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항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반드시 내가 바라는 어떤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수단과 방법이 없기에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라도 나는 지금 그것을 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먼저 간다.
화산파다.
천시인 거령이 두 손과 발로 화산을 두 개로 쪼개자 그 사이로 황화가 흘렀다고 한다.
그 흔적이 ‘고장’이라 했던가.
과연 화산을 갈라치며 흐르는 황하의 물결은 웅장하다 못해 장대했다.
화창한 봄날이라 그런지 황화에는 대낮부터 배를 띄워 놓고 여여한 바람에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가롭게 황화의 햇빛이 잔물지는 잔잔한 수면 위를 수십 척의 배가 소금쟁이처럼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특히 서너 척의 배는 그 크기가 대단했다.
고루거각을 물 위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런 배에서는 풍악도 울리고 있었다.
대낮부터 음주가무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청운은 어렵지 않게 배를 구해 황화를 건넜다.
배에서 내린 청운은 곧바로 화산파의 본궁인 상궁上宮이 있는 연화봉으로 향했다.
* * *
얼마쯤 올랐을까.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세상천지가 다 도화였다.
화산의 절경인 ‘도림새’였다.
청운은 자신이 꿈속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운은 잠시 멈추어 서서, 끝도 없이 펼쳐진 도화의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청운은 이런 절경을 자신이 평생에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도화는 눈 시리도록 화사했지만, 도화를 저토록 황홀하게 피워낸 도화 나무의 밑동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울퉁불퉁하고 거무튀튀했다.
그게 삶이었다.
나무는 저 화사한 꽃을 가지마다 자기 얼굴로 매달기 위해 일평생 자기 몸을 쥐어짜며 버티고 버틴 것이다.
화려함 바로 아래의 음지에서 목숨을 다해 견디는 인고의 세월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보였다.
보기 좋은 꽃은 절대로 그냥 피는 게 아니다.
강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어둡고 습한 곳에서 꽃이 만개할 때까지 버티고 견디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하나의 명문정파가 강호에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힘없고 작은 방파와 개인들이 숨을 죽이며 납작 엎드려야 가능하다.
섬서성에서의 화산파가 차지하는 위치는 늘 꽃의 자리였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얼마나 더 산길을 올랐을까.
백여 장 앞에 화산파의 경계를 나타내는 산문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다 올라온 것인가.
청운은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뱃속까지 들어온 시원한 화산의 맑은 공기가 청운의 상념을 단번에 깨웠다.
멀리 화산파의 상징인 연화봉이 보였다.
청운이 산문 십여 장 가까이 다다르자 머리에 청색의 영웅근을 두르고 청의의 무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 둘이 청운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허리에 청강검을 차고 있었다.
검의 손잡이에는 세 개의 푸른 수실이 보기 좋게 달려 있었다.
청운은 화산의 삼결 제자인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청운이 산문 근처로 오자 왼쪽에 있는 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소협은 화산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저는 화산의 삼대 제자 화주영이라 합니다.”
청운도 깍듯이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저는 강청운이라 합니다. 태청일검 육검자 노 선배님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청운의 이름을 들은 화주영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청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요즘 강호에서 무명을 떨치고 계시는 무위검 강공자 소협이시군요. 근데 무슨 연유로 육검자 사백님을 뵙고자 하시는지요.”
청운이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설명은 육검자 노 선배님을 직접 만서서 하겠습니다. 위에다 기별을 넣어 주시지요.”
갑자기 화주영의 말투가 단호하게 바뀌었다.
“육검자 사백님은 우리 화산파의 최고 배분의 어른이십니다. 명확한 명분 없이 아무나 만나실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멀리 배웅은 해드리지 못합니다.”
축객령이었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청운은 산문에서부터 굳이 무력을 사용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살짝 거짓말을 했다.
설산의 유라궁에서 맞닥뜨렸던 화산이검의 이름을 팔았다.
“화산이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만 들여보내 주시지요.”
화주영은 얼굴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잠시 후 원래의 얼굴색을 회복한 그가 다시 한 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소협, 화산이검 사숙에 관한 일이라면 장문인을 먼저 뵙자고 하는 게 일의 순서인데… 어찌 육검자 사백님을 먼저 찾으시는지요.”
청운은 내친김에 한 번 더 거짓말을 했다.
