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능력이 있으면 가져가라.
겨우 혹은 간신히 하루하루의 생존을 도모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약자들에게 그들이 비틀고 왜곡해 버린 그 질서는 경이로움도, 아름다움도 결코 아니다.
힘없는 약자들에게 지금의 이 질서는 한시라도 빨리 뒤엎고 끊어내야 하는 잘못된 억압의 수레바퀴일 뿐이다.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청운은 여태껏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를 자신이 단번에 풀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눈앞에 뻔히 보이는 악마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악을 희석시켜 악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청운은 거듭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청운은 그런 자들에게 순응하고 타협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청운은 天이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악들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天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청운은 다짐했다.
* * *
형주는 인구도 많고 물산도 풍부해서 시대를 막론하고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누구라도 형주를 차지하면 그만큼 중원을 도모하기가 쉬웠기에 형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전쟁이 역사적으로 끊이지 않았다.
북방을 도모하기에 형주는 최적의 군사적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형주는 힘없는 민초들에게는 최악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형주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자, 형주에서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청운의 뇌리에 다시금 새록새록 떠올랐다.
청운은 그 어떤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의 생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권력욕과 부귀영화를 탐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채 청운은 어둑한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청력을 최대한 돋우자, 그 소리의 발원지는 청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왼쪽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처음에 청운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가던 길을 그대로 계속 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목청이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자, 청운은 가던 길을 포기하고 다급하게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네 명의 사내들이 한 젊은 여인을 포위한 채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장내의 중앙에 있는 여인은 머리를 산발하고 있어 나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붉은 홍의를 입은 그녀는 오른손에는 붉은 뱀 같은 긴 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군데 중한 상처를 입고 있었고, 이마에는 진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기력이 거의 쇠진한 듯 그녀는 연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에워싼 사내들을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한기가 돌 정도로 차갑고 표독스러웠다.
반면에 그녀를 포위한 사내들은 별다른 부상 없이 신형을 꼿꼿이 세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사십 대 중후반의 흑의인들로 모두가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하나는 검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무게가 꽤 나갈 것 같은 날이 두꺼운 도를 들고 있었다.
나머지 둘은 각각 은백색이 번쩍이는 륜과 시커먼 철선을 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자신을 포위한 사내들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홍의 여인이 날카로운 일갈을 토했다.
“산음사귀, 부끄럽지도 않은가. 사내 넷이 가녀린 여인 하나를 이렇게 핍박하다니…….”
홍의 여인의 말이 너무나 기가 차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 있던 흑의인이 앙천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으—하—하—핫. 홍화나찰. 오십이 훨씬 더 넘은 네년이 지금 자신을 보고 가녀리다고 했느냐. 네년의 독심이 사갈보다 더 악독하다는 걸 강호 전체가 다 아는 일이거늘, 정녕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구나.”
흑의인은 그녀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강호의 예법으로 보나 독한 손속으로 보나 우리보다 네년의 악명이 훨씬 더 윗길이다. 네년이 진정 강호의 정의를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잔말 말고 내놔라. 우리는 네년의 그 늙어빠진 목숨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양 볼을 씰룩거리며 흑의인의 말을 듣고 있던 홍화나찰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네놈은 이 홍화선자께서 나이를 먹는데 뭐 보태준 게 있느냐. 갑자기 웬 나이 타령이냐. 강호의 누님에게 인사라도 똑바로 하던지. 버르장머리하고는. 그리고 다짜고짜 뭘 내놓으란 말이냐.”
흑의인이 음산한 냉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흐, 흐, 흐. 우리가 바보 천치인 줄 아나 본데, 꼭 내 입으로 그게 뭔지 말해야 하느냐. 우리는 네년의 품속에 있는 검선의 장진도에 관심이 있지. 네년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 썩 내놓고 꺼져라.”
검선의 장진도!
그 말에 일순간 주변의 숲 이곳저곳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숲 근처 은밀한 곳에 수십 명이 넘는 인영들이 잠복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청운은 이미 한참 전에 현장에 도착하고도 일부러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사태의 추이를 좀 더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청운도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선의 장진도라니!
검선은 삼백여 년 전에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오시했던 인물 아니던가.
그의 자전십이파검은 당대에 적수가 없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검선의 장진도가 갑자기 출현하다니 강호에 한바탕 풍파가 불어닥칠 게 틀림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하필이면 天과 재천신교 같은 혹세무민하는 집단이 속속 발호하는 이 대혼란의 시대에 검선의 장진도가 출현하다니.
