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56화 (56/184)

056화 비밀은 바로 천자문의 순서였다.

“그 무공은 대뢰음사의 대수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삼호의 목소리였다.

청운이 슬쩍 돌아보니 하오문주 서소지와 총사를 비롯해 백여 명이 넘는 하오문도들이 보였다.

청운이 걱정되어 흑수방에 몰려온 것 같았다.

청운은 아예 이번에 단 한 초식으로 모든 걸 결정지을 작정을 했다.

멸환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운이 그런 결정을 막 내리는 순간 두 눈에 흉광을 이글거리며 괴소를 흘리던 세외이마가 ‘이놈, 죽어라!’하는 고함을 지르며 벼락같이 청운은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집채만 한 손바닥이 청운의 전신을 짓이길 듯이 내리눌러 왔다.

청운도 방심하지 않고 곧장 칠성의 멸환을 무영검으로 떨쳐냈다.

청운의 무영검에서 뿜어진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와 세외이마의 집채만 한 손바닥이 장내에서 격돌했다.

장내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격돌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반쯤 허물어졌던 대전의 지붕이 사방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바닥에 깔려 있던 수백 장의 판석들이 바닥에서 허공으로 치솟아 소용돌이쳤다.

눈앞을 가리는 그 뿌연 먼지 속에서도 보일 것은 분명히 보였다.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허공을 가득 채운 거대한 네 개의 손바닥을 순식간에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가리 난도질하는 광경이 장내에 있던 모두의 눈동자에 비쳤다.

뒤이어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두 마디 단말마의 비명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잠시 후 장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자 청운을 제외한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청운을 도우려고 온 삼호와 하오문주는 경탄과 놀라움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흑수방주와 흑수방의 무리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경악했다.

처참했다.

세외이마의 시체는 수백 수천 조각으로 잘려져 거의 걸레 조각이 되어 있었다.

피륙과 핏물만 있고 세외이마의 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을 지켜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게 사람의 시체라고는 도저히 짐작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청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자신이 펼친 멸환의 위력이 이 정도로 엄청날 줄은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 아니면 멸환을 펼칠 때보다 신중해야 되겠다는 경각심을 청운에게 일깨워 주었다.

청운은 원래 세외이마를 전혀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장내에 있는 흑수방 수뇌부 인물들에게 어느 정도의 공포감을 심어주고, 함부로 자신의 일에 끼어든 세외이마에게는 적당한 징계를 내릴 정도로 일단락을 지을 참이었다.

그래서 단지 칠성의 공력으로 멸환을 펼쳤을 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불귀의 객이 된 세외이마에게 청운은 조금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청운은 애써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 채 무심한 눈빛으로 방주 묘하연을 쳐다보았다.

청운의 경천동지할 무위와 천년바위 같은 무심한 눈빛에 흑수방 방주는 극도의 공포심을 집어 먹었는지 신형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렸다.

그리고 그가 어떤 요구도 하기 전에 먼저 설레발을 쳤다.

“더, 더,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네 놈이 원하는 걸 모조리 들어주겠다. 말만 해라.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팔은 스스로 자를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하다. 그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들어주겠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청운은 방주의 말이 채 끝맺음을 맺기도 전에 무영검을 허공에 대고 재빠르게 한번 그어 내렸다.

청운의 검에서 내뿜어진 자황색의 섬광이 번쩍하며 방주 묘하연의 아랫도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직후 묘하연은 하오문도들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는 모양새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청운이 허공에 대고 무영검을 사선으로 살짝 그어 내렸다.

그 순간 흑수방 방주의 몸에서 뭔가가 땅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방주 묘하연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것이 바로 자기 왼팔인 줄을 알았다.

묘하연은 무참하게 땅바닥에 떨어져 선혈을 줄줄 내뿜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고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묘하연의 그 발악하는 모양새는 일방을 다스리는 수장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어지간히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묘하연의 몸에서 떨어진 왼팔이 지랄발광하는 자신의 몸을 안타까운 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독한 놈. 악귀 같은 놈. 내가 네놈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기어이 내 한쪽 팔을 잘라 내다니. 어디 두고 보자.”

흑수방 방주의 악다구니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청운이 돌연 검을 들어 올렸다.

묘하연은 자신의 내뱉은 욕지기에 청운이 분노해서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얼굴이 완전 사색이 되었다.

청운은 살짝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채 오른쪽에 있는 전각을 향해 검을 쭈욱 내밀었다.

현장에 있는 수백의 사람들이 청운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궁금해 하면서 모두가 청운의 검 끝을 주시했다.

청운이 내뻗은 검 끝에서 발출된 투명한 자황색의 검기가 전각에 닿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엄청나게 큰 전각이 지붕부터 차츰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각은 전각이 있었던 터만 남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에 흑수방 방주를 비롯해 장내에 있던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청운은 다시는 흑수방 같은 악도의 무리가 하오문을 넘보지 못하도록 극심한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십성의 멸환을 전각에 시전한 것이었다.

