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그의 속이 지금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황 노인이 청운의 찻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라 줄 때, 황 노인의 말대로 청운 자신도 자신이 하려는 일이 부디 잘 풀렸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황 노인은 청운에게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애써 숨긴 채 청운이 말했다.
“노야, 노야가 그때 저에게 주신 책을 번역해서 한 부 드리려고 지니고 다녔었는데 설산의 절곡에 떨어질 때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부 번역해 드리겠습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 노인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띄엄띄엄 실소를 터뜨렸다.
“강 서기, 그만 좀 웃기게.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인데 그깟 번역본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가. 자네도 참 어지간하네.”
황 노인은 청운을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신기한 생명체를 구경하듯 쳐다보며 말했다.
“하긴 내가 강 서기의 그런 점을 무척 좋아하기는 하지. 그 터무니없는 순수함과 진심이 강 서기의 가장 큰 매력이지.”
“감사합니다.”
“이보게 강 서기. 그 서책은 나에게는 아무짝에도 필요가 없는 것이네. 안 그래도 혹시라도 자네가 오면 주려고 했던 물건이 있네.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창고에 다녀올 테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게.”
황 노인은 반 다경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의 왼손에는 검은색의 광목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황 노인이 보따리를 탁자에 올려놓자마자 풀어헤쳤다.
검은 보따리 속에는 넓이는 한 척 정도 되고, 두께가 두 치 정도 되는 낡은 목함 하나가 보였다.
황 노인이 목함의 걸쇠를 풀고, 뚜껑을 들어 올리자 그 속에는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황 노인 그 책자를 청운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가 작년 가을 무렵에 내 친구를 만나러 개봉의 <만학서림>에 갔는데 그곳에 이게 있더라고. 자네 생각이 나서 내가 관심을 좀 보였더니, 나와 헤어질 때 그 친구가 선뜻 저 보자기에 싸주길래 가지고 왔네.”
“그렇습니까.”
“범어로 쓰인 걸 보니 천축에서 흘러온 것 같은 데 자네가 한 번 살펴보게. 아니, 그냥 가지고 가게. 나는 전혀 필요 없으니. 서책에 그려진 악기의 그림으로 봐서는 음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네.”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는 원래 여러 분야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그 책 속에 혹시 뜻밖의 횡재수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나.”
청운이 잠시 책을 살펴보았다.
상편과 하편 두 권이었다.
서책의 중간중간에 여러 가지 악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청운은 혹시 음공과 관련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서책을 목함에 넣었다.
범어로 쓰여 있어서 다 읽어 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청운은 황 노인과 함께 두어 시진을 더 보낸 후 하오문의 섬서분타로 향했다.
* * *
섬서분타의 건물은 청운이 알던 예전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장소는 분명 같은 곳이었지만 건물은 아예 새로 지은 것 같았다.
새로 지은 분타를 바라보자 청운은 괜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물끄러미 건물을 바라보다 대문을 밀었다.
청운이 분타 안으로 들어서자, 전에 <흑오파>의 문제로 청운이 섬서분타를 방문했을 때 청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문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이 갑자기 입을 딱 벌리더니 허리를 숙일 수 있는 대로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호법사자님을 뵙습니다.”
“호법사자님을 뵙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온 섬서분타주 섭평이 청운을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색을 하며 청운을 맞았다.
“섬서분타주 섭평이 호법사자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청운 역시 입가에 한 줄기 싱그러운 미소를 베어 문 채 분타주 섭평에게 반가운 인사를 했다.
“섭 분타주님도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청운이 방 안으로 들어가 상석에 앉자 곧바로 문도 하나가 차를 내왔다.
섭평이 청운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호법님께서 저번에 흑수방에서 받아내신 돈으로 분타를 아예 새로 지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호법님이 보여준 무위가 섬서땅에 소문이 짝 퍼져서인지 이젠 어떤 방파도 저희를 우습게보지 않습니다.”
“다행이군요.”
