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61화 (61/184)

061 천—주—앙—복—연—년—세—세

석가명이 합석하는 바로 그 순간, 청운의 머릿속 구상은 풍비박산 나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청운은 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마음에 자기 앞에 있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때 석가명이 자신이 한 잔 따르겠다며 청운의 자작을 제지했다.

청운이 괜찮다고 몇 번을 거듭 사양했으나 석가명이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청운은 그가 따라주는 잔을 받았다.

술 한 잔을 따르자마자 석가명이 청운에게 운을 뗐다.

“강 소협, 안 그래도 꼭 한 번 뵙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저는 여태껏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원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저는 다가오는 올해 가을에 저와 혼인하기로 약조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초가보의 금지옥엽인 초서서 아가씨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며칠 전 성도에 나왔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의문의 납치를 당했습니다.”

“…….”

“함께 있던 시비의 말로는 성도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잡화점에서 노리개를 몇 개 사서 초가보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했습니다. 야트막한 산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 난데없이 칠팔 명의 흑의 복면을 한 자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흑의 복면을 한 자 말이오?”

“맞습니다, 초서서 낭자가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그자들의 무공이 워낙 강해 초서서 낭자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혈도가 제압된 그녀를 그자들이 마차에 싣고는 어디론가 갔다고 합니다.”

“흠…….”

“시비의 말로는 초서서 아가씨도 가전 무공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혀 나름 일류에 속하는 편인데 흑의인들의 무공 수위가 대단했다고 했습니다. 초서서 난자가 채 몇 초식도 펼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제압당했다고 했습니다.”

“…….”

“시비의 말로는 그들의 무공이 중원의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시비는 초장에 흑의인의 장력을 맞고 풀숲에 쓰러졌으나 정신줄은 놓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 사태를 모두 지켜봤다고 말했습니다.”

청운에게 말하는 내내 석가명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 묻어났다.

“이상한 것은 초서서 아가씨가 화를 당했던 바로 그날 오후에 요즈음 나날이 그 세를 불리고 있는 재천신교의 행렬이 이곳 섬서땅을 누비며 지나갔다고 합니다. 강 소협께서는 이 공교로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 일 때문에 제가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만사를 내팽개친 채 이렇게 섬서땅을 싸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소협께서는 하오문의 호법사자라고 들었습니다.”

“맞소.”

“하오문의 섬서분타로 가면 혹시 그녀의 실종과 관련된 어떤 정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초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워낙 다급해서 그러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석가장과 초가보는 섬서땅에서 나름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하고 있는 세력가이다.

한 곳은 황금으로, 다른 한 곳은 무력으로.

그 두 가문이 혈연으로 맺어지면 아마 화산파를 제외하고는 섬서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두 가문 간의 이번 혼사는 그만큼 중요했다.

게다가 청운이 보기에 석가명은 가문 간의 관계를 떠나 초서서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석가명을 바라보고 있자니 청운은 가슴이 아렸다.

청운은 둘이 잘되도록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다.

청운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석가명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짠한 눈빛으로 석가명을 마주 보며 말했다.

“공자,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녁 술시쯤에 화오문의 섬서분타로 오십시오. 그곳에서 저와 만납시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도우겠습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 석가명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청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연신 포권을 취했다.

바로 그때였다.

객점과 바로 인접한 대로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창문을 넘어 청운과 석가명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청운과 석가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시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천—주—앙—복—연—년—세—세.

천—주—앙—복—연—년—세—세.

기괴한 광경이었다.

붉은 적의를 입은 수십 명의 사내들이 ’천—주—앙—복—연—년—세—세‘ 라고 쓰인 황금빛 깃발을 높이 쳐든 채 앞서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여덟 마리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가 바로 뒤따르고 있었다.

마차의 후미에는 백색의 궁장을 한 일곱 명의 아리따운 미녀들이 꽃잎을 허공에 흩뿌리며 마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난데없이 대로에 커다란 굿판이 펼쳐진 것 같았다.

보는 사람에게 사이하고 요사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상한 행렬이었다.

그 기이한 광경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석가명의 얼굴이 돌연 돌처럼 굳어졌다.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석가명이 청운을 보면서 말했다.

“소협, 저들이 바로 재천신교의 무리입니다. 볼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무리입니다.”

