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이기는 사람의 뜻대로 하세.
일 다경쯤 지났을까.
청운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자신이 소림사에 온 목적마저 잊고 있을 때.
소실봉 쪽으로 올라갔던 정각이 객당의 문을 살며시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정각이 불호를 외우며 합장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소협, 방장선사의 명을 받고 소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청운은 정각을 마주보며 합장을 하고는 정각을 따라나섰다.
정각은 본당인 대웅전을 왼쪽으로 끼고 돌더니 아무런 현판도 없는 조그마하지만 정갈한 한 전각 앞에 멈추어 섰다.
정각이 닫힌 문을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장스님, 강 소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에서 나지막하지만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시거라.”
정각이 청운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문을 열어 주었다.
청운은 정각에게 목례를 한 후 계단을 몇 개 올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청운이 마루에 올라서자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소협, 왼쪽에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왼쪽 두 번째 방문 앞에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살짝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오십 대 중후반의 풍채 좋은 노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호를 외우며 청운에게 합장을 했다.
그가 바로 소림의 현 방장인 무오대사였다.
청운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는 머리에는 아홉 개의 계인이 선명했다.
무오대사가 기거하는 방는 검박하기 짝이 없었다.
단 하나의 장식품도 놓여 있지 않고 단 하나의 문구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이 성정과 취향이 얼마나 깔끔하고 정갈한지 알 만했다.
경험상 저런 성격일수록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무오대사는 다소 붉은 빛을 띤 안색에 맑고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달마대선공을 십이성 대성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전신에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불기가 가득 풍기는 것 같았다.
청운은 합장을 끝냄과 동시에 최대한 예를 갖추며 말했다.
“강호의 후배 강청운이 소림의 고명하신 방장선사님을 뵙습니다.”
청운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무오대사가 말했다.
“고명은 무슨 고명, 다 덧없는 허명이지요. 자 이리 앉으시지요. 차나 한잔 합시다. 이래 보여도 이 차는 소림사 불자들이 소실봉 아래서 한철 내내 울력을 해서 키워 낸 귀하디귀한 정성이 들어간 차입니다. 자 한잔 받으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느긋하게 차를 드시고 계시면 곧 사제도 당도할 것입니다.”
무오대사가 이 자리에 자신의 사제를 청했다는 소리를 듣고서 청운은 무오대사가 자신이 왜 소림을 방문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청운은 무오대사에게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었다.
“방장 스님의 깊은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청운의 인사를 받은 무오대사가 자신의 오른손에 끼고 있던 적갈색의 염주를 굴리며 혼잣말을 했다.
“善者不來, 來者不善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 — 착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
“소협이 가고자 하는 길이 참으로 외롭고 힘든 길 같군요. 왜 소협은 편한 길을 다 마다하고 굳이 그런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가려는 것이오. 아—미—타—불!”
무오대사의 불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방장실의 문을 벌컥 밀고 들어왔다.
“아—미—타—불!”
그는 방장실에 들어섬과 거의 동시에 불호를 외우며 무오대사에게 합장을 했다.
살짝 숙인 그의 머리에도 아홉 개의 계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공력을 전혀 운공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가 무오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장 사형 그간 별래무양하셨는지요. 그런데 어쩐 일로 소실봉 차밭지기인 저를 다급하게 찾으셨는지요. 무슨 특별한 분부라도 계시는지요.”
무오대사가 그를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사제, 자 이리 오게. 내가 요즘 강호에 혁혁한 무명을 떨치고 있는 시주 한 분을 사제에게 소개하고자 사제를 청했네.”
무오대사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서로를 소개하겠네. 여기는 내 사제 무여라고 하네. 소림의 막중한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지. 그리고 이쪽은 근래 강호에서 눈부시게 떠오르고 있는 신성인 무위검 강청운 소협이네. 서로 인사를 나누시게.”
청운은 무오대사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여에게 공손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무여대사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그지없는 영광입니다. 저는 안휘현의 무명소졸 강청운이라 합니다.”
무여대사는 청운의 전신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겸양도 너무 지나치면 오만이라네. 무위검 강 소협이 무명소졸이면 강호에 무명소졸 아닌 자가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어디서 무슨 무학을 배우고 익혔기에 그 나이에 이런 기도를 가질 수 있는가.”
“…….”
“강호에 기사가 수두룩하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강 소협만 한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도 더 이상 없을 것 같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무오대사가 두 사람의 소맷부리를 잡아끌며 말했다.
“자, 자, 두 분 다 서서 그러지 말고 이리 앉아서 차라도 한잔 들며 이야기를 하세. 자, 어서 앉게. 안 그래도 내가 두 분을 위해 이렇게 차를 준비했네.”
무여대사와 청운이 무오대사의 권유에 따라 좌정했다.