“그 모든 것이 호법님 덕분입니다. 얼마 전에는 화산의 태청일검마저 이기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분타를 방문하시기 전에 저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좀 더 편히 모실 준비를 했을 텐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접대가 소흘한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불현듯 분타에 방문하신 걸 보니 아무래도 저에게 무슨 하명이라도 계시는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운은 손사레를 치며, 그런 말이 함부로 나돌지 않도록 문도들의 입단속을 당부했다.
청운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섭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 유시쯤 되지요. 조금 있으면 나를 만나기 위해 석가장의 석가명 공자가 이곳 분타로 올 것입니다. 그전에 혹시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재천신교에 관해 조사한 정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네.”
“특히 얼마 전에 실종된 초가보의 영애인 초서서 낭자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재천신교에 관한 것이라면 무슨 정보라도 괜찮습니다. 전부 가져오시지요.”
섭평은 옆에 시립하고 있던 한 문도에게 밀실에 가서 재천신교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청운에게 섭평 자신이 알고 있는 재천신교와 초서서의 실종에 관한 것을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재천신교는 자신들의 살아 있는 신인 천주를 섬기면 장생불사한다는 말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집단입니다. 최근에 중원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호해 세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전부 새빨간 거짓에 가깝습니다.”
“…….”
“그들은 자신들의 천주를 섬기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사람들을 유혹해서는 재산과 전답을 마구잡이로 갈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상 그들이 하는 짓거리는 사마외도의 마두들보다 더 사악했으면 사악했지 결코 덜 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 무리는 신도들의 재산을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강탈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면 희생공양을 빌미로 가차 없이 신도들의 목숨까지 빼앗고 있습니다.”
청운은 섭 분타주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섭 분타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소문에 의하면 심지어 남자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처녀들을 납치해 사악한 무공을 연마한다는 말도 나돕니다.”
“…….”
“아마 초가보 초서서 낭자의 실종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들의 만행이 하도 사악하고 악독해서 관부와 진무사에서도 비밀리에 조사관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청운은 그자들이 눈앞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쳐죽이고 싶었다.
청운은 섭 분타주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목이 타서 자기 앞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 재천신교에 관한 정보를 가지러 밀실에 갔던 문도가 한 아름의 서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서류에 적힌 내용들은 섭 분타주가 말한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각각의 사건들이 좀 더 일목요연하게 날짜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청운이 그 서류들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문도 한 명이 방문 앞에서 청운에게 보고를 했다.
“호법사자님, 지금 이곳에 석가명 공자가 호법님을 뵈러 찾아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자 석가명이 초조한 심경을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청운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가 포권을 취한 후 자리에 앉자 청운이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그의 얼굴에서 조급함과 불안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는 잠시도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른손으로 왼손 등을 연신 문지르며 계속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청운은 그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이 아렸다.
청운이 그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며 말했다.
“공자님, 그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간신히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석가명이 연신 초조한 눈빛을 흘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소협, 저는 지금 이곳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만불사에서 곧장 오는 길입니다. 재천신교의 무리가 그곳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저희 석가장의 삼 총관과 검사 여섯 그리고 초가보의 총순찰과 수석검사 여덟이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 느낌상으로는 왠지 초서서 낭자가 그곳에 감금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자시 경에 재천신교 무리들이 대대적인 희생공양 행사를 치른다고 합니다. 그 희생공양에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태어난 처녀 셋을 바친다고 합니다. 초서서 낭자의 사주와 똑같습니다.”
조급함에 잠시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석가명의 두 손을 청운이 꽉 움켜쥐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만불사로 가 봅시다.”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섭평도 일어섰다.
자신도 무공이 고강한 문도들과 같이 가겠다고 했다.
청운은 그를 완강히 제지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몰려들면 그들이 무슨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니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청운이 섭평에게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이 따로 분타주에게 연락을 취하겠다고 말한 후 청운은 석가명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석가명은 문을 나서자마자 경신법을 전개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만 보아도 그의 속이 지금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청운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