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이 더러운 인간말종들
청운의 분노에 찬 일성에 놀란 여인 하나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녀들의 굼뜬 동작에 분노가 더욱 치민 청운이 재차 고함을 질렀다.
“됐다. 비켜나라.”
청운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엉거주춤 일어서다 만 여인이 다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청운의 무영검에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석문을 향해 번갯불처럼 뻗어 나갔다.
잠시 후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스—으—윽—슥—싹.
마치 종이가 잘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한 자가 넘는 석벽이 수십 조각으로 썰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흑의인들과 여인들은 그 광경에 아연실색하며 안색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석벽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석실 안에는 이십여 명의 여인들이 이 난리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온몸이 다 비치는 매미 날개 같은 나삼만 입고 있었다.
눈을 둘 데를 찾지 못한 청운은 재빨리 고개를 천장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아직 남녀관계에 터무니없이 미숙한 청운은 이런 일의 처리에는 완전 젬병이었다.
청운은 흑의인과 여인들의 전신을 찢어발길 듯 쏘아보며 물었다.
“저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사실대로 말해라.”
온몸을 벌벌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인이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마향수를 먹였습니다.”
청운이 재차 물었다.
“마향수가 뭔가.”
“앵속을 달인 물에 미혼약을 탄 것입니다.”
청운이 너무 어이가 없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앵속도 모자라 거기에 미혼약까지 타다니… 해독약은…….”
여인이 대답했다.
“해독약은 없습니다. 삼사일 지나면 절로 해독이 됩니다. 다만 금단증상 때문에 최소한 반년 이상은 정양을 해야 정상 생활이 가능합니다.”
청운은 속에서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짐승이라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너무나 참담한 기분에 청운은 그들에게 대놓고 명령조로 말했다.
“세상천지에 당신들 같은 마물들이 또 있을까. 아무리 용서해 주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구나. 빨리 저 연인들의 몸을 가려라. 덧입을 의복을 즉시 준비해라. 당장 앞장서라. 대웅전으로 가자.”
청운은 흑의인들의 수혈을 깊이 짚어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깨어나게 만든 후 여인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와 전각 밖으로 나왔다.
그때 지붕 위에서 어떤 기척을 느낀 청운이 지붕을 향해 나지막하지만 칼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당장 내 앞에 나서시오.”
지붕에서 십여 명의 청의인들이 표홀히 날아 내렸다.
제법 고수들 같았다.
특히 가운데 있는 삼십 대 중반의 청의인은 첫눈에도 상당한 고수처럼 보였다.
전신에서 만만찮은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그들이 이 시각에 굳이 만불사에 은신해 있는 걸 보면 재천신교의 무리는 아닌 것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청운이 번갯불 같은 안광을 발하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운데 있는 청의인이 청운의 얼굴과 전신을 잠시 훑어보더니 즉각 청운에게 되물었다.
“혹시 무위검 강 소협이 아니신지요.”
이런 곳에서 누가 자신을 알아보는지 의아해하며 청운이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강모요.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청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의인들이 일제히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위검 강 공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초가보 총순찰 양소보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저희는 약 일각 전부터 이 전각이 몹시 의심스러운 느낌이 들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
“혹시 저희 아가씨가 이 전각에 감금당해 있는 것이 아는가 하여 주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여인 중에는 저희 아가씨가 없는 것 같군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청운은 초가보 총순찰에게 전각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초서서 낭자는 오늘의 제물로 선택되어 아마 대웅전의 밀실에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시가 거의 다 되었으니 서둘러 대웅전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운은 총순찰에게 마향수로 이지를 상실한 이 여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총순찰은 두 명의 검사에게 일이 완전히 정리될 동안, 저 여인들을 석가장의 무사들이 은신하고 있는 만불사 외곽으로 모시고 가라고 명령했다.
청운과 총순찰 일행은 담벼락의 어둠을 이용해 은밀하게 대웅전 쪽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청운과 총순찰 일행은 대웅전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황당한 광경을 목도했다.
이미 대웅전 앞 연단 위에서는 제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얀 비단의 궁장을 한 세 명의 처녀가 연단 중앙에 마련된 제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단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녀들도 마향수를 마시고 이지를 상실한 것 같았다.
세 모두 밤하늘에 뜬 보름달만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초가보 총순찰이 가장 왼쪽의 낭자가 초서서 아가씨 같아 보인다고 청운에게 말했다.
제단의 양쪽에서는 악사들이 공후와 생황을 불며 한껏 제의의 분위를 띄우고 있었다.
제단의 맨 뒤쪽 황금색의 태사의에는 황금색 승포를 입은 자가 머리에 황금빛 천관을 쓴 채 앉아 있었다.
