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이 일을 잘 마무리할 능력이 있는지도 보아야겠네.
청운이 가운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첫눈에 보이는 방의 내부는 단출하고 소박했다.
방안에는 직사각형의 다소 긴 탁자와 의자 몇 개를 제외하고는 일절 어떤 장식도 없었다.
흰색의 학창의를 입은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초로의 중년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청운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강 소협. 노부가 바로 허명뿐인 화산 장문인 장모라네.”
그는 바로 현 화산 장문인인 태허진인이었다.
듬직한 체구에 반백의 머리와 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그의 인상은 처음 보는 사람도 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호남형이었다.
하지만 웃음 너머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의 눈빛은 비수처럼 날카롭고도 형형했다.
탁자에는 태허진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또 한 명의 초로의 중년인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강퍅한 얼굴의 그는 키가 상당히 커 보였다.
칼날 같은 눈빛이 태허진인보다 더 예리하고 형형했다.
그의 몸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찻주전자를 쥐고 차를 따르는 커다란 손이었다.
일반인의 손보다 거의 반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얼핏 본 그의 손바닥에는 온통 굳은살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척 보기에도 평생 검만을 만진 손이었다.
청운이 잠시 방안을 둘러보다 맞은편 벽에 무심히 시선을 주고 있을 때 태허진인이 청운의 소매를 끌고 탁자 앞으로 갔다.
“강 소협, 인사하시게. 여기 이분이 바로 태청일검 육검자 사형이시네.”
장문인의 소개를 받은 육검자가 의자에서 살짝 일어나며 청운을 쳐다봤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내가 바로 화산의 소졸 육검자라네. 소협의 신태를 보니 강호의 소문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 또래의 사람에게서 이 정도 기도를 느낀 건 난생처음이네.”
청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육검자는 말을 이었다.
“도대체 어떤 유파의 무공을 어떻게 수련했기에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자, 우선 이리와 차부터 한잔하게. 이래 보여도 이 차는 화산 제일의 절지인 노군동에서 올해 처음으로 수확한 것이라네.”
육검자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청운의 전신을 한참이나 더 살펴보고 난 후에야 청운에게 차를 권했다.
육검자에게 묵례를 한 청운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탁자에 차분하게 내려놓자 태허진인이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소협, 화산이검은 어디서 만났나. 그리고 소협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장 장문인의 물음에 청운은 화산이검과 설산에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청운의 말을 듣는 장 장문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특히 화산이검이 청운의 검에 의해 이미 검하고혼이 되고 말았다는 청운의 말에 그는 깊은 회한을 얼굴에 내비쳤다.
청운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화산이검은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소. 다른 제자들보다 검에 대한 이해도 빠르고 성취도 탁월했지요. 그런데 그만 악에 물들어 그런 간악한 짓을 저질러 파문되더니 결국 그렇게 삶을 마감하고 말았군.”
퍽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소협은 처음에 내가 아니라 내 사형을 찾았다지요. 소협이 화산에 온 진정한 목적은 화산이검 때문이 아니라 내 사형에게 볼일이 있을 테지요. 무슨 연유인지 말해 보시오.”
장 장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운은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고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으로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곧장 육검자에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육검자 노 선배님, 天을 아시지요. 제가 여기 온 목적은 노 선배님이 天과의 관계를 이쯤에서 끊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육검자는 마시던 찻잔을 다급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놀라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청운을 쳐다보았다.
아니, 무섭게 노려본다는 표정이 더 적절했다.
육검자는 네가 그걸 어찌 알았냐는 듯 한참을 청운을 쏘아보았다.
곧바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협이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협은 몰라도 될 걸 기어코 알고 말았군. 아마 그동안 소협의 신변에 위험이 끊이지 않았을 걸세.”
“…….”
“나도 天이 광명정대한 집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렇다고 그들이 무슨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의 무리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네. 天과 나의 관계 또한 그렇게 문제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네.”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天이 내 검이 필요할 때 잠시 빌려주기로 했고, 天은 그 대가로 나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기로 했네. 또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다짐도 받았네. 내 검은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 없다고.”
육검자는 차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그들도 승낙했네. 그들과 나의 관계는 그게 전부네. 그리고 무당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나에게는 소협이 이해하지 못할 피치 사정도 있네. 그것만 기억해 두게.”
육검자의 말을 다 듣고 난 청운이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말을 받았다.