장진도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강호에 대고 못된 장난질을 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일단 장진도의 진위 여부부터 세심히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 숲 곳곳에서 수십여 명의 인물들이 장내에 진입했다.
장내에 나타난 인물들은 나이와 행색도 다양했고 소지하고 있는 무기들도 다양했다.
심지어 승복를 입은 승려와 도포를 걸친 도사들도 보였다.
하지만 청운은 진짜 고수들은 아직도 은밀한 곳에 숨어서 장내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지켜보기만 할 뿐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운 역시 좀 더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생각하고는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내에 있는 모두가 탐욕으로 두 눈이 번들거렸다.
보물에는 성과 속이 따로 없었다.
그때 검은 승복을 입은 자가 불호를 외우며 홍화나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 승려는 오십 대 중후반으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그가 합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천애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장진도를 탐하면 필연적으로 피를 볼 게 뻔합니다.”
“…….”
“우선은 장진도의 진위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빈승은 생각합니다. 홍화선자께서 저에게 장진도를 보여주시면 제가 사심 없이 진위를 판별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홍의나찰을 포위한 채 흑의 승려를 송곳의 끝처럼 날이 잔뜩 선 눈빛으로 째려보던 음산사귀 중 하나가 말했다.
“때려 치워라, 흑불. 근본도 없이 땡중 노릇을 하며 선량한 양민들을 꾀어내 혹세무민하더니 하다 하다 이제는 검선의 장진도에까지 눈독을 들이는 것이냐.”
사람들 앞에서 크게 모욕을 당한 흑불의 인상이 사납게 이지러졌다.
그러나 음산사귀 중 하나는 말을 이어 갔다.
“이곳에는 네놈의 그 빤질거리는 세 치 혀에 놀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썩 꺼져라. 빌어먹을 땡중.”
흑불은 자신을 모욕한 음산사귀 중 하나를 향해 노도와 같은 장력을 쏟아냈다.
그러자 음산사귀 중 둘이 합세해 흑불을 상대했다.
장내에 갑자기 장영과 검기가 난무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홍화나찰은 슬금슬금 장내에서 뒤로 몸을 빼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장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수십여 명의 군웅들이 홍화나찰을 포위했다.
상대가 다음에 뭘 하는지 알려면 상대의 손과 발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강호의 불문율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입과 눈은 거짓말을 해도 손과 발은 제가 하려는 일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장내에 운집한 사람들은 그것을 충분히 알고 남을 정도로 닳고 닳은 자들이었다.
도포를 입고 염소수염을 기른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도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홍의나찰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홍화선자. 저 현호자에게 장진도를 건네주시면 진위 여부만 판단하고 다시 그대로 돌려드리겠소. 나는 여태껏 거짓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한 번 믿어 보시지요.”
홍화나찰이 앙천대소를 하며 빈정거렸다.
“때려치워라. 현화자. 아니, 사음노사! 네놈이 여태껏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강호의 당나귀가 다 웃을 일이구나.”
홍화나찰의 조롱을 받은 사음노사는 얼굴의 근육을 있는 대로 씰룩거렸다.
“네놈의 그 칠흑보다 더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사기를 치려거든 좀 제대로 쳐라. 이 호랑말코 도사 놈아.”
그 말을 들은 사음노사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홍화나찰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홍화나찰도 사음노사의 권풍에 맞서 붉은 채찍을 사납게 휘둘렀다.
둘의 싸움은 막상막하였다.
그새 홍화나찰이 기력을 좀 회복한 것 같았다.
홍화나찰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느낀 사음노사가 군웅을 선동했다.
“여러분,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소. 일단 홍화나찰로부터 장보도를 먼저 취한 후 우리끼리 다시 장보도에 관해 상의하기로 합시다.”
사음노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화나찰을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이 일제히 홍화나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경실색한 홍화나찰의 얼굴빛이 멀리서 보기에도 사뭇 심각해졌다.
홍화나찰은 한순간 뭔가 큰 결심을 한 것 같더니.
별안간 자신의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허공 높이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검선의 장진도다. 능력이 있으면 가져가라.”
그 순간 홍의나찰을 공격하던 군웅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장진도를 먼저 잡아채기 위해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장내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장내를 지배하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오직 장진도에 대한 군운들의 탐욕뿐이었다.
바로 그때 장내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커다란 노거수에서 번쩍하고 뭔가가 장내에 날아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은빛 비도였다.
길이가 한 척 정도 됨직한 비도의 옆면에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은 피빛 혈룡이 번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