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아무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청운은 제갈신의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진심 어린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그동안 자신의 속에만 꿍쳐 둔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깊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신의님 제가 이곳 석가장에 머문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태산처럼 많은 할 일을 미뤄 두고서 이렇게 세월만 보내고 있자니 갑갑해 미칠 지경입니다.”
“…….”
“치료를 앞당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 몸에 조금 무리가 가도 상관없습니다. 신의님,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청운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도 제갈신의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청운이 계속 애원하며 매달리자 제갈신의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있기는 있는데 굳이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치료의 시간만 조금 더 견디면 완치될 수 있는데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치료시기를 인위적으로 앞당길 필요가 있을지… 아무래도 그 방법은 하지 않는 게 더 낫겠습니다.”
제갈신의의 단호한 거절에도 청운이 계속 떼를 쓰자 제갈신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시술의 위험성을 청운에게 설명했다.
“사람의 인체는 자연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능하면 그 순리를 거스르지 않아야 합니다. 순리를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 감지하지 못해도 반드시 크나큰 해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이지요.”
청운의 표정을 본 제갈신의는 말을 이어 갔다.
“지금까지 사람 인체에 관해 제가 연구한 바로는 부득이하게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침은 하루 한 번 시술하고, 탕약은 하루 세 번 복용한 것이 인체의 순리를 따르는 가장 안전한 치료법입니다.”
“그렇군요.”
“네, 만약 치료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침을 더 자주 시술하고 탕약을 더 많이 복용하면 인체 대사작용의 근간이 되는 오장육부가 심각하게 상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 방법은 자칫하면 오장육부가 평생 사용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기력을 앞당겨 소진시키는 사태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소협,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청운이 그래도 상관없다고 거듭 우기자 세갈신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후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리 다른 방법을 사용해도 최소 보름은 걸립니다. 침은 하루에 세 번 시술하고, 약은 다섯 차례 복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하기만 한다면 위험을 감수한 만큼 소협의 무위는 한 단계 더 상승될 수도 있습니다.”
청운은 제갈신의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한참을 뭉기적거리다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것은 바로 적곤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청운 자신이 적곤의 내단을 흡수하면 지금 자신의 몸속에서 각기 따로 노는 네 종류의 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청운의 질문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제갈성의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소협, 그건 아예 꿈도 꾸지 마십시오. 적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마물입니다. 그 마물은 세상의 분노란 분노를 모두 발현한 분노의 화신입니다. 적곤의 내단이 가진 화기의 수준은 만년삼왕이나 만년화리 내단의 열 배도 더 넘어섭니다.”
“…….”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적곤의 내단을 복용하는 바로 그 순간 그 화기에 온몸이 타서 한 줌 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적곤에 대한 생각은 영원히 잊으십시오. 그리고 적곤의 실체는 전설로만 전해질 뿐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청운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며 제갈신의에게 대파산의 선하령에서 적곤을 본 이야기를 했다.
제갈신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청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동안 그렇게 청운을 쳐다보던 제갈신의가 다시 말했다.
“소협, 제가 판단할 때 이미 소협의 경지는 초일류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 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현경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런 소협이 대체 무엇이 아쉬워 그런 마물의 내단을 흡취하려고 합니까. 한 십여 년만 이대로 수련하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천하에 소협의 적수를 찾기가 힘드실 겁니다.”
“…….”
“뭐가 그리 급하신지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당장 두 쪽이 나도 적곤은 안 됩니다. 적곤은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마물입니다.”
청운이 얼굴에 한 가닥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신의님, 오해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적곤을 상대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적곤을 저대로 놔둬 천년이 되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마물이 되어 세상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다기에 한 번 여쭤본 것입니다.”
“아… 다행입니다.”
“저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미욱한 저를 치료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청운은 제갈신의에게 깊게 묵례를 한 후 의방을 나왔다.
청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제갈신의 말대로 보름만 더 치료를 받자. 이미 한 달도 받았는데 그깟 보름이 뭐 그리 힘들까.’
치료가 완벽히 끝나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자신의 무공도 한 단계 정도는 더 올라갈 수 있다는데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 * *
계절의 순환은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어느새 꽃을 이어받은 녹음이 세상천지를 자신의 푸르름으로 뒤덮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짙은 녹음의 휘장만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그 녹색의 휘장과 한 몸으로 어울린 푸른 하늘과 누런 대지는 바로 이 순간이 여름의 초입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있었다.