재천신교의 무리가 객점에서 저만치 멀어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던 청운이 고개를 돌려 석가명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말했다.

“왠지 사이하고 요사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군요. 무리의 앞에서 깃발을 든 사내들이나, 꽃을 뿌리는 후미의 여자들 모두가 눈빛이 정상이 아닌 것 같군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마치 무슨 지독한 약물에 중독되어 누군가에게 영혼을 통째로 저당 잡힌 사람들 같습니다. 초서서 낭자의 실종과 직접적 관련이 있든 없든 저들 무리를 철저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느낌입니다만 저들 무리는 절대로 정상적인 종교단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요설과 현학으로 혹세무민하는 사교 집단 같아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요사한… 저들을 세세히 털어보면 틀림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들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석가명이 청운의 말을 곧장 받았다.

“소협, 저 행렬을 보고 있자니 뭔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당장 저들 무리를 몰래 미행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술시에 하오문 섬서분타에서 뵙겠습니다.”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석가명은 자신의 말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청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객점을 뛰쳐나갔다.

그만큼 석가명은 초서서 낭자의 일로 초조해 있는 것 같았다.

청운은 저들 무리의 괴이한 작태로 보아 석가명 혼자서 미행하다가는 무슨 큰 횡액이라도 당하지 않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불안감이 돌연 청운을 엄습했다.

청운은 더 이상 이곳에서 음식을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청운도 석가명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객점을 나왔다.

청운은 잠시 목운서점에 들렀다 하오문 섬서분타로 갈 생각이었다.

목운서점으로 가는 길은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것이 청운이 알던 예전 그대로였다.

주변에 줄지어 늘어선 노거수와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담벼락이 청운을 보고 그동안 왜 이렇게 안 왔었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달라진 것은 이 년 만에 이 길을 걸어가는 청운 자신뿐이었다.

목운서점에 이르는 길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리고 길옆에 늘어선 집들도 너무 고색창연해 퇴락해 보이기까지 했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무너진 담벼락들이 그 퇴락의 적막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청운이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혼자서 차를 홀짝이고 있던 황 노인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반가움에 못 이긴 쭈글쭈글한 황 노인의 두 손이 청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황 노인은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청운의 얼굴을 보고 또 쳐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청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던 황 노인이 그제야 청운에게 앉으라고 손수 의자를 빼주었다.

황 노인은 너무 오랜만에 보는 청운에게 반가움을 넘어 감격까지 하는 것 같았다.

황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청운에게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

“살아 있었구먼.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어. 하남표국이 하룻밤 새 횡액을 당했다는 소문은 나도 벌써 들었네. 그 소문을 듣고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 상심을 했는지 강 서기는 모를 것이네.”

황 노인은 급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하긴 갑자기 아무 소식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보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훨씬 더 초조하고 힘든 법이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틀림없이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네.”

“…….”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관상 하나는 좀 볼 줄 알거든. 자네는 절대 단명할 상이 아니네. 그런데 자네 무공을 익혔나. 나는 무공을 전혀 모르지만, 자네가 풍기는 분위기랄까 기도랄까…….”

“그동안 본의 아니게 상심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여튼 뭔가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 좀 해보게. 궁금해 미칠 지경이네.”

청운은 황 노인에게 거듭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우여곡절을 황 노인에게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청운의 이야길 듣는 동안 황 노인의 안색은 마치 동정호에 이는 격랑처럼 수시로 출렁거렸다.

청운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황 노인은 땅이 꺼질 것 깊은 한숨을 이따금 내쉬기도 했다.

특히 청운이 대파산의 절벽에서 떨어져 간신히 살아난 순간과 설산에서 겪은 고초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두 눈가에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청운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들은 황 노인이 다시 청운을 짠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그런 고초와 횡액을 겪고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와서 지금 나와 이렇게 차를 함께 마시다니, 자네는 정녕 하늘이 낸 사람일세.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기죽지 말고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밀고 나가게.”

“말씀 감사합니다.”

“자네가 하려는 일이 너무 엄청나서 앞으로도 수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틀림없이 자네는 그걸 잘 헤쳐 나갈 것이네. 자네 얼굴에 그런 게 다 나와 있어. 아주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오늘 내가 한 말을 명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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