그리고 무오대사가 방금 우려낸 차를 청운과 무여대사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청운의 전신을 찬찬히 바라보던 무여대사가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소협, 화산의 일은 이미 들어서 나도 알고 있네. 바로 그 일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빈승은 소림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네.”
“네, 맞습니다.”
“음… 일반 대중이 보기에는 소림이 그냥 불법이나 닦는 중원의 제법 큰 불법도량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몰라도, 속속들이 그 속내를 알고 보면 매일 무수히 많은 일이 얽히고설키는 곳이 또한 소림이네.”
“…….”
“여러 가지 불사를 비롯해 곳곳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네. 그래서 빈승이 중원의 상인연합체인 상련으로부터 약간의 시주를 이따금 받아 왔네.”
청운의 표정을 살핀 무여대사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건 절대 빈승이 그들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네. 그들이 자발적으로 소림에 시주를 한 것이라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내가 그들의 뒤를 봐준 것도 지금까진 하나도 없네. 그건 빈승이 장담하네.”
“그렇군요.”
“다만 빈승이 유일하게 한 일이라고는 상련을 무림맹의 장로들과 숭산 근처의 여러 군소문파들에게 소개해 준 것뿐이네. 그게 그리 잘못된 일인가. 그건 서로 좋은 일 아닌가.”
“…….”
“무력을 가진 문파들이 상련을 보호해 주고, 상련이 그 보답으로 각 문파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편의를 봐주는 게 그리 나쁜 일인가.”
무여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밝혀 나갔다.
“나도 화산에서의 일을 듣고 나서 최근에야 天에 대해서 조사를 다시 해보았네. 하지만 나는 아직도 天에 대한 특이한 사항을 전혀 발견하지는 못했네.”
“네.”
“내 생각에 天은 그냥 중원의 상인연합체인 것 같네. 소협, 내가 뭘 잘못 파악하고 있는가. 이참에 소협이 아는 걸 전부 내게 말해 주게.”
무여대사의 말을 다 경청한 청운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청운은 화산의 육검자에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
거기에다 약간 말을 덧붙였다.
“대사님, 스스로 정의를 판단하고 불의를 벌하는 위치에 선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는 오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대사님과 상련 간에 행해진 거래는 두 당사의 입장에서는 전혀 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 이득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두 당사자 간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도 금력도 전혀 가지지 못한 무고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청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달리 말해 天이 매달 소림에 시주하는 돈의 대부분은 아무런 힘이 없어 天에 전혀 대항하지 못하는 약자들의 목줄을 죄어 마련한 것입니다.”
“…….”
“天의 무리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중원 곳곳에서 힘없는 자들의 피땀과 고혈을 쥐어짜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에 물든 족속들입니다.”
“…….”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나라 간의 전쟁을 부추기고 발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피해자 중 하나입니다. 하남, 하북, 산서, 산동표국들이 그들의 끝없는 탐욕 때문에 하룻밤 새 멸문의 화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대사님이 그들 무리의 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소림을 자신의 편으로 여깁니다. 대사님이 그들로부터 받는 돈은 바로 그들이 무수한 약자들의 목숨을 빼앗은 대가로 마련한 것입니다. 그 어떤 명분으로라도 더 이상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빈승은 그들을 악이라 생각하지 않는데, 소협은 그들을 천하의 둘도 없는 악의 무리로 단정하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그들 무리는 건전한 상인연합이 아니라 흑상의 무리입니다. 그 흑상이 바로 天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당장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중생을 위하는 길입니다. 대사님이 제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제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청운의 말을 다 들은 무여대사가 한동안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청운에게 말했다.
“아—미—타—불! 소협, 나에게 일 년의 말미를 주게.”
“…….”
“내가 그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난 후 빈승의 입장을 다시 정하겠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지 않는가?”
무여대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운이 즉시 무여대사의 말을 받았다.
“대사님, 그건 곤란합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지금 당장에도 중원 곳곳에선 그들 때문에 매순간 생목숨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
“그런 참혹한 사태를 일 년이나 무심이 지켜볼 인내심이 저에겐 없습니다. 당장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해 주십시오.”
청운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무여대사는 한참을 고심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빈승은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시주는 한시도 기다릴 수 없다고 하니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구려.”
“…….”
“일각 후 소실봉 아래 공터에서 만나세. 이기는 사람의 뜻대로 하세. 화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초의 교환으로 모든 걸 마무리하세. 시주, 빈승이 정한 방식을 받아들이겠는가?”
청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대사님의 뜻을 수락하겠습니다.”
무여대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의 사형인 장문인과 청운에게 가볍게 합장을 한 번 하고는 방장실을 나갔다.
청운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합장을 하고는 다시 객당으로 돌아갔다.
청운은 지그시 눈을 감고 무여대사와의 대결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의 무겁고도 중후한 무학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자신의 잠시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