‘저자가 혈화제천이구나.’
청운은 그렇게 짐작했다.
그의 몸집은 상당히 비대해서 큰 태사의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청운은 총순찰 일행에게 아가씨는 언제라도 구출할 수 있으니 저들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좀 더 지켜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총순찰은 찰나도 참을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손을 쓰자고 말했다.
다시 청운은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며 저들의 실체와 전력이 완전히 드러날 때를 기다려 급습을 해야 다른 변수 없이 저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총순찰 일행을 진정시켰다.
청운이 총순찰과 급습의 순간에 대해 전음으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쿠—웅—쿠—웅—쿠—우—웅.
갑자기 웅후한 북소리가 장내에 세 번 울렸다.
그 북소리와 함께 적색 승포를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대웅전의 지붕 위에서 연단으로 날아 내렸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 승려들은 한쪽 어깨를 반쯤 내놓은 채 승포를 두른 모습이었다.
그때 연단 아래에 엎드려 있던 수백의 신도들이 일제히 외쳤다.
“팔대홍라님을 배알합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옴—드—드—니—오—홈.”
바로 그 순간 태사의에 앉아 황금빛 천관을 쓴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혈화제천이라는 자가 눈을 번쩍 떴다.
청운과 총순찰 일행은 그자의 눈빛을 보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으스스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자의 눈은 요사하게도 검은 동자가 거의 없었다.
흰자위만 투명한 회색의 유리구슬처럼 번들거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자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사이하고 요사한 귀기가 연단에 주변에 흘러넘쳤다.
청운은 그자의 눈빛을 보면서 어디서 꼭 한 번 본 것 같은 어떤 기시감 같은 걸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곧바로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그자가 눈을 뜨자 다시 연단 아래에 부복하고 있던 군웅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러댔다.
“혈화제천님을 배알합니다.”
이번에는 발까지 쿵—쿵—쿵 구르며 괴성을 질렀다.
“옴—드—드—니—오—홈.”
그리고는 곧장 아까와 똑같은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혈화제천이란 자의 눈빛이 어디서 본 것인지 문득 생각났다.
그자의 눈빛은 바로 설산의 빙하곡에서 본 백무기의 사이한 눈빛과 흡사했다.
청운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백무기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순음의 공력을 쌓은 것이리라.
그것도 수많은 처녀의 순음지기를 흡취해서.
그 생각을 하자 청운은 갑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연단 위로 뛰어 올라가서 혈화재천이라 불리는 저자를 쳐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청운은 분노를 억누르며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연단과의 거리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충분히 가닿을 거리였다.
고를 치는 소리와 공후와 생황을 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대웅전에서 흰색 장삼을 바닥에 질질 끌며 세 명의 젊은 여인이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들은 머리에는 방갓 모양의 백색의 관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들의 양손에는 약 사발 같은 핏빛의 제기가 들려 있었다.
그녀들이 연단으로 올라가 혈화제천이란 자에게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올리자.
혈화제천이 백사 같은 사이한 눈동자를 번들거리더니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다시 연단 아래 부복하고 있던 군웅들이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까와 똑같은 주문을 미친 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혈화제천은 대단히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팔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려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린 후 자신의 가슴 앞에 모아 합장을 했다.
그러자 핏빛 제기를 든 여인들이 오늘 제의의 제물로 정해진 처녀들 앞으로 걸어가더니 멈추어 섰다.
청운은 무슨 이유인지는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그 순간 저 처녀들에게 절대로 저걸 마시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청운이 총순찰 일행을 재빨리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지금입니다. 내가 저 제기들을 박살 낸 후 곧바로 혈화제천을 칠 테니 총순찰께서는 팔대홍라를 상대해 주시오. 그럼 내가 먼저 갑니다.”
청운은 총순찰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연단을 향해 신형을 날리며 커다란 일성을 토해 냈다.
청운의 목소리에는 분노에 가득 찬 내력이 잔뜩 실려 있어서 순간적으로 만불사의 전각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더러운 인간 말종들! 어디 세상에 할 짓이 없어 이런 요사한 짓거리를 벌이느냐.”
장내에 있던 재천신교의 무리는 이게 대체 무슨 소동인가 싶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아내느라 일순간 우왕좌왕했다.
그들이 목소리의 실체인 청운의 신형을 발견하기도 전에 이미 청운은 쾌—초식을 전개해 흰색 장삼의 연인들이 들고 있던 핏빛 제기들을 모조리 허공에 날려 버렸다.
일순간 연단 주변에 역한 약 냄새가 확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