푸른 수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처절한 매미 울음이 안 그래도 더운 관도를 점점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습습하고 더운 내가 훅훅 끼쳤다.
매미들은 지상에서의 자신들 삶이 너무나 짧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미들은 그만큼 더 치열하게 온몸으로 한철을 우는 것 같았다.
매미들은 마치 깨알에서 참기름을 짜내듯 더 이상 짜낼 수 없을 때까지 자신의 몸속에서 울음을 짜내고 있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그 며칠 동안만이라도 한 올의 후회도 없이 살기 위해 매미들은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청운은 갑자기 산다는 게 원래 저리 처절한 것인가 싶어 마음 한쪽이 짙푸른 녹음처럼 숙연해졌다.
* * *
뜨겁고도 처절한 매미의 울음 속을 유영하듯 헤치며 한 사내가 관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의 그 사내는 무슨 상념이 그리 깊은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십여 장 앞만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여름 속의 얼음처럼 서늘한 기도를 내뿜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가야 할 길만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적당히 잘생긴 호남형의 얼굴은 자신이 입고 있는 단출한 회색의 무복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사내의 허리에서는 사내의 팔 길이보다 세 치 정도 더 긴 고색창연한 장검이 사내가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치 한 몸처럼 가뿐가뿐 흔들리고 있었다.
이따금 사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가야 할 먼 길을 바라보곤 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방금 심연에서 길어 올린 차가운 물보다 더 깊고 고요하다.
그 깊은 눈빛의 사내는 바로 오늘 진시 경에 석가장을 떠나온 청운이다.
청운은 제갈신의와의 약속대로 딱 보름을 더 치료받았다.
청운이 꼬박 달포 이상을 석가장에서 치료에 전념한 셈이었다.
청운은 확실히 이전의 자기 몸과 현재 자기 몸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전에도 청운의 상태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적당히 무공을 수련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몇 시진을 꼬박 운기조식을 해도 어딘지 모르게 몸이 묵지근하고 개운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갈신의가 약조한 날짜를 다 채우고 운기조식을 했을 때는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바로 어제가 그날이었다.
청운은 석가장을 떠나올 때 제갈신의에게 몇 번이나 진심을 다 바쳐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신의의 장담대로 청운은 지금 자신의 무위가 한 단계 더 발전한 것 같다고 확실히 느꼈다.
청운이 석가장을 떠나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초가보주 천성검 초우람이 득달같이 석가장으로 달려왔다.
천성검은 청운에게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해 줘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청운을 가문의 은인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그는 청운에게 언제든지 자신의 힘이 필요하면 말만 하라고 했다.
그는 무력이든 재물이든 무엇이든지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청운이 도저히 갖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거금을 선뜻 내어 놓았다.
청운이 극구 사양하자 초가보주는 아예 그 돈을 은하전장에 맡겨 버렸다.
그는 청운에게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찾아 쓰라고 말했다.
청운은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고 말았다.
그리고 석가명은 청운이 석가장에서 삼공적을 시험하기 위해 탔던 말을 내주었다.
하지만 청운은 산길을 오르는 데는 오히려 번거롭다며 석가장에서 계속 보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석가장을 떠날 때 청운이 가장 우려를 했던 사태는 오히려 벌어지지 않았다.
청운이 가장 걱정했던 일은 석가영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영은 무덤덤하게 청운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청운은 그게 더 가슴이 아렸다.
가영은 자신이 울면 떠나는 청운이 가슴 아파할까 봐 목젖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영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운도 찔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가영은 울지 않는 대신에 청운으로부터 다음에 꼭 석가장에 들러야 한다는 확약을 기어이 청운에게서 받아냈다.
석가장에 머문 달포간의 기간이 자신에게 꼭 낭비만은 아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게 석가장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었기에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
사람이 어느 곳을 더 유심히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이 보는 풍경의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청운이 석가장에서 제갈신의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한시바삐 해야 할 일을 당장 하지 못한다는 조급함뿐이었다.
반면에 그 기간 청운이 얻는 것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강호의 명망 있는 석가장과 초가보 사람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섬서의 진무사령 주호영을 비롯해 개방의 소방주인 비류천보 혁소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앞으로 그들 모두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이 될지언정 전혀 해가 될 인물들은 아니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특히 제갈신의와의 인연은 자신의 강호행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이라 청운은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