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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52화 (52/184)

052화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청운은 그곳에 들러 유라궁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청운은 자신이 대붕에서 내리면 저곳에 사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놀랄까 싶어 아예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렸다.

청운은 자신을 원하는 곳에 태워다 준 어린 대붕의 목을 정성껏 쓰다듬어 주었다.

대붕도 청운에게 목을 비벼댔다.

대붕은 청운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한동안 청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끼르륵 울면서 먼 하늘로 날아갔다.

대붕을 향해 손을 몇 번 흔들어 준 후 청운은 하얀 대리석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은 마치 눈의 궁전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아름다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 앞에 커다란 계곡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좌측 이십여 장쯤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출렁다리가 보였다.

켜켜이 눈에 뒤덮인 출렁다리는 거의 삼십여 장이나 되어 보였다.

청운이 막 다리를 건너려고 오른발 걸치자 난데없이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다리를 넘으면 당신은 죽은 목숨이다. 썩 물러가라.”

청운은 다리를 건너다 말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고 가겠소. 설산의 유라궁이 어디지요. 그것만 말해주면 곧장 되돌아가겠소.”

갑자기 호호하하, 하는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다시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렸다.

“왜 유라궁을 찾느냐. 너는 누구냐. 그리고 너의 그 몰골은 또 뭐지.”

그제야 청운은 자신이 둘둘 말고 있던 백무기의 가죽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강청운이라고 합니다. 유라궁에 긴히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서 그럽니다. 혹시 유라궁의 위치를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백무기의 가죽을 훌렁 벗어 버린 청운의 모습을 본 상대 너무 놀랐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투도 갑자기 달라졌다.

심지어 말을 더듬거리기도 했다.

“자,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공자님.”

상냥한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세 명의 여인이 건물 입구에 날아 내렸다.

그녀들은 모두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중원의 여인들과는 외모부터가 사뭇 달랐다.

피부는 눈보다 더 희고 얼굴도 작고, 키도 더 컸다.

몸의 굴곡 또한 중원의 여인들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특히 눈이 크고 그 눈빛은 하늘처럼 푸른색이었다.

세 명의 여인 모두 뛰어난 미인이었다.

특히 가운데 서 있는 여인의 미모는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녀가 청운을 빤히 쳐다보면서 청운에게로 살포시 걸어왔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신이군요.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이렇게 나타난 거지요. 우리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라도 돌아와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청운은 갑자기 정신이 어리벙벙해졌다.

청운은 저 여인이 자신을 다른 누구와 몹시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나를 닮은 사람도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청운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저는 태어나서 이곳에 처음 와 보는데. 어떻게 저를 아시는지요. 그리고 유라궁이 어디 있는지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청운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인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당신은 두 번 다 저를 못 알아보시는군요. 저번에는 ‘망혼단애’에서 떨어진 너무 큰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어서 저를 못 알아보시고, 이번에는 너무 말짱한 정신이어서 저를 못 알아보시는군요. 아아!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나요.”

“……?”

“잘생긴 공자님, 이곳이 바로 설산의 유라궁이에요. 이곳이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 당신은 본래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이곳에서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나 봅니다. 이를 어쩌나. 일단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듣도록 합시다. 자,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가 청운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앞장을 섰다.

청운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면서 반드시 자초지종이라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 * *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은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했다.

건물의 전면은 그 폭이 좁은 반면 건물의 후미는 뒤로 길쭉했다.

전면이 좁고 뒤가 길쭉한 이런 건물의 모양새는 아마도 일 년 내내 추운 설산의 기후와 밀접한 상관이 있을 것이라고 청운은 짐작했다.

유라궁의 접객당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주전자와 찻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찻잔 뒤에는 이십 대 초반의 산짐승 같은 한 젊은 사내와 사십 대 중반의 미부, 그 미부를 쏙 빼닮은 이제 갓 이십 대가 넘었을까 말까 한 탁월한 미모의 여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들은 강청운과 유라궁주, 그리고 사라유리다.

유라궁주와 사라유리는 나이 차를 빼고는 판박이처럼 닮았다.

유라궁주는 무슨 큰 병이라도 있는지 얼굴이 핼쑥하고 안색이 파리했다.

세 사람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그 심각함에 무거움을 보태듯이 찻잔에서 솟아나는 허연 김과 탁자를 꽉 채운 침묵뿐이었다.

그 심각함과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뗀 사람은 사라유리였다.

