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74화 (74/184)

074화 시주, 내가 패배를 인정하네.

숭산이 중원 오악의 상징이라면 소실봉은 소림의 상징이다.

소실봉에서 내려다보면 소림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그래서 예로부터 소림의 이름난 무수한 고승들은 소실봉 근처의 암자나 동굴에서 자신의 마지막 심득을 구하기 위해 은거 아닌 은거를 했다.

그 결과 소림사 장경각의 책장은 누대에 걸쳐 점점 더 빼곡해졌다.

소림사의 수많은 전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실봉 공터에 오십 대 중반의 늙수그레한 노승과 이십 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이 서로 마주보며 석상처럼 대치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소림의 승려들과 우연히 소림에 분향하러 들렀던 향화객들이 두 사람의 대치를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승은 왼손에 보통보다 훨씬 알이 굵은 염주를 연신 굴리고 있었다.

반면에 노승과 오 장여 거리를 두고 마주한 젊은 청년은 무심한 눈빛으로 소실봉 위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은 바로 대결을 목전에 둔 무여대사와 청운이다.

한동안 자신의 왼손에 있는 염주만을 일삼아 굴리던 무여대사가 청운을 보고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세.”

무여대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운은 무여대사가 뿜어대는 무형지기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화산의 태청일검에서 느꼈던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무형지기였다.

태청일검의 무형지기가 피부를 갈라치는 듯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면.

무여대사의 무형지기 속에는 커다란 쇠 종으로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중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근추 수법을 이용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고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청운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전신이 땅속에 박힐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무여대사가 본격적으로 초식을 펼치기에 앞서 청운의 내공을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청운도 실질적 대결에 앞선 예전초식를 취하는 척 무영검을 빼서 크게 한 번 허공에 휘돌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무여대사의 무영지기가 흔적도 없이 해소되었다.

청운이 예전 초식을 마무리하듯 자신의 검을 가슴 앞에 끌어당긴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대치를 긴장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젊은 소림승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저 단순한 동작 하나로 사숙의 그 유명한 항마촉지인을 저렇게 쉽게 해소하다니… 저 젊은 시주의 경지가 도대체 얼마나 지고한 것인가. 아! 나는 아직 멀어도 너무 멀었구나.”

청운이 간단한 예전초식으로 자신의 무형지기를 일거에 해소하는 걸 본 무여대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한 가닥 베어 물더니 자신의 왼손에 쥐고 있던 염주를 하늘로 던지며 일성을 토해냈다.

“불 — 법 — 만 — 변.”

무여대사가 발출한 백팔 개의 염주 알들이 마치 바짝 당긴 쇠뇌를 놓은 것처럼 청운의 전신 요혈을 노리며 쏘아져 왔다.

백팔 개의 염주 알들이 초여름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청운은 회—접의 초식을 연환해 무영검을 허공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던 주변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운의 전신 요혈을 향해 쇄도하던 백팔 개의 염주 알들은 마치 무슨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일제히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이내 장내에서 수십여 장이나 떨어진 고래등만 한 바위에 가서 퍽—퍽—퍽—퍽 박혔다.

염주 알들은 오금석만큼이나 단단한 화강암 바위를 한 자 이상이나 파고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이나 멈추지 않고 계속 회전했다.

이번에는 청운이 먼저 출수했다.

청운의 입에서 자신을 쥐어짜는 듯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쾌 — 타 —절 — 변 — 파척!”

청운은 다섯 개의 초식을 연환해 한 초식으로 만들어 무여대사를 몰아쳐 갔다.

청운의 무영검에 발출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는 마치 백주대낮에 때 아닌 성운이 일고 유성이 쏟아지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청운의 검기를 본 구경꾼들은 대경실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삼사 장씩이나 더 주춤주춤 물러났다.

청운의 이번 공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무여대사는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치의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무여대사의 승복 소맷자락이 갑자기 공기를 불어 넣은 듯 우산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부풀대로 부푼 소맷자락을 허공에 떨쳐내며 무여대사가 일갈을 토했다.

“여 — 래 — 천 —천.”

드디어 대반야금강공에 바탕으로 한 소림의 진산절학이 무여대사의 양손에서 전개되었다.

마치 사천왕의 손바닥 같은 무수한 장영이 우레와 같은 파공음을 내며 무여대사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왔다.

무여대사의 여—래—천—천에는 천근 바위처럼 무겁고 대해처럼 장중한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성운 속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무영검의 검기와 성난 바위 같은 무여대사의 장력이 허공에서 격돌하자, 장내는 마치 수십 가닥의 벼락이 내려친 듯 단단한 화강암으로 된 바닥 곳곳이 깨어지고 패여 돌가루가 날렸다.

