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70화 (70/184)

070화 어찌 저들뿐이겠는가?

“아… 참, 내 정신 좀 보시오. 내가 사람을 불러놓고 이런 쓸데없는 하소연이나 하고 있으니… 나, 원, 참. 두 분께선 이 서류들을 찬찬히 읽어보시고 특별히 잘못된 곳이 없다면 수결을 부탁드립니다.”

청운과 석가명은 주호영이 내민 서류들을 쭉 훑어본 후 하나하나 수결을 했다.

서류의 내용이 거의 엇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서류는 여러 부였다.

좀 성가셨으나 청운과 석가명은 관의 일이 원래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군소리 없이 각각의 서류에 일일이 수결을 했다.

주호영은 그 서류들을 특정한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 동시에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같은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각각의 서류는 서두와 말미의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물론 그것의 표현이 다른 것이지 의미가 다른 건 아니었다.

청운은 관의 서류들이 실제로 유용한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측면에 치우친 면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긴 서류가 그래야 관의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운과 석가명은 나중에는 주호영이 내민 서류를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수결을 했다.

잠시 후 수결을 다 마신 청운이 주호영에게 그만 가 봐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주호영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포권을 취하며 배웅했다.

청운과 석가명도 포권을 취하고 막 돌아서려고 할 때 주호영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 참, 두 분께 좀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혹시 상부의 문제로 인해 한 번 더 관아를 방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

“물론 제가 가능하면 그런 일을 만들지는 않겠지만…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하던 일이 바빠 멀리 나가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 * *

청운과 석가명이 월동문을 나와 살펴보니 가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영이 있던 곳에는 청운과 석가명이 타고 온 두 필의 말만 처음에 매어 두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영은 그새를 못 참고 사라지고 없었다.

석가명이 큰 소리로 몇 번 불러보았지만 가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영을 찾는 석가명의 목소리를 들은 경비병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석가장의 어린 아가씨는 소성주와 함께 저기 건물 뒤편의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고 그가 손으로 먼발치에 있는 전각 뒤를 가리켰다.

청운과 석가명은 경비병이 가르쳐준 전각 뒤를 돌아갔다.

연못은 별 특징도 없었고 크기도 자그마한 했다.

가영은 연못가에서 제 또래의 사내아이 하나와 돌탑 쌓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가관이었다.

가영은 가만히 서서 손짓으로 뭔가를 시키고 있었고 성주의 아들은 가영이 시킬 때마다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돌을 나르고 있었다.

성주가 그 모습을 봤다면 기함을 할 광경이었다.

석가명은 혹시라도 성주가 그 광경을 볼까 겁이 나서 다급하게 가영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청운을 발견한 가영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가영은 성주 아들과 함께 쌓아 올리고 있던 돌탑을 발로 차 버리고는 쪼르륵 청운에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성주의 아들은 같이 잘 놀다가 갑자기 돌탑을 차 버리고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홀연히 가버리는 가영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석가명이 가영에게 그만 가자고 하자, 청운에게 한참을 쫑알거리던 가영이 살짝 고개를 들어 성주의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 놀이에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따라나섰다.

참으로 못 말리는 어린 아가씨였다.

청운 일행은 섬서에서 가장 진귀한 요리로 유명한 <진해루>에 들러 포식을 하고는 석가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가영이 청운에게 이것저것 사 달라고 해서 청운은 머리빗과 노리개 몇 개를 사주었다.

석가장에는 그것보다 더 값비싸고 귀한 것들이 많았지만 가영은 너무나 좋아라 했다.

청운이 사 준 것이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청운 일행이 성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관아에서 석가장까지는 그다지 높고 험한 산은 없었다.

대부분이 야트막한 동네 뒷산 수준이었다.

그런 산길을 반 시진쯤 갔을 때 난데없이 풀숲에서 수십여 명에 달하는 산적들이 나타났다.

청운과 석가명은 이미 오백여 장 밖에서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청운 일행은 가던 길을 그냥 계속 갔다.

청운과 석가명은 이런 야산에는 제대로 된 녹림도가 있을 것이라고는 아예 상상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들 무리는 녹림도가 아니었다.

녹림도를 흉내 낸 양민들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 또한 볼품이 없었다.

아니, 무기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제 딴에는 일부러 무서운 얼굴을 만들려고 억지로 인상을 구긴 채 청운 일행을 노려보았다.

무리의 앞에서 거만하게 무게를 잡고 선 몇몇만이 검과 도를 들고 있을 뿐 나머지는 낫과 곡괭이 같은 농기구를 들고 있었다.

