의 들머리에 있는 <천미루> 라는 반점의 이 층 창가 탁자에 잿빛의 옷을 입은 이십 대 중반의 한 사내가 앉아 있다.

그의 탁자 위에는 소홍주 한 병과 구운 오리고기가 놓여 있다.

음식을 가져다 놓은 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구운 오리고기에서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청년은 술 한 잔을 입안에 틀어넣고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초여름 이른 새벽의 대기만큼이나 깨끗하고 맑다.

그는 바로 어제 오후에 숭산을 내려와 형주로 온 청운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그가 내다보고 있는 거리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다.

바로 그때 그의 눈에 곧장 <천미루>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장한들이 들어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어깨에 도를 메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 무림인들 같았다.

저들도 어젯밤 나처럼 밤을 꼴딱 새워 이른 아침부터 허기를 느끼는 모양이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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