청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흑수방을 나섰다.

하오문 문주 서소지를 비롯한 하오문의 문도들이 청운의 뒤를 따랐다.

* * *

둥근 탁자에 청운과 하오문 문주 서소지, 그리고 총사 하여빈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주 서소지가 먼저 입을 뗐다.

“호법사자님,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거의 일 년 가까이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경천동지할 무위를 보이다니. 궁금해 미치겠으니 어디 차근하게 설명 좀 해주세요.”

청운은 천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천산의 천도봉을 찾았다가 파황군과 맞닥뜨린 일.

그리고 모용후의 추적을 받다가 설산의 망혼단애에 떨어진 일.

구십칠일 만에 유라궁의 신외지물인 빙혼대의 도움으로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얘기를 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기억을 잃고 광기가 폭주하여 파륵미찰과 설표를 추적한 일.

주화입마에 걸린 채 한빙열천에 떨어져 백무기를 처치하고 천빙열화과를 복용한 일들을 간략히 말했다.

사라유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청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문주 서소지와 총사 하여빈은 수시로 얼굴에 놀라움과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청운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총사 하여빈이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말했다.

“강 공자를 문의 호법사자로 천거한 사람이 사실은 바로 나였소. 내가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강 공자를 보자마자 영웅지상임을 단번에 알아봤소. 하지만 관상에 너무나 많은 고난과 우여곡절이 겹쳐 있어 잠시 고민도 했다오.”

“…….”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난과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바꾸며 영웅이 될 상이라 호법사자로 내가 문주님께 강력히 추천했다오. 이번에 겪은 엄청난 고난도 결국은 전화위복이 되지 않았소.”

하여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강 공자, 아니 호법사자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초지일관한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성취를 이룰 것이오.”

“감사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자의 모친과 동생 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계시니 안심하시고 사자가 원하는 큰 뜻을 세상에 펼치시길 바랍니다.”

청운은 총사 하여빈의 말을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늘 불안과 두려움이 앞서 번민했다.

그런데 총사의 말을 듣고 나서는 늘 자신을 옥죄던 불안과 두려움이 한결 경감되는 걸 느꼈다.

청운은 사람의 말에는 참 많은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무림이 아무리 말보다 칼을 앞세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싸움이 붙기 전에는 항상 말이 먼저 오가기 마련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 * *

청운은 다음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낙양의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걷던 청운은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곳에 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청운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낙양의 중심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한적한 산자락이었다.

야트막한 산의 우측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따라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의 개천 바닥까지 처진 버드나무 가지가 녹옥의 주렴처럼 하늘거리고 있었다.

살랑이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고색창연한 장원 같은 게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어릴 적 고향의 풍광을 보는 것 같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청운은 그 장원이 있는 쪽으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장원이 아니라 서당이었다.

훈장이 선창한 문장을 따라 읽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나지막한 담을 넘어왔다.

천자문을 읽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청운은 잠시 어릴 적 추억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서당의 담벼락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청운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번득, 뇌리를 스쳤다.

청운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천자문, 아니 천자문의 순서.

바로 그거였다.

대륙표국의 비고에서 훔쳐본 숫자의 비밀은 바로 천자문의 순서였다.

그렇게 안달복달해도 안 풀리던 비밀이 이렇게나 우연찮은 계기로 풀리다니 청운은 땡잡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누가 천과 연결되었는지를 안 이상,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가기만 하면 된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칼로 잘라 버리면 된다.

소림사의 무여대사, 무당의 적송자, 점창의 백록자, 화산파의 육검자…….

이제 천망으로 天과 연결된 자들의 면면을 알았으니 하나하나 끊어내면 된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정파에 속하고 무림에서 명망이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방법은 무림에 공론을 일으켜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세상천지에 알리고 인식시켜야 한다.

무림의 여론이 들끓어야 그들을 쳐낼 명분과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싸움의 시작도 정당하고 과정은 정당하고 결과 역시 정당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남표국의 멸문과 관련된 진상을 철저히 밝힐 수 있고 이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왜 그 명단에는 정파의 인물들밖에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사마외도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과 황궁의 인물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명단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래, 맞다.

천도봉에서 본 그들의 면면을 통해 서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기반으로 천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들은 그 역할 분담을 통해서 누군가를 포섭한다고 말했다.

포섭된 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세를 불리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확실치 않지만 파황군은 황궁 쪽 인물인 것 같았다.

몰랐으면 어쩔 수 없어도 사실을 안 이상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게 뭣이 됐던 어떤 결과물이 나타날 것이다.

天과 관련된 정파의 인물들을 하나둘 건드리다 보면, 결국 天과 얽혀 있는 마도나 사도의 방파와 인물들도 초조함을 못 이겨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어둠 속에 꼬리를 숨긴다면 그때 다시 중원표국을 털든지, 사해표국을 털던지 아니면 황궁을 뒤지면 된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지금 당장은 아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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