“피치 못할 사정은 왜 늘 힘없는 약자에게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힘을 가진 강자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노 선배님과 天의 관계가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
“가령, 화산파의 영향력이 지대한 이 섬서땅에서 육검자 노 선배님이 그들의 뒤를 봐준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나쁜 짓을 일삼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합니다.”
말은 계속되었다.
“제가 잠시 조사한 바로는 하남표국의 멸문지화는 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산서표국, 산동표국, 하북표국의 멸문에도 그들은 깊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저도 그들의 노림수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청운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마련과 사도, 심지어 황궁과 관계의 인물까지 자신들이 필요하고 점찍은 인물을 하나하나 포섭해 자신들의 도구로 적절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
“정도의 인물에게는 마도와 사도의 인물을 제거하게 하고, 마도와 사도의 인물에게는 정도의 인물을 제거하도록 하지요.”
“…….”
“그래서 정파의 인물들은 불의한 자를 죽였기에 협을 행했다고 생각하고, 마도와 사파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정파의 인물을 죽였기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정파의 입장에서든 마도나 사파의 입장에서든 당연히 죽여야 할 자들을 죽였기에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요.”
장 장문인과 육검자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天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정파와 사파가 서로 검을 겨누게 만드는 것. 天은 그 교묘한 틈을 이용해 전 중원의 상권과 재계를 장악해가고 있습니다.”
청운의 손은 어느새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으로 관계와 황궁의 인물들을 포섭해 권력까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필요한 인물을 하나하나 포섭하는 걸 그들은 천망天網을 구축한다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된다는 투로 청운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중원에서 장사로 돈을 벌 수 없고, 출사하여 관계에 진출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 중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라 간의 크고 작은 전쟁들도 그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
“그들은 전 중원의 공방을 장악해 밤낮없이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무기로 군주들의 탐욕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도록 서로를 이간질합니다.”
청운은 육검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물었다.
“노 선배님, 그게 악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무엇이 악입니까? 저는 이 일에 저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청운의 말을 듣는 내내 장 장문인과 육검자의 안색은 점점 더 심각하게 변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 장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청운의 말을 받았다.
“요즘 강호에 어떤 거대한 암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나도 느끼고는 있었네. 그게 天, 아니 天網이란 말이지. 지금 소협의 말을 듣고 나도 깨달은 것이 많네. 소협의 견해에 사형의 생각은 무엇인지요.”
장 장문인의 질문을 단도직입으로 받은 육검자는 식은 차를 한 모금 급하게 들이킨 후 씁쓸하고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청운을 쳐다봤다.
“소협의 말을 듣고 나도 나름의 깨우침이 있었네. 그 점 고맙게 생각하네. 사실을 모르고서는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알고서는 그렇게 계속할 수는 없을 것 같네.”
잠시 말을 멈추던 육검자는 다시 입을 떼었다.
“하지만 소협, 속가제자를 다 포함하면 우리 화산의 식구가 삼천이 넘네. 화산의 살림을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화산의 재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네.”
“…….”
“당장은 힘들지만 앞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른 방법을 적극 고려해 보겠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소협이 이 일을 잘 마무리할 능력이 있는지도 보아야겠네.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면 안 하는 것만 못한 법. 내 삼 검만 받아낸다면 소협을 인정하겠네. 자신이 없으면 아예 지금 당장 하산하게.”
화산의 장 장문인과 육검자는 역시 무림의 거인이었다.
그 명성이 헛되지 않다고 청운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청운은 육검자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화산에 올 때 이미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청운은 이 대결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는 이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생각한 일만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을 때 진짜 이길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장문인과 육검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 * *
연화봉 아래 공터에 청운과 육검자가 이장 여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청운은 육검자와 마주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천산에서 파황군이라는 시체 얼굴을 한자와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중압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청운은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는 겨우 ‘멸환’의 초입에 간신히 들어선 상태였다면, 천년빙화과를 섭취한 지금은 ‘멸환’의 경지가 거의 구성 가까이 이르렀다.
그리고 내공 또한 몰라보게 증강되었으며, 초식과 초식의 연격을 통한 새로운 경지도 맛봤다.
최선을 다한다면 크게 낭패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청운은 자신을 다잡았다.
지그시 청운은 응시하던 육검자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뗐다.
“소협, 내 검에는 눈이 없다네. 나는 처음부터 최고의 초식을 펼치기로 마음을 먹었다네. 부디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네.”
청운 역시 단호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육검자의 말을 맞받았다.
“제가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을 마시지요. 그럼 당장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