“공자님, 이 유라궁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까. 공자님께서는 망혼단애에서 떨어진 채 발견되어 저희 유라궁의 신외지물인 빙혼대에서 구십칠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자님은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사라유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자님이 깨어나신지 며칠 후, 마라성의 파륵미찰 무리가 화산이검을 앞세우고 저희 궁을 침범해 저희를 핍박하는 것을 보고는 공자님은 광기가 폭주해 버렸습니다.”

“…….”

“공자님께서는 유라궁에 있던 마라성의 무리를 모조리 처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마라성까지 파륵미찰을 쫒아가 그를 요절냈습니다. 저는 공자님이 그 후 설표를 추적하다 갑자기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라유리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는 거의 일 년이 지나서야 지금 이곳에 다시 나타나신 겁니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뭘 하고 계시다가 이제야 이렇게 나타나셨는지요.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 좀 해주십시오.”

사라유리는 말을 마친 후 청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청운은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자니 그동안 자신의 기억이 백지 같았고, 그녀의 말을 믿지 않자니 그동안 자신의 행적이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

모용후의 천녀혈수에 맞아 설산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 청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자신은 한빙열천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자신이 망혼단애에서 떨어졌을 때와 한빙열천에서 깨어났을 때는 옷도 머리 모양도 달랐다.

청운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서는 그동안 실종되었던 자신의 공백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품속에서 ‘빙혼검’과 ‘유라수’와 ‘빙혼검결’의 비급을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 한빙열천의 동굴에서 만난 사라영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라궁주와 사라유라는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유라수와 빙혼검결을 번갈아 펼쳐보며 감탄과 환희의 신음을 연신 내뱉다가 결국에는 눈가에 굵은 이슬까지 맺혔다.

사라유리가 감격에 겨운 나머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렇게 공자님과 인연이 이어지다니. 공자님은 저희 궁을 구하라고 하늘이 보내신 분이군요. 저희 궁에는 은혜를 입으면, 그분에게 어떤 소원이든지 한 가지 들어준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공자님, 무슨 소원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청운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은혜라면 제가 더 많이 입었지요. 구명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궁주님께서 어디 편찮으신 것 같은데 혹시 이 백무기의 내단이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청운이 한 손을 품속에 넣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밖에 제가 벗어 놓은 것은 백무기의 껍질입니다. 그리고 그 껍질 안에 덧댄 것은 빙화초이고 그 둘을 묶은 끈은 백무기의 혀입니다.”

청운의 말을 다 들은 궁주와 사라유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잊은 채 한동안 청운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청운이 품속에서 백무기의 주먹만 한 내단을 탁자에 올려놓자 그제야 그녀들은 청운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백무기의 내단을 본 궁주와 사라유리의 얼굴에 돌연 화색이 돌았다.

특히 사라유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한동안 감탄과 탄성의 신음만 내뱉던 사라유리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너무나 고맙습니다. 천하 음기의 결정체인 이 백무기의 내단과 빙화초만 있으면 어머니의 내상을 완치시킬 수 있음은 물론 유라수와 빙혼검결 또한 대성할 수 있습니다.”

사라유리는 감사의 말을 이어 계속했다.

“공자님은 정말로 저희 유라궁의 은인이십니다. 어려워 마시고 무슨 소원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라유리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면서 청운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청운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잠시 고민하더니 예를 갖춰 말했다.

“꼭 그러시다면 저에게 가장 시급한 한 가지 소원을 말하겠습니다. 반드시 들어주실 거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몹시 허기가 집니다. 우선 따뜻한 밥을 먹고 싶습니다. 술도 조금 있으면 더 좋고요. 그리고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한잠 푹 잤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가장 다급한 소원입니다.”

유라궁주와 사라유리는 청운의 말을 듣고 한참을 크게 웃더니 빙아와 빙영을 불러 음식을 차려오게 하고 목욕물을 데우게 했다.

청운이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방문을 열자 그곳엔 사라유리의 시비인 빙영이 있었다.

그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청운이 탁자에 앉으라고 의자를 내주자 빙영은 서서 말을 하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청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빙영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운이 망혼단애에서 추락해 거의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빙혼대에 구십칠 일을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가 깨어날 때 청운과 소궁주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지금 소궁주가 홀몸이 아니라고 했다.

빙영이 없는 사실을 지어낼 이유는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그런 패륜을 저지른 죄책감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고 그는 자학했다.

절벽이라도 있으면 당장 뛰어내리고 싶었다.

청운은 도대체 이 일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정신이 멍하고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빙영에게 소궁주를 좀 뵙고 싶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일다경도 안 되어 누군가가 청운이 기거하는 방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청운이 방문을 열자 사라유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어왔다.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청운은 사라유리에게 자신이 죽을죄를 지었으니 어떤 처벌과 책임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청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깊고 푸른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진 듯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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