무리의 앞에 선 자들이 들고 있는 검과 도조차 얼핏 보기에도 더 이상 무기로서의 효용 가치가 전혀 없어 공방에서 내다 버린 것 같은 고철 덩어리였다.

청운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동네 야산에서 멀쩡한 양민들이 이런 짓까지 할까 싶었다.

이것은 절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들의 몰골을 보자 청운은 점심때 자신이 먹은 산해진미가 영 소화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들이 이런 짓을 하게 된 연유는 전적으로 나라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무능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무관심과 무능이 만들어 낸 험악한 세월 탓이다.

오죽했으면 이런 양민들이 동네 야산에서 산적질을 시작했을까 싶어 청운은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 청운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청운은 그래도 이들을 이대로 놔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이대로 방치하면 조만간에 관가에 잡혀가 말할 수 없는 치도곤을 당할 게 뻔했다.

그라면 안 그래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저자들의 가족들은 말 그대로 횡액을 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청운이 그런 갑갑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녹슨 고철 같은 대감도를 어깨 위에 걸친 자가 무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구레나룻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자는 삼십 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제법 덩치가 컸다.

그래서 앞으로 나선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타고 있는 말과 가진 걸 모두 내놓고 썩 꺼져라. 그러면 목숨을 부지하는데 아무지장이 없을 것이다.”

“…….”

“우리 청산박 영웅들은 고분고분한 자들은 절대 심하게 핍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너그럽다. 자 빨랑빨랑 서둘러라. 곧 해가 진다.”

청운은 이들을 다시 양민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어야겠다고 작심을 했다.

청운은 저들에게 단단히 겁을 좀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말이 더 쉽게 통할 것 같았다.

청운은 말 위에 앉은 채 일부러 커다란 기합을 지르며 쾌—초식을 전개해 그들의 옆에 있던 어른 키만 한 바위를 세로로 두 동강 내버렸다.

자칭 청산박 영웅들이라고 말한 자들은 청운의 무위를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무림의 고수를 몰라보고 무례를 저지른 자신들을 제발 용서해 달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청운은 일부러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단,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녹림도 흉내 내는 짓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용서를 하겠다고 했다.

대부분은 즉시 그렇게 하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몇몇은 이 짓마저 못하면 자신들은 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울먹거렸다.

청운은 자신의 품속에서 은자 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던져 주며 공평하게 나눠 가지라고 했다.

석가명는 내일 석가장으로 자신을 찾아오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떠나는 청운 일행에게 바닥에 엎드린 채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청운은 방금 자신이 행한 일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중원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도적도 아니면서 도적질로 나선 자들이 어찌 저들뿐이겠는가?

그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와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도 그들 전부를 선량한 양민으로 되돌릴 순 없을 것이다.

저들은 운 좋게도 우연히 내 눈에 띄어 다시 양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것뿐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기 눈에 띄지 않은 자들의 삶까지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에 띄지 않은 그들에게도 자신 말고 다른 더 좋은 인연이 이어지기를 청운은 진심으로 바랐다.

이번 사건으로 뭔가를 가장 많이 느낀 사람은 청운도 석가명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가영이었다.

가영은 석가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자신은 앞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말했다.

청운은 그런 가영의 등을 몇 번이나 토닥여 주었다.

* * *

석가장으로 돌아온 청운은 곧바로 제갈신의를 찾아갔다.

자신이 얼마 정도 더 치료받으면 완치될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제갈신의가 반갑게 청운을 맞이했다.

청운은 인사를 끝내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손목을 제갈신의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청운은 이제 자신은 대주천과 소주천을 해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운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끝마친 제갈신의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청운에게 말했다.

“소협의 내상이 거의 다 나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증상이 없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고비이기도 합니다. 소협의 혈맥에 스민 사기와 요기가 지금 위기를 느꼈는지 죽은 듯 활동을 멈추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활동을 멈추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게 절대 아닙니다. 지금 소협이 어느 정도까지의 내공을 끌어올려도 전혀 그 어떤 증상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소협이 강적을 만나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틀림없이 소협의 혈맥에서 사기와 요기가 되살아나 요동을 칠 것입니다.”

제갈신의는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이참에 반드시 완치를 시켜야만 합니다. 제가 판단컨대 완전히 치료를 끝내게 되면 소협의 무위가 한 단계 정도는 틀림없이 더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 효과도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더 빠르다고요?”

“아마 그 이유는 그만큼 소협의 내공이 정순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폐관 수련한다 생각하시고 한 달 정도만 더 저를 믿고 치료를 맡기시면 반드시 제가 완치시킬 것입니다. 조금만 더 제 말을 믿고 치료에 전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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