“소문으로는 화산이검이 육검자님의 제자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지요. 저로서야 귀파의 장문인을 먼저 뵈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청운은 어차피 일이 이렇게 틀어졌으니 이참에 장문인을 먼저 만나도 전혀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화주영이 뭔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자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제, 무위검 강 소협께서 화산이검 사숙님의 일로 장문인을 뵙고 싶어 하신다는 기별을 윗전에다 넣게.”
말을 마치자마자 화무영은 다시 청운 쪽으로 돌아보더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소협, 윗전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연락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청운도 화무영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청운은 멀리 보이는 연화봉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다시 축객령을 내린다면 이번에는 힘으로 밀치고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곳까지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그냥 하산할 수는 없다.
청운은 가능하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번 화산행이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강호의 일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대부분 무공의 고하로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일이 가능하면 벌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하고 청운은 우려를 했다.
하지만 강호의 일이란 항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한다고 그는 자신을 다잡았다.
일이 잘 풀리건, 못 풀리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어차피 한바탕 칼부림을 각오하고 나선 화산행이다.
어쩔 수 없다면 결국 일의 마무리는 무공의 고하로 판가름 날 터였다.
수중동굴에서 구무자의 심득을 얻어 스스로 무공을 깨친 청운이 강호에 발을 내디딘 이래로 화산의 태청일검 육검자의 무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는 현 장문인인 태허진인 장무현의 사형이었다.
저자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무위는 현 장문인을 단연 능가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화산에 육검자가 있어 진정한 검이 있다’라고 상찬하기도 했다.
육검자는 어릴 때부터 무공의 신동으로 섬서지방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열 살이 채 안된 나이에 화산파에 입문한 그는 화산파 대부분의 진산절기를 통달했다고 했다.
특히 검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백여 년 동안 화산의 그 누구도 대성하지 못했던 태청검법의 극의까지 깨우쳤다고 알려져 있다.
청운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지 일다경 정도 흘렀을까?
조금 전 윗전에 기별을 넣으려고 올라갔던 장한이 헐레벌떡 내려오는 모습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산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청운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소협, 위로 올라오시랍니다. 옥연지 앞에서 대사형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청운도 그에게 포권을 취한 후 옥연지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식경쯤 올랐을까?
청운의 눈앞에 수정처럼 맑은 물이 가득 고인 연못이 나타났다.
옥연지였다.
옥연지의 수정처럼 맑은 수면에는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구름까지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수면 위에서 출렁이는 무수한 도화가 사라유리와의 이별을 상기시켰다.
작은 물결에도 이리저리 쏠리는 도화의 낙화가 청운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라유리.
차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다시 그 말을 삼키며 깨물던 그녀의 입술처럼 안쓰러웠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옥연지를 바라보고 있던 청운은 뒤로 누군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청운이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눈앞에 기개가 헌앙한 이십 대 초반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한 올의 흠도 없는 청색의 영웅건을 이마에 두르고 있었고 영웅건과 똑같은 색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그의 검 손잡이에는 네 개의 푸른 수실이 보기 좋게 달려 있었다.
그는 화산파의 사결 제자였다.
그가 한 발 더 청운 앞으로 다가서더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위검 강청운 소협이시지요. 강호에 협명이 자자한 소협을 이렇게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화산의 사결 제자 구서용입니다. 소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청운도 구서용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화산 칠검 중 셋째인 구소협이시군요. 저도 구소협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청운은 구서용의 뒤를 따르면서 그의 신태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바라보았다.
잘 벼린 한 자루 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화산 장문인의 직계 제자였다.
‘저 나이에 벌써 사결제자라니, 거기다 화산칠검 중 일인이라니.’
청운은 끊임없이 저런 제자를 길러내는 화산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옥연지를 왼쪽으로 돌아 일다경쯤 갔을까.
화산파의 상징인 상궁(上宮)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상궁(上宮)은 연화봉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상궁(上宮)은 화산파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듯 고색창연하면서도 웅장했다.
상궁 앞에서 발길을 멈춘 구서용이 건물의 가운데 문을 향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께 아룁니다. 강청운 소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에서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뫼시거라. 그리고 너는 물러가서 네 일을 보도록 해라.”
구서용이 들어가라고 청운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청운이 안으로 들어섰다.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안에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협,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