두 초고수가 격돌한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무공이 약한 수십여 명의 군웅들이 그 여파에 휩쓸려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털썩털썩 엉덩방아를 찧거나 나뒹굴었다.

그 격돌로 청운이 두어 발 뒤로 물러난 반면, 무오대사는 쿵—쿵—쿵—쿵 대여섯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난 후에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았다.

무여대사의 안색은 백납처럼 창백했다.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한 줄기 혈흔까지 내비쳤다.

이번 일초의 교환으로 청운보다 무여대사가 훨씬 더 많은 손해를 본 것 같았다.

마지막 초식에서는 무여대사가 틀림없이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는 필생의 비기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한 청운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멸환을 펼치기로 작정했다.

청운이 멸환을 전개하기 위해 무영검에 진기를 잔뜩 주입하자 우—우—우—웅 하고 무영검이 부르르 떨며 중후한 검명을 토했다.

무영검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거의 이 장이나 춤을 추듯 장내에 일렁거렸다.

청운의 그런 모습을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던 군중 중 하나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경악성을 내뱉었다.

“검신이구나. 검신. 저 어린 나이에 벌써 저런 경지에 도달하다니,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멸환을 펼치려고 준비하는 청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무여대사가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주, 내가 패배를 인정하네. 나는 마지막 초식은 펼치지 않기로 했네. 그 나이에 벌써 현경을 넘어서는 경지라니. 소협이 이겼네. 이건 서로 초식을 교환하지 않아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네.”

무여대사는 자신의 양손을 허공에서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갔다.

“꼭 맞붙어 보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거리지. 소협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네. 그리고 소협이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길 나도 바라겠네. 잘 하산 하시게.”

* * *

청운은 숭산을 내려오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여대사가 天에 대해 다시 엄밀히 조사해 보고 나서 자신의 입장을 정하겠다며 말미를 달라고 했을 때 청운은 하마터면 그의 제안을 수락할 뻔했다.

청운이 조금만 양보했다면 굳이 무여대사와 승부를 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청운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에 하나둘 양보를 하다 보면 결국엔 모든 일이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흘러가 버릴 것이 청운은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리고 청운의 입장에서는 이참에 무여대사와 天과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는 것이 바로 자신과 天과의 경계를 명확히 구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天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강호에 널리 알리는 길이라는 생각도 했다.

한 개인인 자신이 강호의 거대한 조직인 天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天의 진정한 실체를 만천하에 낱낱이 까발려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천 길 짙은 어둠 속에 똬리를 틀고, 뒤에서 은밀히 흉악한 암계를 꾸미고 있는 天.

그 음험한 실체를 밝은 태양 아래 끄집어내고, 그들의 위선적인 가면을 확실하게 벗겨야 현재 天에 대해 우호적인 세력들이 天의 그물망을 찢고 조금이라도 더 밝은 곳으로 하나둘 나올 것이다.

정파와 마도 그리고 관과 황궁에 있는 天의 세력들을 하나둘씩 떨구어 내면 천은 결국 발악을 하며, 스스로 자신의 흉신악살 같은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청운은 그 방법이 天을 상대하는 가장 무모하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산문을 벗어난 청운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는 눈 아래 장대하게 펼쳐진 중원의 산천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읊조렸다.

“저 멀리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인다. 아주 오래 힘들게 홀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다음은 무당이다.”

* * *

청운은 서둘러 길을 재촉하면 무당산과 그리 멀지 않은 형주에서 오늘 밤을 편히 유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본 청운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묘보허의 경신술을 펼치며 바람처럼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청운은 숭산에서 형주로 오는 길에 곳곳에 산재한 초분과 양민들의 피난 행렬을 보았다.

안 그런 적이 거의 없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더기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민생이 파탄나는 지금의 시기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대혼돈의 시대가 아닌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민초들의 목숨을 담보로 권력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위정자들이 청운은 죽도록 싫었다.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은 세상이 그렇게 되도록 수시로 전쟁을 발명하는 흑상과 같은 자들이었다.

매일 해가 떴다 지고, 시기에 딱딱 맞춰 계절이 바뀌고, 그 계절에 맞춰 만물이 태어나고 성장하다가 사멸하고 다시 그것을 반복한다.

영원히 이어지는 우주와 세상의 질서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바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기대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나쁜 인간들이 경탄과 감탄의 대상인 그 자연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마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왜곡하고 전유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살벌한 질서를 만들어 대대손손 약자를 착취해 호의호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자들은 그렇게 약자들을 착취해 얻는 힘과 황금으로 다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자신들에게 더 편한 질서를 끊임없이 재창조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게 세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고 질서라고 약자들에게 강요하고 세뇌까지 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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